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이경률 지음

지은이_이경률∥판형_B6(판형) 쪽수_144쪽∥가격_10,000원∥마실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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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출판사 서울 도봉구 쌍문1동 422-80번지 Tel. 02_997_6595

사진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가장 친숙하고 손쉬운 창작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사진으로 무엇을 재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진은 언제나 객관적으로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모사한다. 만일 자신이 느낀 고유한 감성을 시가 아닌 사진으로 재현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촬영할 것인가? 그리고 재현된 이미지는 제3자의 눈으로 소통 가능한 것일까? 이 책의 주제는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 기존의 사진이론서들이 개념론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면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는 사진에 대한 예술론적 접근방식으로 사진보기를 시도한다. 이 책은 열 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지만 각각의 테마가 독립된 주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각 테마가 유기적 연관 속에 지향하는 사진미학에 대한 탐색은 그동안 사회적 통념 속에 포섭되지 못했던 소외되고 억압된 무의미와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사진 작업을 통해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있다. 또한 사회 문화적 코드로 고착된 의미 망을 비켜가거나 아예 건져 올릴 수조차 없었던 존재로부터 창작 행위의 근원을 찾는다. ● 이 책은 사진 예술로 미학에 대한 존재론적 관점뿐만 아니라, 이론과 비평을 아우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하여, 텔레비전 화면이나 영화화면 그리고 컴퓨터 화면에 이르기까지 영상 자료에 대한 미학적 담론, 작가의식의 발현, 사회통념에 통제 받지 않는 창조적 예술작업으로 관심을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내용 ●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진을 대할 때 작가의 분명한 메시지나 그 속에 함축된 의미를 찾아 나선다. 또한 사진은 특정한 시점의 상황을 재현하는 증거물로 우리 앞에 출현하기에 어떠한 주관적 해석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사진을 언어의 상징체계와 동일시하여 결국 사회 문화적 코드 안에서 인식 가능한 예술 매체로 국한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 이 책에서 사진은 더이상 의미론적 분석 대상이 아닌 하나의 자국이나 흔적(인덱스)으로 이해된다. 언제나 상황의 증거로 재현된 사진 이미지에 앞서 증거를 있게 한 "사진적 행위"가 선행하며, 그 행위의 배경을 통해 비로소 사진 이미지의 본질이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적 행위의 배경은 대부분 사회적 통념(스투디움)으로 설명 불가능한 작가 고유의 감성에서 분출되는 것들이다. 즉 작가 고유의 감성은 실재적 상황의 모사를 통해 드러난 사진 이미지의 자국 또는 흔적으로 출현한다. 사진을 바라보는 제3자가 이 흔적과 대면할 때 불현듯 일깨워진 극히 내재적이며 인격적인 감정의 동요(푼크툼)가 바로 사진의 공유된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 이것은 사진 읽기에 있어 더이상 객관적 잣대를 들이대 의미 분석과 해석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한다. 또한 작가의 의도와 재현된 사진 이미지 사이에 누군가가 짜놓은 의미의 망(객관성)을 넘어 자국으로 출현한 이미지와 이를 바라 보는 관객과의 교감에서 분출된 "내재적 감성"이 창작의 출발점임을 말한다. 이제 사진은 의도된 분명한 메시지를 담거나 길들여진 감성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공유된 내재적 감성의 분출로 드러난 진정한 삶의 모습들을 담아내는 창작 행위로 전환된다. ● 결국 이는 우리 사회 문화적 인식의 틈새에서 비껴가고 미끄러지는 언술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이러한 물음의 저변에 깔려 있는 통제된 현실구조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가장 탁월한 예술 매체로 사진을 바라보는 것이다. ■ 마실 출판사

서평1_사진 철학의 귀중한 지침서 ● 사진에서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전적으로 빌렘 플루서가 말했던 의미 작용 때문이다. 사진의 의미 작용이 종잡을 수 없이 자의적이고 늘 의미의 울타리를 두텁게 치기 때문에 그것들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혹은 뛰어 넘기 위해서 철학과 만나야 한다. 혹자는 사진에 무슨 철학이 필요할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고, 사진처럼 확실하게 무엇을 찍었는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시각 매체는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물론 그런 측면이 사진에서는 쉽게 드러난다. 확실히 사진은 환영적인 그림과 달리 누구나 사진을 보면 구체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찍혀진 형상의 구체성에 의해 무엇을 나타냈는지 알게 한다. ●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진정 사진이 다른 시각 예술보다 의미를 알기 쉬운지, 혹시 우리가 알기 쉽다고 생각한 것이 우리가 삶 속에서 알고 있는 사물의 모습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형상의 유사성을 두고 그것을 의미와 혼동하고 있지 않은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아니다. 인화지 위에 무엇이 찍혀 있는가를 안다는 것일 뿐, 그것은 카메라가 눈에 보이는 사물과 똑 같이, 마치 판박이처럼 유사 닮음을 제공했을 따름이지, 그것이 사진의 의미로서 자리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의 의미는 매우 혼란스럽고 언어만큼 자의성을 갖는다. 현실을 노출하면서도 현실을 말하지 않다는 점이 그 단적인 예이다. ● 사진평론가 이경률이 편찬한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는 의미의 객관화, 고정불변의 의미를 거부한다. 재현된 의미보다 의미 이전의 존재의 인덱스를 주장한다. 이 책은 그것들을 말하고자 한다. 사진의 무수한 의미들과 그 의미들로부터 생성된 이미지의 파편들이 궁극적으로 사진에 어떠한 철학적 인식론을 유도하고 또한 기호론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가를 말하고 싶어한 책이다. 저자의 풍요로운 지적 배경과 탄탄한 논리 그러면서도 충분한 이해를 도모하는 여유로움의 책이다. 이제껏 강단에서만 논의되거나 떠돌아다녔던 사진의 존재론, 사진의 의미론, 그리고 기호학적 사진과 현상학적 사진에 이르기까지 유용한 사진 철학의 지침서로 자리할만 한다. 물론 지금까지 사진에 관한 철학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번역된 텍스트였거나, 출처 없는 글, 인용부호 없는 글로서 피상적으로 사진의 해석, 사진의 분석, 사진의 의미 작용에 다가갔던 책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사진으로서의 철학' 혹은 '철학으로서의 사진'에 대한 주석 있는 책, 인용 가능한 책으로서 사진 철학의 방향타가 될 것이 틀림없다. ● 책은 사진적 재현을 중심 축으로 의미의 생성 과정과 지시 작용 그리고 수용 과정을 탐색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사진은 이런 것이다'라고 결론 내리지 않는다. 또한 '사진은 이것들을 재현한다'고 명료한 방향성도 제시하지 않는다. 마치 철학이 답을 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학문인 것처럼, 이 책도 시종일관 사진의 인식론과 존재론, 그것들의 인덱스적인 특징과 그것들에 내재한 이데올로기적인 출현 양태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저자가 중요시하는 것은 사진, 존재, 인덱스이다. 이러한 명제들 사이로 때론 직렬 회로로, 때론 병렬회로로 상호 연결하면서 그가 제시한 열 가지 테마 속에 그것들이 암시하거나 누설된다. ● 테마 하나,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_ 이 테마에서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사진은 필연적으로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를 묻는다. 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그림자 연극」에까지 동전의 양면처럼 인식의 세계와 감각의 세계, 믿음의 세계와 추측의 세계, 확신적 앎과 상상적 추론의 관계를 투사한다. 그리하여 읽혀지는 영역보다 읽혀지지 않는 영역, 단지 지표(index)로서 암시되고 혹은 누설되는 드러나지 않는 영역을 더 중요시한다. 사진이 빛(알 수 있는 것)과 어둠(알 수 없는 것)의 조화라고 했을 때 진정 사진의 의미를 일깨우는 것은 알 수 없는 어둠의 저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테마 둘, 장님과 코끼리 그리고 지팡이_ 이 테마에서는 인덱스로서의 사진, 특히 퍼스의 기호론을 차용하여 사진의 인덱스적 특성이야말로 사진의 고유한 의미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는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 지팡이로 코끼리를 만지는 의미의 불확실성을 거론한다. 장님이 마치 자신의 지팡이(즉 손에 전달되는 감각의 도구)를 이용하여 거기에 전달되는 감각 신호로부터 코끼리라는 하나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처럼, 사진도 카메라라는 도구를 통해 전체를 파악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인식하는 사진의 의미라는 것은 단지 조형적 조합에 의해 암시되는 대상일 뿐임을 주지시킨다. 그는 사진의 의미를 '사진적인 것'으로 귀속시킨다. "사진이 외시하는 사실주의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단지 하나의 징후로서 어떠한 조짐을 보이는 상황적 신호"로서 자리할 뿐이라는 것이다. ● 테마 셋, 사진과 글의 따로 국밥_ 이 테마에서는 사진적인 것, 혹은 사진적 사실주의에 작용하는 모호한 맹점들과 그것들이 전적으로 사진이 지시하는 외시의 조건에서 나타나는 상징적 요소 때문임을 말하고 있다. 그는 "사진적 사실주의에 있어 일반적으로 내시는 이미지가 지시하는 외시의 조건에 달려 있다: 함축적 메시지인 내시가 증폭되면 사진 메시지는 모호해지고 반대로 축소되면 메시지는 분명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의 논지는 사진이 외시적이 되면 의미는 내시니까 모호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의미를 명료히 하기 위해서는 외시가 약화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야기한다. 내시를 무력화시키는 사진적 경향으로서 그는 사실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쇼크 사진을 든다. 그러면서 회화적 사실주의는 작가의 분명한 의도를 외시적으로 표명하지만 이와는 달리 사진적 사실주의는 이미지 그 자체의 절대적 닮음 외는 어떠한 번역도 허락치 않기 때문에 탈코드화 된 사진 혹은 출현 방식이 저마다 다른 사진의 의미는 종종 사진 설명과 비평적 텍스트에 의해 엉뚱한 의미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 테마 넷, 사진과 아우라 현상_ 이 테마에서부터 사진의 철학적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해서 구체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잘 알려진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롤랑 바르크의 푼크툼, 앙드레 바젱의 자동생성이 인덱스와 의미 사이에서 때론 직렬, 때론 병렬 회로를 통해 어떻게 의미망을 축조하는지를 보여준다. 사진과 아우라 현상은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에서 출발한다. 발터 벤야민처럼 저자 또한 아우라의 개념을 통한 의미의 출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아우라는 인식론적 관점과 존재론적 관점 사이에서 인식론적 관점은 물리적 현상을, 존재론적 관점은 심리적 효과를 겨냥한다고 한다. 사진은 긍극적으로 물리적, 심리적 효과에 빚지는 독특한 음색임을 밝히는 것이다. 아우라가 이미지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외시하는 대상과 분위기로부터 전염되는 응시자(관객)의 심정적 연상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규명 불가능한 사진의 의미야말로 아우라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 테마 다섯, 스투디움과 푼크툼_ 이 테마에서는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를 단초로 하여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과 푼크툼으로 확장하여 사진의 복잡한 의미망에 다가서고 있다. 벤야민에서 바르트로 연결되는 사진 철학의 연결 고리를 잘 보여준다.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의 핵심 부분인 스투디움적 요소와 푼크툼적인 요소를 외시적인 스투디움적인 형상 그리고 내시적인 품크툼적인 의미 생상으로 이분화 한다. 그는 푼크툼이 사진과 관객 간의 의미작용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푼크툼의 의미가 재현 대상의 절대적 조건이 아니라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순간적으로 관객을 자극하는 의미생성, 즉 아우라의 출현으로서 본다. 바로 이 지점이 벤야민과 바르트가 만나는 접점임을 보여준다. ● 테마 여섯, 사진은 비어 있는 의미 공간이다_ 이 테마에서는 롤랑 바르트의 "사진의 죽음", 존재증명과 부재증명으로서 사진의 의미를 슬쩍 누설한다. 사진에는 기억과 망각에 의한 존재성과 부재성이 있고 이것들이 사진의 절대적 연상과 직감의 상호작용을 통한 철학적 함의를 내재한다고 말한다. 그는 사진은 비어 있는 의미 공간일 수밖에 없다는 철학적 테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 끌어오는 것은 기억이라는 존재론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즉 기억은 어떤 분명한 물질적 증거 없이도 현상에 대한 본질을 수용하는 존재론적 방법론이라고 말한다. 그 적절한 본보기를 무의식과 기억과의 관계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사진은 의식과 무의식, 지각과 기억, 의미와 무의미라는 이중적 의미구조이다. 특히 창작 사진에서 그것들은 단순한 코드나 상징 관계가 아니라 규명할 수 없는 어떤 심층적 실체의 지표로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예의 그 존재론적 인덱스가 다시 한번 환기되는 부분이다. ● 테마 일곱, 사진-인덱스와 존재의 증거_ 이 테마에서는 다양한 기호론적 차원에서 사진의 인덱스적 요소와 이를 통해 인식되는 존재와 부재 혹은 존재의 암시에 대해서 말한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 앙드레 바젱의 '자동생성', 필립 뒤바의 '사진적 행위', 로잘린드 클라우스의 '사진적인 것'을 통해 저자는 부재한 사물의 자리에 반드시 자리하는, 그러나 감지되지 않는 정신적, 심리적, 영혼적 존재의 증거를 들이 되며, 이때의 인덱스는 사진적 장치에 의해 찍혀진 존재의 자국이자 흔적으로서 사진은 찍혀진 그 형상의 조합에 의해 의미가 형성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형상이 존재했음 통해 의미를 발생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 테마 여덟, 공유된 주관성과 감각의 뇌관_ 이 테마에서는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를 차용하여 인식의 주관성과 감각의 생성에 대해 말한다. 그는 우리의 일상의 불특정한 지표들 또한 개인의 주관적 감성 속에서 출현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대부분 이러한 관객과 교차되는 경험에 관계하며, 바로 사진은 우리의 경험과 상황의 만남으로서 의미의 문턱에 이른다고 말한다. 그는 듀안 마이틀의 사진을 통해서 작가는 직감과 감성에 의해 번역되지만 사진은 대상의 복사적 진술에 의한 징후 즉 생성의 누설로만 허락될 뿐이라고 "의미 이전의 인덱스"를 재차 강조한다. 창작의 관점에서 사진의 인덱스는 사진의 객관화되기 어려운 주관적 특성, 감각의 뇌관이 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테마 아홉, 사진적 행위와 감성의 음색_ 이 테마에서는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를 이끌어서 사진적 행위란 하나의 사건(일회적인 것, 순간적인 것으로서 시뮬라크르)으로서 철학적 대상임을 말한다. 즉 사진은 작가의 주관, 작가 고유의 감성적 음색으로서 작품의 근본적인 출발점이자 의미 생성의 요체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진정한 예술 사진은 언제나 문화적 관습에 익숙한 대중의 눈에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는 뜻과 같음을 저자는 말한다. ● 테마 열, 형상 이탈과 계열 분화_ 마지막 테마는 상당히 난해하다. 이론적 논의를 미술의 영역까지 이끌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형상과 양식을 전면에 두고 그것을 바라본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해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양식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재에 대한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전자의 경우가 모더니즘 시가에서 본 새로운 양식(형상 이탈적)으로, 후자는 생성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 후기 구조주의(계열 분화)로 규정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테마의 종착역에 이르러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우리의 의식 주위를 떠도는 수많은 의미 없는 존재들(구조 없는 존재들) 즉 시뮬라크르"와 같다고 말한다. ● 결론적으로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는 사진적 재현의 방법론과 그 재현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관점을 철학의 영역으로 가져간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지금까지 저널리스틱한 문체, 저널리스틱한 주제를 꾸려 왔던 사진 텍스트들에 비해 사진에 대한, 이미지 생성에 대한 긴 호흡, 깊은 호흡을 갖게 한다. 다만 이 책의 아쉬움이라면 사진의 현실적인 생산방식과 소비방식에서 비껴난다는 점이며, 사진의 현실적인 소통체계보다는 형이상학적 아카데미즘과 예술지향의 창작 사진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퍼스의 인덱스, 들뢰즈의 사건, 의미, 감각론에 의존함으로써 오늘날 문화 산업적인 측면에서 사진의 매체미학적 특징을 생략했다는 점이다. 이 책이 사진의 철학을 논술했다는 점에서 빌렘 플루서의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와 유사하나 플루서의 책이 사진의 문화적 양태는 물론이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장치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 진동선

서평2_존재가 분출하는 특이한 상황1. 왜 이 책 제목을 '사진은 무엇을 표현하는가'라고 하지 않고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로 했을까? 재현한다는 것이 예술의 존재와 가치를 밝히는 데 전문적으로 쓰이는 핵심 개념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재현한다는 말의 뉘앙스에서는 무엇인가를 있는 그대로 옮겨 온다는 뜻이 강하다. 누구나 사진이라고 하면 우선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찍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반면 표현이라고 할 경우 왠지 변형의 과정을 거친다거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주관적인 감정이나 정서를 바깥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표현주의라고 할 때, 그것은 외부의 사실보다는 그것에 대한 작가의 감정을 드러내는 작풍을 주로 일컫는다. 물론 객관적인 표현이라는 말도 성립할 수 있고, 주관적인 재현이라는 말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재현은 왠지 객관적인 사태를 겨냥하는 것 같고, 표현은 주관적인 사태를 겨냥하는 것 같은 것은 사실이다. ● 사진이 무엇을 재현하는가를 문제 삼는 데에는 사진이 과연 예술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함축되어 있다. 니체는 주어진 것의 진상을 알기 위해 껍질을 한 켜 한 켜 벗겨나갈 때 이론가는 벗겨낸 껍질에 관심을 갖는 반면, 예술가는 계속 껍질을 벗으면서 저쪽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러한 니체의 말을 원용해 보면, 만약 사진이 주어진 현실의 껍질을 재현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예술일 수가 없다. 그런데 만약 사진이 저쪽에서 계속해서 껍질을 벗고 있는 그 무엇을 재현한다면 예술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말을 새길 때 이론가들이 껍질에 집착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니체는 껍질들에 본질적인 형상들이 새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본질적인 형상에 몰두하는 이론가 혹은 과학자들의 사유의 생리를 이해할 수 없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사실들이라는 껍질에 새겨져 있는 본질적인 형상들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예술이 될 수 없다면, 과연 예술은 무엇을 겨냥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 대해 사진의 경우를 들어 세세하게 그리고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답하고 있다. ● 어떤 예술 장르건 그것의 존재론적인 위상을 제대로 밝히지 않고서는 또는 그러한 작업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그 예술 장르에 관련된 이론적인 담론 행위를 수행할 수 없다. 사진처럼 예술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효과들을 낳는 장르의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그런데 모처럼 우리네 연구자의 생생한 목소리로다 사진 철학 내지는 사진의 존재론을 듣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선 사진 예술의 담론에 종사하는 평론가 및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사진 예술을 직접 수행하는 작가들은 반드시 이 책을 심도 깊게 천착해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 ● 2. 사실 사진의 경우, 얼핏 생각하기에는 가장 바깥에 있는 껍질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빛이 피사체에 반사되어 카메라라는 기계의 렌즈를 거쳐 필름에 흔적을 남기는 과정을 볼라치면 빛이 사물의 내부로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맨 바깥의 거죽에서 튕겨나오는 것임을 감안할 때 그렇다. 그런 만큼 이 책을 통해 저자가 계속 껍질을 벗어버리면서 알몸으로 드러나려는 그 무엇을 사진이 포착한다고 역설하려 할 경우, 대단히 어려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 저자는 이 어려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기호학, 특히 퍼스의 기호학을 동원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저자는 책의 부제에 달려 있는 '인덱스'라는 기호학적 용어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긴다. 미리 간단히 말하면, 사진은 인덱스로서의 기호 작용을 함으로써 비로소 예술적일 수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그리고 사진에 대한 이러한 결론을 가지는 입장을 사진적 사실주의라고 부른다. 결국 인덱스로서의 사진은 도대체 무엇을 재현하는 기호인가 하는 점이 이 책을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 저자의 친절한 안내를 따라 정리하듯 말해 보자. 퍼스가 말하는 기호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도상(아이콘), 상징 그리고 지표(인덱스)다. 그리고 동일한 사진을 놓고서, 도상으로 보느냐, 상징으로 보느냐, 아니면 지표로 보느냐에 따라 사진을 보는 입장이 달라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사진의 존재를 보는 입장들은 처음에는 도상으로 보다가 구조주의적인 모더니즘에서는 상징으로 보고, 그리고 이제 후기 구조주의에서는 지표로 보게 되었다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니까 저자는 사진, 특히 사진 예술을 후기 구조주의적인 관점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설명이 가능하고 그럴 때 바로 사진적 사실주의가 성립된다고 말하는 셈이다. ● 저자의 말에 의하면, 사진을 도상으로 보는 것은 절대적인 복사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고, 사진을 상징으로 보는 것은 사회 문화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기왕의 코드 체계에 따라 그 상징적인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을 인덱스 즉 지표로 보는 것은 사진이 뭔가 특이하고 이상한 전체적 분위기의 흐름이 자동으로 생성되어 나오는 것에 대한 흔적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첫 번째 복사적 재현의 입장에 대해서는 저자가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대단히 소박한 입장임을 아예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입장과는 정면으로 대결한다. 두 번째를 의미론적인 재현을 추구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저자는 그때 해석되는 의미는 사회문화적으로 암암리에 코드화되어 있는 주제에 의거한 것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사진이 정체성의 붕괴, 페미니즘의 강조, 동성애의 권리, 주체의 상실 혹은 생태적인 자연 환경의 강조 등으로 만들어지고 해독된다는 것이다. 이에 사진은 작가에게 뿐만 아니라 수용자에게 훈육하는 듯한 억압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되고, 아울러 당연히 진부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모더니즘 혹은 구조주의적인 논리적이고 본질적 형상을 위주로 한 입장이라 말한다. ● 그러면서 저자는 자신의 입장, 즉 후기 구조주의적인 사진적 사실주의를 주장하기 위해 말로써 형용하기 힘든 묘한 영역을 여러 사진 이론가들의 주장을 앞세워 제시한다. 우선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스투디움에 대립되는 푼크툼의 영역, 앙드레 바쟁의 자동 생성, 필립 뒤봐의 사진적 행위, 로자린 크라우스의 사진적인 것, 들뢰즈의 이미지-운동 등의 영역이 그것들이다. 그리고는 이 영역을 비어 있는 의미 공간이라고 저자는 명명한다. 의미를 넘어서 있으면서 뭔가로 꽉 차 있어 흘러넘치는 자동 생성의 은폐된 그림자들의 영역, 그러니까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의미의 원천이 될 법한 가능적인 생성의 영역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사진은 이러한 영역에 대한 징후를 나타내는 지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진을 의미의 증거가 아니라 존재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당연히 이때 존재는 도상으로 알 수 있는 어떤 형태(figure)의 존재를 뜻하는 것을 아닐 것이다.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어 말하면 어떤 특정한 존재자의 현전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성으로서, 흐름으로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들의 전신으로 스며들면서 어느새 그것들을 연속성을 띠는 연속체가 되게 하는 것으로서, 그러나 좁디좁은 조리개의 구멍을 통해 흘러 들어와 은근하게 사진에 흔적을 남기는 존재일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존재를 재현하는 것이야말로, 그렇다고 결코 직설적일 수도 없고 상징적일 수도 없는 재현으로서, 바로 사진을 예술이게끔 하는 것이고, 사진이 그러할 때 관객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 3. 평자는 이러한 저자의 예술론에 적극적으로 찬동한다. 결코 결혼식의 주례사와 같은 사회적인 허식에 의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평자는 그동안 저자가 간간히 언급하고 있는 현상학에 몰두해 왔다. 특히, 체화된 의식으로서 이미 세계와 뿌리를 공유하는 '몸 자신'(le corps propre)이라는 개념을 주조해 내고, 세계를 주체이게끔 하고 주체를 대상이게끔 하는 근원적인 지반인 '살'(la chair) 개념을 주조해 내어 정신 철학과는 전혀 다른 존재론을 펼치는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 몰두해 왔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인격적인 자아가 성립하기 전에 존재하는 그리고 일체의 문화가 성립하기 전에 존재하는, 그러니까 지성적인 논리로는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의미 이전에 존재하는, 그러면서 오히려 우리 인간을 감싸면서 우리를 바라다보는 원초적인 존재 생성(ontog n se)의 영역을 표현할 때 비로소 예술이 성립한다. ● 평자는 아직 이러한 메를로-퐁티의 예술론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아직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겪어 온 삶의 직관으로도 그 이상의 대안이 어떤 출구를 통해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속에 이미 충분히 들어와 있으면서 우리를 넘어서 있는 그러면서 제 스스로를 생성하면서 아울러 우리를 생산하고 있는 저 원초적인 거대한 내재적 초월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러한 입장에 있는 평자로서는 저자에 대해 대단히 고맙다고 할 수밖에 없다. 기호학과 후기 구조주의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한 저자가 최근의 큰 예술 사상적인 흐름이 바로 평자가 메를로-퐁티 공부를 통해 획득한 예술론적인 입장과 상통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 4. 다시 사진으로 돌아온다. 영화를 포함하게 되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그래서 알기 쉽게 흔히 사진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과연 사진이 위에서 말한 예술의 원천이 되는 영역에 대한 지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특히 필립 뒤봐가 말하는, "사진적 이미지는 그 사진이 있게 한 행위 그 자체 이상 생각할 수 없다."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때 과연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사진적 이미지는 지시적인 상황과 분리될 수 없는 일종의 절대적 행위-이미지로 간주된다."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때 과연 사진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 '사진이 있게 한 행위 그 자체'라고 할 때, '행위'는 누구의 행위인가? 뒤봐의 책을 보지 못한 평자로서는 그 행위를 그 뒤의 문장에 나오는 지시적인 상황 전체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기게 된다. 작가가 사진을 찍지만, 그래서 작가가 순수 능동적인 선택과 선별을 통해 사진을 찍는다고 여겨지지만, 기실 작가가 그렇게 선택 선별하여 사진을 찍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는 전체적인 상황이야말로 진정한 행위의 주체가 아니겠는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행위는 전체 상황으로 흘러 나가는 듯 하지만 기실 전체 상황으로부터 작가의 몸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 삶의 순간이 특이하게 분출될 때, 우리는 그 순간의 틈을 통해 삶의 전체가 과도하게 흘러넘친다는 것을 안다. 이때 사회 문화적인 코드들은 힘을 상실하여 소실되면서 오히려 그림자로 돌변한다. 그때, 바로 그때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진적 행위의 주체는 존재가 분출하는 특이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작가를 주체라고 하지 않을 것인가. 여기에는 매너리즘이 끼어들 수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이 책을 쓴 저자에게 감사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조광제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차례 첫째 테마 -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둘째 테마 - 장님과 코끼리 그리고 지팡이 셋째 테마 - 사진과 글의 따로 국밥 넷째 테마 - 사진과 아우라 현상 다섯째 테마 - 스투디움과 푼크툼 여섯째 테마 - 사진은 비어 있는 의미 공간이다. 일곱째 테마 - 사진-인덱스와 존재의 증거 여덟째 테마 - 공유된 주관성과 감각의 뇌관 아홉째 테마 - 사진적 행위와 감성의 음색 열째 테마 - 형상이탈과 계열분화

마실 출판사 ● 마실 출판사는 학술 사이트 마실(www.masilga.com)의 작업이 유통되는 공간입니다. 현재 사진마실(이경률)과 철학마실(류종렬)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예술과 철학일반의 인문서적을 중심으로 출판작업이 이루어 질 예정입니다. ● 우선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는 사진론의 첫 번째 결과물이며 시리즈 형식으로 출판작업이 진행될 것이며, 올 해 안에 두 번째 책(필립 뒤바의 "사진적 행위"의 번역서)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 또한 마실가는 학술사이트로 뿐만 아니라 인문학 전반에 대한 커뮤니티 성격의 사이트로 개편될 예정입니다.

Vol.20021116b |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