集積-2002

길현수 회화·설치展   2002_1111 ▶︎ 2002_1126

길현수_集積-2002_천에 혼합재료_가변크기 설치_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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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삼성자동차 성수파워스테이션 서울 성동구 성수2가 1동 277-165번지 Tel. 02_3409_3333

알 수 없는 것들의 정경과 기지의 것들의 해체 ● 97년 「허상과 실재―흔적」을 시작으로, 98년에서 2000년의 「집적」을 거쳐 2001년 「Mystery Touch」와 「엿보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길현수가 한결같이 모색하고자 했던 것은 '알 수 없는 것들'의 정경을 연출하려는 데 있었다. 이를테면 초기에는 암바 빛깔의 표면에다 미지의 힘의 회오리가 휩쓸고 간 인태글리오의 자국을 재현했다든지, 황혼의 어둠을 시사하는 그레이 블루의 배경에다 거치른 모래의 마티에르가 돋보이는 무거운 그레이 톤이 널따랗게 전경을 압도하거나 점점이 가라앉은 어둠의 틈새를 시사한 바 있다. ● 이러한 계보에 뒤이어 「Mystery Touch」와 「엿보기」의 연작들이 제작되었고 이번 개인전의 「集積」이 등장하게 되었다. 앞의 작품들은 외계인들이 대지에 설치했다고 추측되는 길다란 홈의 자국을 평면에다 하나 또는 복수로 설정한 인상을 준다. 그런가 하면 「엿보기」에서는 광활한 대지에 행성이나 운석의 파편들, 아니면 기하학적 도형이나 그리드, 나아가서는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병, UFO, 해저나 위성에서 본 해양과 같은 많은 것들을 등장시킨 바 있다.

길현수_集積-2002_천에 혼합재료_가변크기 설치_2002
길현수_集積-2002_천에 혼합재료_가변크기 설치_2002

아마도 그가 자신의 이러한 의도를 3차원의 현실공간을 빌려 연출한 압도적인 예는 지난 8월 덕원갤러리 기획초대전에 출품한 「Mystery Space」일 것이다. 이 설치작품은 지난해부터 '클라인 병'을 상징하는, 요소를 담아 배양 중인 원기둥의 작은 병들을 벽 선반에 도열시킨 작품들에서 보여 준 발상을 확대하고 재연한 것으로, 이번 개인전 작품들의 모범적인 선례라 할 수 있다. ● 그가, 여기서, 근작들에 임하는 '연출'의 이모저모가 어떠한지, 그리고 이 작품들에 의해서 그가 시도 하고자 하는 것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다루어 보자. 먼저 그의 근작들의 정황이나 정경을 일견하자면 이러하다. 작품이 설치된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흰색 천 위에 매달려 있는 수십 개의 링거 병이 눈에 띈다. 그리고는 이어서 링거 병의 가느다란 호스에서 흘러나오는 각양각색의 물방울들이 캔버스나 천 위를 흘러내리며 적시고 배어들고 뒤덮으면서 만들어 내는 결정체들이 마치 종유석이나 석순처럼 성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 그 정경은 마치 종유석이 자라고 있는 동굴의 그것처럼 느껴진다. 조용히 들리는 물방울의 울림이 그렇고 수많은 동식물이나 이름 모를 생명체들이 서식하는 것 같은, 너무나 조용하고 신비로운, 그래서 동경의 눈초리로 응시하게 되는 정경이 영락없이 그러하다. ●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형상 전체는, 알고 보면, 작가가 미지의 세계를 전망하면서 조심스럽게 연출하고자 했던 가상적인 세계의 일환임에 틀림없다, 마치 시루에 배아를 담아 싹을 티우고 자라게 하는 재배사의 연출 솜씨 같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나는 링거의 수액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떨어진 수액이 신비로운 공간을 만들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물이 흘러가는 곳에 자국이 생기고 그 자국은 자신의 흔적으로 화면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공간이 어떻게 완성될지 모른다. 굳이 알려고 하지고 않고 알 수도 없다. 마치 태초의 생명이 형성되듯이 공간은 신비의 공간이 된다.'

길현수_集積-2002_천에 혼합재료_가변크기 설치_2002
길현수_集積-2002_천에 혼합재료_가변크기 설치_2002
길현수_集積-2002_천에 혼합재료_가변크기 설치_2002

근작들이 보여주는 신비의 공간은 매달고 깔아 놓은 천들의 정경은 물론, 천들을 적시며 얼룩과 흔적으로 그리고 흔적이 집적되어 만들어내는 우연의 결정들과 신비한 틈새와 표정을 주 요소로 하고 있다. 흔적과 흔적의 집적이 만들어 내는, 흡사 자연의 그것과 진배없는 연출력은 이를 이끌어 가는 작가의 의도를 훨씬 능가해서, 마치 저 머나먼, 그래서 알 수 없는 세계의 찬란한 비경을 상기시킨다. ● 이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잠시 일상의 세계를 떠나 비경의 황홀함을 경험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래서 눈앞에 전개되는 장면이 현실이면서도 가상의 현실로 느껴지는 세계에 주목하게 된다. ● 작가는 근자에 이르러 이를 적극적으로 도모하기에 이르렀지만, 정작 그는 데뷔 초기부터 이러한 의도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97년 「허상과 실재―흔적」시절부터 실재를 수수께끼로 간주하면서, 일찍이 허상과 흔적에 주목했고, 여기서 발전해서 현재에는 우연의 집적에 의해 실재를 흔적과 가상의 집합으로 정의해 보고자 하는 데 이르렀다. ●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시도는,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적극 연출해 냄으로써 기지의 것들이란 사실상 알 수 없는 것들의 아주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극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극한적으로 보여 주려는 데 뜻이 있다. 이를 명시적으로보다는 스펙타클 같은 황홀한 정경을 연출함으로써 그렇게 하려는 것이다.

길현수_集積-2002_캔버스에 혼합재료_2002

그의 의도를 간단히 '기지의 것의 해체'로 명명해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이 경우 '해체'란 기지의 것들을 아주 부수어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황홀경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기지의 것에다 상상적으로 연접시킴으로써, 우리의 삶과 현실을 보다 새로운 시각으로 재생산해 내려는 태도를 뜻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진부한 삶과 현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마음과 자세로 껴안을 수 있다는 것을 그의 근작들은 시사한다. ■ 김복영

Vol.20021121a | 길현수 회화·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