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하지 않고 보여주기

김수자 일러스트展   2002_1218 ▶︎ 2002_1231

김수자_길_캔버스에 혼합재료_2002

초대일시_2002_1218_수요일_05:00pm

성보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4번지 Tel. 02_730_8478

우리는 해석의 시대에 살고 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해부와 해석의 대상이며 시 또한 예외가 아니다. 겉으로 의미 있어 보이는 것은 해부와 해석을 통해 의미를 잃게 되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은 오히려 의미를 얻게 된다. ● 잘된 예술작품은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고 생각한 것은 엘리엇(T.S. Eliot)만이 아니었다. 일러스트레이터이며 글 솜씨도 좋은 김수자 또한 같은 생각인 듯 싶다. 김수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에서 이미지를 따다가 일러스트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이나 판단을 배제시키는 것이 이채롭다. 김수자의 시선은 아이들처럼 비개입적이고 그녀가 만들어 내거나 빌려다 쓰는 오브제들은 보는 사람에게 아이들의 마음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평화를 선사한다. ● 좋은 시처럼 좋은 일러스트레이션도 처음엔 눈을 기쁘게 하고 다음엔 가슴과 마음에 살아남는다. 예를 들어 김수자의 빨래판 작품들을 본 사람은 그것을 쉬이 잊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7년 전 첫 개인전에서 실제 빨래판에 그린 여러 개의 시적 작품을 보여 주었던 작가는 이번에는 스스로 지점토를 이용하여 만든 빨래판을 보여 준다. 이 새로운 빨래판들은 보다 풍부한 은유를 담고 있다. 김수자의 작품들은 말이 없다는 점에서 그녀를 닮았다. 그러나 좋은 귀를 가진 사람들은 그녀가, 그녀의 작품이 하는 말을 듣고 기억한다. 그의 작품들이 이 시시비비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 지속되는 평화를 선물하기 바란다. ■ 김흥숙

김수자_뜨개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2

뜨개질_ 아가야, 우선 식탁을 자고 / 둥글고 하얀 접시를 짜고 / 멀리서 떠도는 너의 아버지의 / 모자와 모자 위의 구름을 짜고 / 그리고 아버지의 닳고 닳은 구두를 짜고 / 아가야, 네게는 무엇을 짜줄까 ■ 송찬호

김수자_환상을 위하여_나무판에 혼합재료_2002

환상을 위하여_ 환각처럼 꿈이 되살아나는 순간 밥은 타서 / 공기는 매캐해지고, 식기는 깨져 흉기가 되고. / 세탁기는 헛돌고…… / 집은 不安全하게 기우뚱거리며 운다. / 환상으로 몸이 차오른 나는. / 자꾸 환상을 새끼친다. ■ 양선희

김수자_깃발은_혼합재료_2002

깃발은_ 깃발을 보면 / 깃발처럼 마구 심장이 펄럭이던 / 때가 있었다…… / 나는 먼길을 떠나는 젊은 강(江이)었다. / 오늘도 파아란 하늘 높다란 장대 끝에서는 전신을 몸부림치듯 깃발이 펄럭인다. ■ 이수익

이탈리아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와 이탈리아 작은 섬의 평범한 우편배달부 마리오의 우정을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으로 표현했었죠. ● 마리오는 마을 처녀 베아트리체에게 사랑을 느끼면서 그녀에게 보내는 연서에 네루다의 시를 적어 보내고 애정 어린 목소리로 읊어 주기도 합니다. 그 사실을 안 네루다는 "왜 남의 시를 자기 것처럼 썼느냐"고 질책합니다. 마리오는 어눌하게 "시는 그것을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 시인의 언어를 단어로만 읽던 젊은 날엔 이해도 되지 않는 시를 적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가슴 설레어 하곤 했습니다. 이제 세월이 지나고 나니 영화 속의 마리오처럼 제 마음의 눈으로 시인들의 시를 보게 됩니다. ● 시를 쓰는 이들조차 이런 시대에 누가 시를 읽겠느냐고 마음을 접는다지만, 힘들고 나태해질 때 저를 위로해 주고 새로운 영감을 주던 시인들의 시를 그려보았습니다. ■ 김수자

Vol.20021218b | 김수자 일러스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