Bug's Life

정연희展   2002_1113 ▶︎ 2002_1119

정연희_아름다운 만남_사진에 유채_162×130cm_2002

인사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29-23번지 Tel. 02_735_2655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라는 기형도의 「안개」라는 시 구절을 연상시키는 정연희의 작품은 사회 구조의 틀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억눌린 욕망들을 표현한다. ● 그는 캔버스를 이용한 회화적인 이미지의 틀에서 벗어나 사진이미지와 그 위에 구멍을 뚫고 유화와 아크릴을 흘려 넣는 실험적인 기법을 통해 사회의 구조의 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사진이미지를 통해 소외되거나 은폐된 사회의 이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자 하였으며, 그 사진이미지들을 뚫고 흘러내리는 물감 덩어리와 색채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시선에 비친 사람들, 아니 그의 시선에서 보면 벌레와도 같은 삶의 이면을 드러내고자 한다.

정연희_기억의 심로Ⅱ_사진에 유채_12×17cm_2002
정연희_기억의 심로Ⅰ_사진에 유채_12×17cm_2002
정연희_자유가 그곳에 있음에..._사진에 유채_37×99cm_2002
정연희_잊혀진 잔흔_사진에 유채_37×99cm_2002

억눌린 욕망, 지난 시간의 기억들, 감춰진 사회의 이면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혀진 단절된 역사적인 사건들은 그의 사진이미지와 물감덩어리 속에서 하나 둘씩 가슴속에 묻어둔 우리의 기억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작품「그곳에는」과「우리에게도 희망은 있을까」에서 낡고 헤어진 벽들과 아파트 문에 걸려 있는 빨래들과 엉기성기 얽혀 늘어져 있는 전선줄의 사진이미지와 그 위로 분출되는 오렌지 색채와 프러시안 블루의 색채를 통해 삶의 굴레에 갇혀 그의 시선에서 보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억눌린 욕망을 어렴풋하게 느끼게 한다. ● 작품「우리가 그곳으로 왜」는 전시장의 작품을 걸어놓는 벽면의 사진이미지와 두터운 마티에르를 느끼게 하는 곤색과 분홍색의 물감이미지로 작품을 전시하는 작가들의 꿈과 희망, 그리고 좌절을 그리고 있다. 작품 「목마른 가슴으로」와 「끝나는 순간에도 우리는」는 사회체제로부터 분리되고, 그 체계로부터 자의든 타의든 삶의 구속을 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작품 「목마른 가슴으로」에서 사진이미지로 배식을 넣는 작은 사각형의 틀과 반대편에 창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빛으로 숨이 막힐 것 같은 감방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으며, 배식구 주위의 하얀 물감의 이미지들을 통해 죄수들의 삶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연희_이리로 가면...Ⅱ_사진에 유채_12×17cm_2002
정연희_이리로 가면...Ⅰ_사진에 유채_12×17cm_2002
정연희_이리로 가면 희망이 있을까..._사진에 유채_41×65cm_2002

작품 「끝나는 순간에도 우리는」은 사진이미지로 사형장으로 가는 계단과 벽을 음울하게 담아내고 있으며, 계단과 회색의 벽 위에 두텁게 흘러내리는 하얀 마티에르로 사형장으로 가는 죄수들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작품 「그들의 꿈」,「자유가 그곳에 있음에」, 「잊혀진 잔흔」은 남북으로 분단된 민족의 역사적인 현실과 그 분단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자유가 그곳에 있음에」는 남북을 잇는 긴 자유의 다리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분노와 만날 수 없는 원망의 심정이 빨간색의 마티에르를 통해 교각과 난간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 작품 「잊혀진 잔흔」은 남북의 왕래가 끊겨 교각만 남아있는 이미지들을 통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지고 지난 시간의 흔적들만이 남아있는 욕망을 검정색의 마티에르를 통해 투출시키고 있다. 「그들의 꿈」에서는 단조롭고 따분하게 서 있는 판문점의 초병의 사진이미지에 밑칠용 보조제인 젯소를 사용하여 희미한 음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분단된 민족의 현실과 통일된 민족의 자유의 염원의 의지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것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정연희_우리는 그곳으로 왜?-분홍Ⅱ_사진에 유채_9.5×14.5cm_2002
정연희_그놈의 흔적_사진에 유채_41×65cm_2002

작품들 속의 벽 바랜 서민아파트,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자유의 다리, 단조롭고 따분하게 앞을 응시하는 초병,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이미지를 통해 사회구조의 이면과 사람들의 억눌린 욕망을 이야기하면서 작가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 작품 「드러낸다는 것은」, 「기다림」, 「이리로 가면 희망이 보일까」에서 그는 투명한 빛을 투과해 나오는 벽의 이미지와 대조되는 감춰진 벽들을 통해 나오는 물감이미지들을 통해 비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억눌려 놓거나, 감추어 놓음으로써 또는 은폐된 사회구조의 모순으로부터 고통받거나 신음하는 벌레와 같은 삶의 세계가 아니라, 마음속의 욕망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꿈꾸듯 내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세상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 조관용

Vol.20021115b | 정연희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