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ILING POINT

제2회 동덕여자대학교 큐레이터전공 졸업기획展   2002_1115 ▶︎ 2002_1130

윤정미_자연사박물관_컬러인화_70×70cm_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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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1115_금요일_06:00pm

졸업전시위원회 / 김재진_변혜원 섭외팀 / 남윤경_손형지_이미령_윤수인_양르네

Darling Art Foundation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4-14번지 양옥건물(가로수 길) Tel. 02_3442_2042

BOILING POINT­비등점 ● 현대에는 다양한 문화(文化)와 이즘(ism)이 교류, 교차하면서, 수많은 뜨거운 논쟁의 지점들이 파생된다. 이 논쟁들의 가열 속에서 이전에 사람들을 안심시켰던 준거 틀은 대부분 무용지물이 되었고, 답답함과 의구심, 불안과 권태의 부피가 지속적으로 팽창되고 있다. ● 팽창은 날로 비대해지고, 그 긴장감은 배가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그 팽창과 긴장을 오류 없이 다루고 완화할 예리하고 날카로운 도구는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다양한 담론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속시원하게 인도자로 나서지 않는다. 여기 긴장이, 다소 느슨해지고 늘어진 불안이 있다. 끊임없이 논쟁되어온 것들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그 위에 시대적인 용어들이 부가되었다. ● 아마도 우리는 여전히 더 착각들에 빠져야할 지도 모른다. 가장 근원적인 것에 접근했다가, 거기서 공허를 떠 안는 결과들을 더 되풀이해야 할 수도 있다. 논쟁들과 거듭된 실망으로 어쩌면 결정적으로 흥미를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어떻든 실체를 쫓다가 그림자만 밟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은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너무 쩔쩔매는 것은 혹 아닐까. 어쩌면, 충돌하는 부분, 현기증을 일으키는 근원은 그것들의 표상과는 달리 의외로 단촐할 지도 모른다. ● 현대 미술은 그 자체로 역설적이다. 그토록 오랜 역사의 산물이면서, 마치 어떤 시간의 켜도 지니지 못한 나무처럼, 현대미술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묻고 있다. 모색은 여전히 자신 스스로를 향한다. 이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태도는 훨씬 더 근원적이 되었다. 마치 미로 안의 두더지처럼, 현대미술은 자기 모색의 미궁에 병적으로 몰입하고 빠져든다. 몰입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느슨해진 몰입이다. ● 역설적이게도 현대미술은 이 자신에의 몰입을 통해 사회의 비등점들을 반영해낸다.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에 팽창하고 긴장하고, 압력이 증가하고, 기포가 발생하는 현대사회를 담아낸다. 그러므로, 현대의 어떤 문맥들이 현대미술의 논쟁을 지원하는지, 어떻게 표현에 반영되고 소통되는지의 질문은 문제를 꿰뚫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이번 『BOILING POINT, 비등점』의 초점이다. 현대 사회가 여러 가치와 사상이 공존하고 충돌하는 장소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물질들이 개입될수록, 비등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충돌이 잦고, 갈등 또한 그치지 않는다. 때론 어떤 문제들은 가려지고 은폐된다. 마치 부글거리는 것처럼 전략적으로 과장되는 문제들이 시야를 가리는 경우도 있다. 어떤 문제들은 유행처럼 들끓었다가 소리소문 없이 잦아들기도 한다. ● 이 뭉뚱그릴 수 없는 다양함 들이 작가들에 의해 포착되는 것은 경이로운 과정이다. 이들의 표현은 피해갈 수 없는 뜨거운 지점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진지하고 흥미롭다. 거기에는 탄식도 있고, 견유주의도 있다. 도전적인 발언도, 침묵의 웅변도 있다. 물론 도피도 있다. ● 지금부터 우리가 각각 독립적으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세계의 모습이다. ■

우관호_유죄_석기, 슬립캐스팅_38×15×15cm_2002
이상일_광주 망월동_흑백인화_1991
이향숙_시선_흑백인화_각 35.5×27.8cm_2001
정정엽_부엌_캔버스에 유채_110×162cm_2000

생명(live) : 시간 안에서, 기억 속으로 ● 우관호_이상일_이향숙_정은정_정인엽_정정엽_정창래_주동진 ● 생명이란 주어진 시간 안에서 끊임없이 재생하고 퇴화된다. 그 순환 틀로부터의 일탈은 생명의 본원적 시간에 대한 위배며, 궁극적으로 존재를 넘어서는 일이다. 기억은 이 생명의 특성이고 현상이지만, 존재의 시간을 넘나들 수 있다. 시간의 물질의 시간적인 한계를 꿰뚫고 초월한다. 기억도 소멸되기도 하고, 영원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자신의 시간을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억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고, 더 많이 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간의 순환을 따르는 생명, 그것은 시간을 넘어서는 기억의 활력에 의해 활력이 있는 것이 된다. ● 주동진은 생태계의 여러 단자들 중에서 거북이를 형상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거북이는 보다 지속력이 있는 생명의 상징으로서 익숙하게 다루어져 왔던 동물이다. 작가는 이 생명의 메타포를 재현하고, 또 되풀이 해 재현함으로서, 생에 대한 어떤 거부할 수 없는 경외심을 표현한다. ● 작고 큰 인형들을 복제한 우관호의 마네킹의 웃고 있는 얼굴은 섬뜩함과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백색의 차가운 느낌의 얼굴모습들은 십자가, 죽음, 전쟁 등의 참혹함과 생명의 의미를 다시금 진지하게 반문하게 하며, 인형의 표정은 생명의 근원에 대해 고유의 섬뜩함으로 질문을 던진다. ● 정인엽은 기억 속 어머니의 모습을 수천 마리의 나비로 형상화시킨다. 예로부터 기원과 초월의 이미지로 부름을 받곤 했던 나비가 정인엽의 손에서는 아련한 아픔으로 다시 탄생한다. 나비들은 잊혀질 수 없는 불멸의 기억들이 머무르는 곳에 존재한다. ● 정정엽은 지루한 일상성의 운명과 주목받지 못한 여성의 일상적 삶을 생각한다. 늘 먹던 곡식에서 여성의 삶을 지배하는 일상의 편린들을 읽어낸다. 여전히 증식 중인 그 씨앗들은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내는 모성성과 곡식의 이미지를 접목시켜 소소한 일상의 사물과 장소에 상상력을 부여하고 있다. ● 많은 사연이 서려있는 망월동의 모습을 이상일은 여러 형상으로 포착한다. 그의 사진이 절실함을 더하는 것은 그 장소를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에 회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흑백사진의 분위기는 차분하면서도 절제된 감정의 표현에 의해 더욱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 정창래의 작품에 찍힌 인물은 오래 전 죽음의 경계에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에게 기억이란 시간과 함께 엷어지는 것이며, 당시 힘들었던 기억을 기억의 저편으로 가져가고 있다. ● 정은정의 작품 안에 죽어있는 동물의 모습은 슬프고 두려운 죽음의 모습만은 아니다. 정작 작가는 죽음의 모습이 비관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생각은 동물의 죽음에서 비극성을 경감시킨다. 사슴과 토끼의 죽음에서는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는 유머러스한 면을 볼 수도 있다. ● 이향숙은 각기 다른 신체와 사고를 지닌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음으로써, 인간의 규명에 도달하고자 한다. 눈동자에 반영된 삶의 체험들을 담고있는 「시선」은 여러 사람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처럼 인간은 시공의 한계인 몸을 통해 세상을 지각하며, 그것은 반복적인 인식과정을 거치면서 기억에 자리잡게 된다. ■

김창겸_trans self-portrait_영상설치_1999
배준성_화가의 옷_사진 위 아크릴판에 아크릴채색_105×85cm_2001
박혜성_앵그르와 그의 친구들_단채널 비디오 영상_2000
권여현_月夜密會_사진에 아크릴채색_122×185cm_2002
김지현_홈쇼핑_단채널 비디오 영상_00:07:00_2000

시대(epoch) : 중심이동-비우기 ● 권여현_김지현_김창겸_박혜성_배준성_윤정미_이중재 ●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문법을 고안하고, 또 바로 그 고안물에 의해 그 시대가 된다. 창조성은 우리 시대의 산물은 아니지만, 그 결핍은 시대를 대변한다. 현대는 아이디어의 풍요 속에서, 창의적 사색의 돌파구가 막힌 시대라 할 수 있다. ● 문제는 기원과 기원에 대한 욕망의 소멸이다. 그리고, 이미지가 사건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위치'에 대한 무관심이다. 현대의 표상들이 기원과 중심의 부담을 스스로 거부한다. 이제는 기원을 생산하려고 하는 대신, 기꺼이 이전의 기원을 활용한다. 사건의 중심이 되는 대신, 스스로 변두리를 자처하는 것이다. 현대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논쟁을 일으킨 이 일탈은 현대사회 자체를 정의하는 의미 있는 참조일 것이다. ● 김창겸은 현대를 모든 것을 수용하고 대변하는 이미지의 왕국으로 본다. 작가는 이미지의 시대를 경고한다. 이미지의 권유를 따르는 것들, 이미지의 권력에 좌지우지되는 모든 것들에 이미지의 힘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의 이미지들의 선명함 앞에서 실재는 너무 창백한 것이 된고 만다. ● 배준성은 작가로서가 아닌 감상자로서 고전적인 작품들에 접근한다. 하지만, 창작의 과정 내내 이 역할은 전도되고 재전도된다. 감상자였다 작가가 되고, 작가였다 감상자가 되곤 한다. 사진 위에 이미지를 덧붙이는 과정에서 그는 고전작품의 위엄 위에 자신의 개념을 덮어씌우는 용기를 지닌 작가다. ● 박혜성의 「샘」은 앵그르의 원작을 차용한 것으로서, 이는 끝없이 반복, 재생산되는 이야기 의 원천으로서 서양미술사를 상징한다. 또한 「앵그르와 그의 친구들」은 앵그르와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회화, 르네 마그리트와 막스 에른스트의 초현실주의 회화, 앤디 워홀의 팝아트, 쇠라의 점묘, 마르셀 뒤샹의 변기,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등 미술사 속의 이미지들을 혼성 모방한 경우이다. ● 홈쇼핑을 하나의 T.V. 오락 프로쯤으로 간주할 정도로, 현대에 있어 홈쇼핑의 위력은 엄청나다. 김지현은 시청자들의 구매력에 부채질하는 홈쇼핑의 만연한 풍속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포장된 것들을 예술가의 개념에 빗댐으로서, 작가의 가벼워진 아우라를 우회적으로 성토한다. ● 윤정미의 자연사 박물관 안에서는 환영이 작용한다. 어떤 동물들이 박제된 동물들이고 어떤 것이 실제며, 또 어떤 것이 그림인지 혼란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키치적인 컬러와 조잡한 외양을 한 박제와 가짜 나무들이 드러난다. 작가는 이 혼란함으로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장치가 인간들에게 가져다주는 의미에 대해 되묻는다. ● 권여현은 익숙한 이미지를 낯설게 하는 과정, 이름을 붙이기가 아니라, 이름표를 떼는 과정에 자신을 투입시킨다. 그의 이미지에 대한 차용은 '이미지에 대해 이미지로 응답하기', 곧 이미지의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전복이자 반란이다. ● 이중재는 우리에게 매일 전달되는 대중매체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의 작업은 (선택의 여지없이)수용되며, 강제적으로 구조에 익숙해져 버린 상태를 다시 낯설게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우리로 일상과'상식'이라 일컬어지는 의식,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한 기본질서의 영향력에 대해 도전하도록 권장한다. ■

류준화_내가 너를 본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99_부분
김명숙_Equilibrium_종이에 연필_210×320cm_2002
정소연_부드럽고 따스한 욕조와 그 허물_혼합재료 설치_1998

성(sex) : 신체 안에서 살아남기 ● 강은수_김명숙_김인숙_류준화_송상희_신이철_이은종_정소연 ● 성 담론은 끊임없이 논쟁의 중심에 있어 왔다. 성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호기심과 관심과 탐구는 때로는 직설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우회적으로 지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특히 성은 미궁에 빠져버린 사회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것에 대한 욕구와 결부되어 있다. 현대의 미술은 이 같은 시대의 욕구를 반영한다. 그것은 때로 과장되거나 왜곡된 신체의 다양한 표현들과 결부된다. 성의 이러한 표현들은 한편으론 시대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감관을 건드리는 묘하고도 강력한 힘을 지닌다. ● 정소연의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뜨개질 된 핑크 색의 부드러운 욕조는 그러나 물을 담을 수 없는 욕조다. 작가는 욕조가 아니라, 욕조의 허물을 보게 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핑크빛의 부드러운 이 욕조는 중산층 여성이 꾸는 꿈의 비실재성을 부드럽고도 강하게 입증한다. ● 김인숙의 바비인형들은 대상화되고 상품화된 여성신체 이미지를 유희적으로 모방하고 재현하며 변화를 꾀하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오늘날의 여성이 이중적으로 안고있는 성적 무의식-여성이 지니는 비이성적인 열망(여성도 성적인, 육체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에 대한 탐구와 사춘기 소녀의 나르시즘, 꿈이나 몽상, 성적 환타지의 세계에 주목한다. ● 김명숙은 강한 신체의 이미지를 초현실적으로 그려낸다. 그의 신체는 아크릴과 먹물, 파스텔로 바탕의 종이를 수없이 긋고 칠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상세히 설명되지 않은 기억의 깊은 저편에서 나타나는 신체이기도 하다. 그의 신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고 있는 신체이다. ● 송상희를 따르자면, 교육은 반복적 습관, 기계화된 행위를 몸에 베게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작가는 바르고 아름답게 앉기 위한 고문기계 같은 의자를 이 왜곡된 교육의 비유로 든다. 이러한 교육의 결과는 각각의 개인들이 사물화되고, 필요에 의해 조작되는 기계와 같아지는 것이다. 송상희는 이런 상황을 기계들과 사진을 통해 말한다. ● 신이철은 신체의 형상을 음식물과 철근으로 재현해낸다. 철근의 구조로 이루어진 각각의 상징물들은 뼈대만 남아있을 뿐, 표면이나 속의 내용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오브제들 또한 자신이 무엇을 표현하는가에 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구체적인 것들은 거의 언제나 우회적인 형상 안에 감추어져 있다. ● 여관 시리즈의 이은종은 은밀하고 폐쇄적인 여관의 이미지들을 포착한다. 그가 시각화하는 것은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이다. 아직 채 체온이 가시지 않은 듯 한 여관 내부의 모습들이다. 그 공간들은 마치 아직 우리가 시도해보지 않은 욕망의 공간구조, 혹 투시도를 얻으려는 시도인 것 같다. ● 류준화는 단지 보는 것에 의미를 두는 대신, 어느 위치에서 어느 지점을 보고 있는 지를 알고자 한다. 그리고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이데올로기가 희석되어 또 하나의 즐거움을 준다. 강은수는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연결되어있는 존재의 한 유형을 긴 머리 결을 드리운 여인의 뒷모습으로 구성해낸다. 여기서 갈기와 꼬리는 통념을 해체하면서 시각의 낯선 곳으로 나아가는 통로와 같은 장치다. 그것으로 우선 여성성에 대한 한 고정된 의미가 고장나는 것만 해도 성과일 수 있다. ■ 동덕여대 큐레이터전공

Vol.20021117b | 제2회 동덕여자대학교 큐레이터전공 졸업기획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