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然-스스로 그러하게

홍진숙 판화展   2002_1122 ▶︎ 2002_1128

홍진숙_우울한 날-화석_지름 70cm_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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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문예회관 전시실 제주도 제주시 일도2동 852번지 Tel. 064_754_5233

생태적 그리움의 지평 ● 1. 홍진숙의 작품 저변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빛깔과 향기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 째 개인전의 '생활일기' 연작에서부터 두 번 째 개인전의 '동네' 연작, 그리고 세 번 째 개인전 '바람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잔잔한 그리움의 아취가 묻어난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며, 인간을 포함한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자, 차별과 박해 없이 다 함께 잘 사는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그늘진 도시 뒷골목 동네 풍경이나 소외된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문명화 이전의 설화적인 이야기, 제주 들녘에 핀 야생화의 모습, 원시 암각화의 이미지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 저 깊은 곳에 자리 한 원초적인 그리움과 만난다. 아름다움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감정이다. 아름다움은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느끼는 것이다. 느끼되 대상에서 나다운 것, 우리다운 것을 보았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이다. 우리가 소망하고 희구해 온 그 무엇이 있기에,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있기에 홍진숙의 그림은 소박하고, 부담 없이 살갑고 아름답다.

홍진숙_自然-川_지름46cm_2002
홍진숙_自+然_목판화_50×66cm_2001

2. 이번 네번째 개인전의 주제인 自+然에서도 이러한 생각은 그대로 관철된다. 홍진숙의 자연관은 노장 사상과 불교 사상, 풍수 사상 등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동양의 우주관과 자연관을 따르고 있다. 인간에게 자연은 무엇이던가. 자연을 보는 철학에서 동서양은 뚜렷한 변별점을 드러낸다. 서양 근대 철학자들은 자연을 인간으로부터 분리시켜 엄밀한 객관적인 탐구 대상으로 삼았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 지배적인 주체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런 사고 속에서 무분별한 자연의 개발은 모두 인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정당성을 얻었다. 자연은 더 이상 종교적 신앙의 대상도, 성스러운 외경의 대상도 아니었고, 오직 지배와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동양의 자연관은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과 자연을 이원화시킨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 인간과 자연은 서로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유기적인 체계를 이룬다. 자연의 모든 요소들은 기계적으로 나뉘어지지 않으며, 불가분리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될 수 없으며,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동화되는 삶을 동양인들은 이상적인 삶의 경지로 생각한 환경친화적인 삶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왔다. 자연은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대상화된 물적 존재가 아니라 自(스스로) 然(그러한 것), 스스로 그렇게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자연 인식은 노장 사상에서 연원한다. 장자가 말한 "천지는 나와 더불어 함께 생하였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는 물아일여(物我一如)의 사상에서 우리는 이미 서양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뛰어넘는 일원론적인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노자의 자연회기적인 문명비판 사상은 그의 '무위자연'설에서 잘 함축되어 있다. 노자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고 했다. 도는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지만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서고 행하며 영구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천지만물의 어머니이다. 천지만물을 생성하지만 형태도 소리도 없어 인식 불가능하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도는 곧 무(無)이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무엇을 만들지 않으며(無爲)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自然)이다. 함이 없으나 하지 않는 것이 없다.(無爲而無不爲) 그러므로 도를 구하는 행위는 세상에서 모든 작위를 거부하고, 천지자연에 몸을 내맡겨 만물의 변화에 순응하며, 자연의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도법자연)삶이다. 그러한 삶이 장자가 「逍遙遊」에서 말한 진정한 자유인의 삶이다. 무위의 삶이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자연의 본성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삶이다. 무위와 무욕의 삶을 실천하고, 헛된 지식을 버릴 때 사람들은 허정(虛靜)한 마음의 상태(心齋)가 된다. 노자는 이를 척제현람(滌除玄覽)이라 했는데, 마음의 티끌을 깨끗이 제거한 허정의 상태에서야 비로소 우주의 현묘함, 즉 도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상태는 심미관조의 상태이다. 허정의 상태에서만 대상의 정신에 감응할 수 있다. 육조 때의 종병은 척제현람론의 영향을 받은 그의 산수화론에서 징회미상(澄懷味象), 징회관도(澄懷觀道)를 말했다. 즉 마음을 맑게 해야 대상을 음미할 수 있으며, 마음을 맑게 해야 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홍진숙_自+然_40×91cm_2001
홍진숙_自+然_40×91cm_2001

홍진숙의 작품에는 노장사상에 나타난 생태주의적 자연관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심미의식이 목판화에 특유한 선묘와 질감으로 잘 구현되어 있다. 특히 그가 깊은 관심을 갖고 작품의 모티브로 삼은 대상은 선사시대 몽골 바위 그림과 한국의 바위그림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발굴된 대부분의 바위그림에는 선사인들의 건강한 자연관과 우주관이 매우 역동적인 조형세계가 표출되고 있음을 본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을 일원론적으로 파악한 생태적 감수성의 표현이자 강렬한 원시 생명력의 분출이다. 구석기 수렵시대엔 대체로 들소와 산양, 노루, 사슴 등 야생동물들과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신석기 이후 사람들이 한 곳에 무리지어 정착 생활을 하게 된, 농경시대엔 심리적인 안정감 속에서 사냥과 전투 장면 등을 간략하게 추상화된 선묘로 나타냈다. 이러한 선사시대의 바위그림은 다산과 풍요를 염원하는 공동체적 이상의 주술적인 표현이다. 과학기술과 생상력의 발달은 점차 원시인들의 주술적인 믿음을 쇠퇴시켰고, 우주와 교신하던 미술의 영적 아우라는 차디찬 기계적 감수성으로 대체되었으며, 무수한 시각 이미지들은 깊이와 감동을 상실한 채 앙상한 기표가 되어 자기만의 폐쇄회로를 정처 없이 부유하고 있다.

홍진숙_우울한 날_각 30×30cm×35_2001_부분
홍진숙_한라산야생화-수선화_30×30cm_2002

3. 홍진숙은 제주섬에 살면서 화산 활동으로 생겨나 오름과 습지, 식생 등 육지부에 비해 여러 가지로 독특한 섬의 생태 환경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이를 작품의 주제(자연) 속에 용해시켜왔다. 이번의 개인전에 출품된 自+然의 일련의 작품들도 이런 생태적 감수성의 연장에 서 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사이버니 디지털이니 하는 말들이 시각환경을 총체적으로 규정해버린 이 시대의 한복판에서 한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작업이었다. 오름과 습지를 답사하면서 스케치한 자연물들, 벗어날 길 없는 폐쇄 공간에서 몸부림치는 소외된 현대인의 모습과 병치된 원시적인 자연물, 선사시대 바위그림에 나타난 다양한 도상 이미지들, 이를테면 여러 야생 동물들과 물고기, 간략한 선화로 표현된 사람들과 반인반수의 주술사, 세월의 풍상을 겪고 난 바위의 갈라진 틈새와 식물 등을 소멸 목판법을 이용해 절제된 담백함과 두터운 질감으로 찍어냈다. 판면에서 이미지의 일부를 차례로 제거하면서 겹쳐 찍는 소멸법은 다양한 물감의 층이 쌓이면서 한지 위에 특유한 빛깔과 톤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와 같다. 사라지는 것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은 사라지면서 다른 것을 더 도드라지게 하고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차분하게 내면으로 가라앉은 형상과 색감에서 우리는 물신화된 현대인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아득한 원시 시대의 영적 아우라를 회복한다. 이성적 사고의 영역으로는 쉬이 다가갈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생태적 그리움이자 공동체적 그리움의 지평을 본다. ■ 김현돈

Vol.20021120b | 홍진숙 판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