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사하는 감정의 여운

최병관 사진展   2002_1212 ▶︎ 2002_1231 / 월요일 휴관

최병관_자연시리즈 선_흑백인화_75×75cm_2002

초대일시_2002_1212_목요일_05:00pm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Tel. 02_720_5114

이미지(imago)라는 말은 원래 그 어원적인 측면에서 어떤 것이 평탄한 표면에 반사된 모습을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미지의 개념은 단지 시각적인 닮음 이미지(icon-image)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징 이미지(symbol-image)와 환상 이미지(fantasy-image) 그리고 미적 이미지(aesthetic-image)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 정신적 이미지들을 말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공통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어떤 정신적 사실이 반사되어 시각적으로든 상상적으로든 여하간 다시 출현하는 모습들인데 바로 이것이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것이다. ● 그림은 오랫동안 모든 종류의 이미지들을 재현하여 왔다. 특히 추상화는 예술 영역에 속하는 환상 이미지와 미적 이미지에 대한 조형적 재현에 있어 탁월한 방식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사진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사진은 근본적으로 절대적 유사(analogon)만을 허락하는 닮음 이미지에만 관계하기 때문에 상징 이미지와 환상 이미지 그리고 미적 이미지의 재현은 언제나 닮음 이미지 뒷면에서 함축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그래서 사진에서 닮음 그 자체를 재현의 유일한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사진은 언제나 두 가지 이해 방법 즉 "무엇을 의미한다"라는 분명한 상징(symbol)과 "무엇을 환기시킨다"라는 불분명한 지표(index)로만 이해된다. ● 잡지 기사를 읽는 방법과 시를 읽는 방법은 분명히 다르다. 전자의 방식은 분명한 진술들의 의미적 조합이지만 후자의 방식은 그러한 조합이 만드는 감각적인 여운의 포착이다.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 사진과 순수 사진은 비록 그 진행 방법이 동일하다 하더라도 "보는 방법"이 다르다. 전자는 무엇을 "보여주는" 상징 이미지이고 후자는 무엇을 "환기시키는" 환상이나 미적 이미지이다. 그러나 위대한 작품들은 언제나 특별한 효과 없이 자연스럽게 무엇을 발산하거나 누설하는 여운의 이미지들이다. ● 사진을 찍는다는 것, 그것은 원래 대상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가지는 감정의 여운을 누설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상을 보여주기 위해 물리적으로 찍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은닉한 "형이상학적인 음색을 포획하는 행위" 즉 사진적 행위(l'acte photographique)이고, 그때 출현한 이미지는 감성의 음색에 대한 인덱스이다. 그래서 사진 이미지가 출현했을 때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찍혔다는 사실(ca a ete)위의 결과물이 아니라 사실상 이러한 이미지를 있게 한 상황적 원인성 즉 왜 찍었는가에 대한 최초의 생성(genese)이다. 이러한 지시적 관계는 사진만이 가지는 유일한 예술적 재현 방식이기도 하다.

최병관_자연시리즈 선_흑백인화_75×75cm_2002
최병관_자연시리즈 선_흑백인화_75×75cm_2002

여기 작가 최병관 전시에서 보여진 대상들은 그냥 찍혀진 어떤 것들이다. 그 어떤 구체적인 상황도 없이 또한 그 어떤 푼크툼도 없이 나타난 익명의 아무 대나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단순한 물결들, 이러한 이미지들은 사실상 구체적인 대상을 보여주기 위한 닮음 이미지가 아니라 환상 이미지나 미적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한 상황적 인덱스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의미적인 무엇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단조로운 리듬과 반복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있음직한 애절한 연가처럼 은밀하게 단지 그 무엇의 존재(생성)를 누설하는 이미지들이다. ● 니체는 주어진 것의 진상을 알기 위해 껍질을 하나씩 벗겨 나갈 때 이론가는 벗겨낸 껍질에 관심을 갖는 반면, 예술가는 계속 껍질을 벗으면서 저쪽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이론가들은 껍질에 본질적인 형상들이 새겨져 있다고 보고 그 껍질로부터 유추되는 형상을 규명하려 하지만, 작가는 끝없이 알맹이를 감싸고 있는 껍질을 벗기면서 껍질이 암시하는 본질을 포획하려 한다. 그러나 유일하게 사물의 껍질만을 재현하는 사진의 경우 본질의 조형적 재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에 있어 본질은 껍질 위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index) 무엇에 있다. 본질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고 간주되는 껍질들 즉 여기서 사진적 형태로 보여진 물결과 대나무들은 단지 이러한 상황 주위에서 배회하는 감성의 음색을 지시하는 지시소(deictique)일 뿐이다. 그것은 무의미(non sens)의 장소일 뿐 그 어떤 사물의 이름도 갖지 않는다. 그때 껍질을 통해 발산하는 무의미는 애절한 바이올린 가락이 실어오는 몽환처럼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로 대부분의 경우 의도적으로 잊혀진 심연의 망각들이다. ● 그러나 이러한 몽환적 발산은 엄밀히 말해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극히 분명하고 안정된 "부동의 진술"에 기인한다. 잔잔히 물결치는 낯익은 수면의 연속과 거의 도식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닥의 대나무들은 우리에게 일상생활의 순간 포착과 흔들림이 암시하는 움직임에 대한 그 어떠한 환상을 주지 않는다. 거기에는 단지 지속의 순간과 무시간의 연속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과 소실되는 현실의 유령을 격리시키려는 사진의 순간 제스처에 너무 익숙해서 극도의 부동과 안정은 오히려 우리를 멍하게 하고 오싹하게 한다. ● 또한 어떤 상황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원소로만 나타나는 껍질 이미지들은 그들의 큰 구도 속에서 어떤 형이상학적 동체를 대변하는 "얼굴화된 세상_le monde visagefie" (Gilles Deleuze. Cinema I, L'image-mouvent, Minuit, 1983, pp.154-155.)이다. 대변화 된 단편은 언제나 열려 있는 나머지 동체를 지시하기 때문에 얼굴은 모든 동체의 감정과 표현들을 빨아들인다. 그것은 곧 표면화되고 축약되고 요약된 의식의 상부 세계이다. ● 큰 구도가 출현하자마자 모든 확실성은 중단한다. 의미와 함축 그리고 진술 등은 수수께끼와 같은 표면에서 갑자기 "아무 공간"으로 방사된다. 아무 공간, 그것은 완벽히 이상한 공간이며 가능한 순수한 자리로서 잡혀지는 연결 공간이다. 또한 큰 구도, 그것은 아주 가깝게 보여지는 강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장면을 "아무 공간"으로 변형시키고 가능한 모든 것을 순수하게 만드는 자리이다.

최병관_자연시리즈 선_흑백인화_75×75cm_2002
최병관_자연시리즈 선_흑백인화_75×75cm_2002

작가가 보여주는 부동의 세계는 출현 속 부재가 만드는 기억의 열린 세계이다. 그때 사진이 가지는 조형적 감각은 "환기"로서의 감각이 된다. 이와 같이 열린 공간으로의 방사는 곧 관객의 입장에서 연상(푼크툼의 확장)에 의한 인덱스의 환원을 말한다. 이는 결국 감각에서 기억으로 물질에서 감동으로 그리고 직조에서 아이디어로 이동하는 개념적 전이를 말한다. 감각들은 서로 서로 포획되고 응시자의 연상 속에서 용해되고 변형되고 수정되고 또한 재조직된다. 예컨대 장면에 찍혀진 "그것"의 구체적 상황은 즉각적으로 "나"의 경우로 환원되는 가변적 상황이 된다. ● 이때 사진 이미지들은 누군가가 늘어놓은 일종의 횡설수설이나 헛소리 같이 보인다. 중얼거리면서 뭔가를 우리에게 말하려는 듯 말이다. 그러나 사진은 정 반대로 뭔가를 듣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 그때 사진은 어떤 특정한 의미의 일방적인 메시지 전달로서 방출사진이 아니라 소리 없이 웅크리고 울고 있는 누군가의 애절한 사연이나 더 이상 돌아 갈 수 없는 기억의 아쉬움과 같은 심연 깊숙이 침전된 회한을 듣고 싶어하는 수신 기호가 된다. ● 그로 인해 야기되는 것은 우리 모두 각자 잠재된 기억들이다 : 이해할 수 없는 이미지들의 연상, 갑자기 출현하는 누군가의 낯익은 얼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익숙한 자리, 그리고 나. 이러한 무의식적 연상이 우리들 각자 고유의 "아무 공간"에서 우리를 잠시 머물게 할 때, 갑자기 솟아오르는 아쉬움, 향수, 억압된 욕구, 고뇌와 같은 감정의 침전물들은 외부의 자극에 따라 내향성 폭발을 일으킨다. 그것이 바로 감동의 출발이다. ● 결국 작가가 재현한 단순한 물결 자국과 대나무는 더 이상 사물의 지칭으로서의 이미지들이 아니라 일종의 사진적 추상이다. 그것들은 작가의 순수 체험에서 생성된 자신의 경험적 독백임과 동시에 현실 이편과 저편에서 출현하는 시각적 흔적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또한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침묵과 부동의 출현 속에서 누설되는 감정의 잔여 찌꺼기의 유동 즉"표현적 운동_ Le mouvement d'expression" (감정-이미지(image-affections), 그것은 이미지에서 감각과 행위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표현적 움직임"을 말한다. 그것들은 감각과 행위가 사라졌을 때 감정의 여운이 어떤 얼굴 위에 남아 물결쳐 지나고 반사하는 것들이다. Gilles Deleuze. Cinema I, L'image-mouvent, Minuit, 1983, p. 97.)이 된다. 이는 곧 주어진 인덱스로부터 슬며시 관객의 열린 기억 공간으로 반사하는 감정의 여운이다. ■ 이경률

Vol.20021217a | 최병관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