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모순

윤종석 회화展   2002_1120 ▶︎ 2002_1126

윤종석_순수한 모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2×122cm_2002

갤러리 창 / 2002_1120 ▶︎ 2002_1126 대전롯데화랑 / 2002_1129 ▶︎ 2002_1205

갤러리 창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Tel. 02_736_2500

대전롯데화랑 대전시 서구 괴정동 423-1번지 롯데백화점 8층 Tel. 042_601_2827

윤종석의 초기작품을 살펴보면 재료와 기법에 있어서의 다양한 실험과 탐구가 눈에 띈다. 그러한 실험과 변화의 모색은 호기심이나 형식미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에 대한 끈임 없는 탐색의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그가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일관된 모티프와 주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 1997년 첫 개인전에서 그가 선보인 「꿈꾸는 시간」 연작은 사각의 틀 속에 화석화된 조개, 선사시대 빗살무늬토기와 암각화, 가야 토기, 백제 연화문와당 등 먼 과거의 단편적인 흔적을 칠하고 긁고 붙이고 찍고 하는 다양한 기법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그의 민족의식과 어떠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민족의식이나 역사성이라기보다는 기원, 시작의 시간개념과 그 개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이미지인 것으로 생각된다. 퇴적된 과거의 이미지를 무의식의 심연에서 건져 올려 격자형 화면구조에 병치하는 작업과정에는 첫 발을 내딛는 작가가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의 토대를 일구는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 1998년의 두번째 개인전에 출품한 「몽환적 시간의 발아」 연작에서는 시작을 암시하는 이미지가 사라지고 식물의 모티프가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변화가 나타난다. 윤종석은 이 시기 자신의 작업노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어두었다. "거침없이 밀려오는 무수한 시간의 흐름을 계속해서 흘려보내고 지나쳐가며 나는 자연의 세계 한 모퉁이를 서성이고 있다......자연 그대로의 시간......바람과 비와 따스한 햇볕을 마시며 작은 하나의 세포에서 형태를 갖추어 가는 더디기만 한 시간......이러한 각기 다른 시간들이 내 안에서는 자유로이 자신의 고유한 향기를 뿌리며 자라나고 있다." 베르그송의 의식개념을 연상시키는 그의 독백에는 계산적이고 분절된 시간개념에서 벗어나 생성, 변화를 내포한 유동적 시간개념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나타난 식물의 생장과정을 보여주는 씨앗, 새싹, 무성한 잎, 열매 등의 이미지는 "세포에서 형태를 갖추어 가는" 유동적 시간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모티프였을 것이다.

윤종석_순수한 모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15×244cm_2002_부분
윤종석_순수한 모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15×244cm_2002

이후 윤종석은 식물의 모티프를 통한 유동적 시간개념에 대한 연구를 자신의 작업방향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2000년과 2001년에 발표한 「다른 또 다른」, 「순수한 모순」 등의 연작에는 현미경을 통해 관찰한 듯한 크게 확대된 나뭇잎이나 꽃이 등장하는데, 왕성한 광합성 작용을 마치고 시들어 가는 이파리와 꽃술이 선명한 활짝 핀 꽃이라는 대조적 이미지는 생성과 변화의 과정을 포착하는 수단으로 보인다. 이 시기 한 팜플렛에 이외수의 『감성사전』에서 발췌해놓은 시간에 대한 정의는 그의 작품의 의미를 함축하는 듯하다. ● "탄생과 소멸의 강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 강에서 태어나고 그 강에서 죽는다. 그러나 흐르지는 않는다. 흐르는 것은 시간의 강이 아니라 그 강에 빠져있는 물질들이다." ● 식물의 모티프를 통해 생성과 변화의 과정을 탐구하려는 시도는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시들어 가는 식물 옆에 적어 놓은 시구에서 그의 일관된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 "뽀오얀 연두빛 속살을 드러내어/ 내게 지켜보는 즐거움을 선사하더니/ 이제는 흙빛으로 몸을 바꾸어/ 시간의 흐름을 일깨워 주누나"

윤종석_순수한 모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15×488cm_2002_부분
윤종석_순수한 모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15×488cm_2002

그러나 일관된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이번의 신작에는 작지만 의미심장한 변화가 나타나 있다. 먼저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전부터 조금씩 보이던 점묘법이 전면적으로 구사된 것이다. 벽면을 가득 채운 캔버스에 주사기로 하나하나 점을 찍어 크게 확대된 꽃의 이미지를 얻는 작업과정은 생명체의 게놈구성을 규명하여 생명의 신비를 밝히려는 게놈프로젝트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윤종석의 작업과정을 게놈프로젝트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에게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인식론이자 철학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조형요소인 점을 화두로 삼아 생명현상의 근원과 삶의 진리를 깨치려는 구도자의 고행이 느껴지는 것이리라. ● 두번째의 변화는 식물의 모티프가 다양해진 것이다. 특히 동양화의 사군자가 눈에 띄는데 이것은 옛 선비의 사군자를 모델로 드로잉을 하고 그것을 점묘법으로 캔버스에 전사하여 제작된 것이다. 그는 왜 동양화의 모티프를 그것도 남의 작품을 모델로 하여 다루기 시작한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작가는 "순수한 모순"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그 의미는 성철스님의 다음 법어에 잘 풀이되어 있다.

윤종석_순수한 모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0×180cm_2002_부분
윤종석_순수한 모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0×180cm_2002

"더러운 뻘 밭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가득 피어있으니 참으로 장관입니다. / 아 ! 이 얼마나 거룩한 진리입니까...... /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할 때 거기에서 지옥이 불타게 됩니다. / 선, 악의 대립이 사라지고 선, 악이 융화상통할 때에 시방세계에 가득히 피어있는 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 ● 이 법어를 음미해보면 가장 작은 점을 통해 태산같은 꽃의 이미지를 얻어내고 동양화의 소재를 서양화의 재료로 표현하며 옛 선비의 작품을 모방하여 자신의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내는 윤종석의 작품은 대와 소, 동양과 서양, 모방과 창조의 대립이 해소된 상태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신작은 이제 막 지리하고 고된 고행의 길에 들어선 그의 다잡은 마음가짐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순수한 모순"의 세계가 극단적 대립항의 거친 병치가 아닌 연꽃의 모습으로 여물 그 날을 기대해본다. ■ 정무정

Vol.20021124a | 윤종석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