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경 自畵景

박도철 회화展   2003_0115 ▶︎ 2003_0121

박도철_自畵景-하늘을 올려다 보는 사람_캔버스에 유채_50×72.5cm_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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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115_수요일_05:00pm

인사갤러리 2,3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29-23번지 Tel. 02_735_2655

Ⅰ. 땅과 안개사이로 질퍽한 펄 내음이 피어오른다. 밤을 뒤척이던 파도의 신음소리가 흰 물거품의 잔재로 남겨진 곳에 한 인간이 발목을 묻고 서 있다. 육신의 배처럼 우두커니 서서 깊은 시간의 행간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머리 뒤로 하늘이 다 벗겨져 나가고 있다. 그가 서 있는 공간에서는 끝 모를 지평선조차 수평을 유지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리고 흔적 없이 숨어버린 바다와 화면 밖으로 달아나는 안개는 또 다른 바다의 채움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는 듯 하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화면 속의 개펄은 현실의 그것이 아닌, 전설처럼 희미한 시간과 공간의 뒤섞임일 뿐이다. 그 모호하고 적막한 풍경 위에 한 인물이 풍경의 일부로서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풍경화도 인물화도 아닌 중도적 가치를 생산하고 있다.

박도철_自畵景-개펄_캔버스에 유채_50×72.5cm_2002

Ⅱ. 박도철은 그 풍경 속에 그림자와 같이 존재하는 자신의 흔적을 '자화경'으로 명명한다. 한 화면 안에 자화상과 풍경화가 공존하는 방식의 새로운 회화다. 그가 화가로서 걸어온 여정의 뒤안길에서 혹은 그 곳에서 비롯된 사유의 흔적으로서 자신의 실체를 둘러싼 풍경과 상황에 대한 자기 성찰로서의 화면인 것이다. 그 안에서 표현된 인물은 작가 개인인 '나'인 동시에 타자인 '너'가 된다. 즉 보편적 인간으로 상징화된 자화상으로서 자아의 상실, 타자화된 자아, 주체의 소멸을 증거 하는 현 시대의 좌표이자 이정표로 제안되는 그림인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을 도출하게 된 동기는 박도철이 자신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는 것의 무의미함을 번민하던 중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眞景山水)를 마주하고 부터였다. 한 여름 인왕산 골짜기의 집안에서 사랑채 창을 열어 제치고 독서를 하고 있는 겸재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인곡유거(仁谷幽居)' 앞에서 그는 겸재가 제시한 회화적 감흥과 구조적 논리에 압도당한 것이다. 겸재가 산 속의 솔바람을 맞으며 시공간의 뒤섞임 속에서 느낀 묘하고 귀한 감정의 실체를 추적하면서 박도철은 재현적 욕망을 지운 자리에서 회화란 다시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자화경(自畵景) 시리즈는 재료만 유화일 뿐 겸재의 진경산수의 정신적 문맥을 재해석함으로써 겸재가 제시한 '진경(現實)을 보는 눈'과 '세계를 이해하는 법'의 현대적 계승을 시도한 것이다. ● 그것은 대상을 묘사하기보다 대상에 의탁하여 자신의 신체를 화폭에 삽입시킴으로써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한 선현들의 시상(詩想)과 화리(畵理)에 대한 예우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한 자화경속에 이따금 등장하는 나뭇잎, 새, 과일, 꽃 등의 이미지도 의인화 된 자화상으로 해석된다. 즉 우주의 만물들을 작가 자신에게 대입시키고 그 개체들을 끌어 안음으로써 곽희(郭熙)가 동양 산수화론 에서 언급한 '자연과 평행 하는 조화'를 다시 복원하려는 의지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박도철_自畵景-산정_캔버스에 유채_50×72.5cm_2002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박도철의 자화경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세상과 대립하고 있다. 세상의 이미지와 여기서 비롯된 재현의 틀에 익숙한 일반화된 시각에서는 그의 자화경이 관념적 실체로 혹은 세속적 인과성이 결여되어 있는 화면으로 읽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회화는 서사적 허구로 변한 세상을 해체하고 수정해 나간다. 새로운 의미의 조합을 전제로 하는 해체인 것이다. 그것은 대상의 선험적 의미와 미술사의 풍경화나 초상화의 규범을 무효화시키며 고정된 읽기의 불연속적인 흐름을 조장하는 일종의 파열음을 생산해 낸다. 그 안에서 나는 타자가 되고 인간과 자연, 생명체들 간에 깊게 벌어져 있던 단절의 틈바구니 사이를 부단히 건너뛰는 시선의 어지러운 분산과 이동을 목격한다. 조용한 가운데 생명의 역동성이 흐르는 시공간 속에서 '일상'의 평범한 가치들이 그 만의 '역사'로 자리 바뀜하고 있는 것이다. ● 어찌 보면 그가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규명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그림 그리기라는 행위는 메를로 퐁티가 지적한 대로 "비가시적인 채로 있는 것을 가시적이게 하는 행위"의 작가적 실천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낭만적 몽상의 세계나 초현실적 신비를 열어주는 일과는 거리가 먼 행위다. 그러므로 그가 그린 '개펄'은 낭만적으로 과장된 자연 체험도 아니요 세세하게 그려진 그로테스크한 웅덩이도 아닌, 그저 추억이거나 백일몽 비슷한 아우라를 표현하는 붓끝의 신기함에서 비롯된, 다소 정돈된 방식으로 형상화된 풍경일 뿐이다. 콘스터블이나 터너가 창조해 낸 대지의 마법사가 뿌리는 빛을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같은 맥락에서 그가 그린 '산정(山頂)'은 영광을 표상하는 산봉우리가 아니라 미술사의 영욕과 긴장을 그림의 테두리 밖으로 보내려는 몸짓이며 그 안에 내던져진 자화상은 주체에 대한 전망이 봉쇄된, 즉 명확함의 공급이 차단되는 순간을 꿈꾸는 몽롱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어떤 맹렬함이나 개인적 신념으로 가득찬 풍경이나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구체화된 실체를 보는 것이 어려운 모호함과 더불어 시간을 초월한 영험스러운 에너지의 아우라속에 존재하는 풍경과 인물의 그림자들을 목격할 뿐인 것이다.

박도철_自畵景1-분화구 앞에서_캔버스에 유채_65×100cm_2002

Ⅲ. 가령 자화상의 이미지가 화면의 중앙에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분화구', '하늘을 올려다 보는 사람', '광장' 등의 자화경 시리즈를 보면 자화상 이미지가 생물학적, 사회학적 관점에서 묘사되는 인간 정체성에 대한 생생한 리얼리티의 구현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를 매개로 자아의 내적, 외적 시지각을 허물어뜨리는 출발점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욕망의 집결지로서의 신체성이 해체된 하나의 '상황'자체로 존재하며 사회적 기대심리, 역사적 가정, 이데올로기의 그물망들을 스스로 거세시키며 특별한 메세지나 목적이 지워져 나간 자리에서 텅 빈 기호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 켠에서는 혹독한 시간을 견뎌온 '회화'라는 운명체의 피로를 역력히 표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시각으로 보면 용솟음치는 영겁의 시간을 토해내는 듯한 '분화구'에서 지구의 아우성과 현실의 폭발이라는 허상의 높이들을 휩쓸어버리는 어떤 카타르시스를 엿볼수 있으며, 다 사라진 화산재를 머금은 채 뿌연 하늘을 닦아 내리려는 듯한 인물에서 초라하지만 뜨거운 적의의 눈망울을 보게 된다. 또한 '하늘을 올려다 보는 사람'에서도 투명한 사유를 갈망하는, 혹은 금방이라도 증발될 것만 같은 존재의 짤막한 탄식의 눈망울이 거친 붓터치 속에서 빛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박도철_自畵景-廣場1_캔버스에 유채_80×116.5cm_2002

그의 작품 '광장'은 무수한 사연과 운집된 인연들이 썰물처럼 스러져 나간 또 하나의 텅빈 '개펄'로 파악된다. 그 속에서 완전무결한 바다에 의해 동요되는 외롭고 나약한 한 인간상을 발견한다. 그는 유적지의 시민광장에 버티고 있는 영웅처럼 기개에 찬 자화상으로 군림하지 않고 그저 존재론적 한계를 직시하고 있는 경직된 직립인간의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 오히려, 그 동상으로서의 자화상은 모두가 떠나간 빈자리에 홀로 남아 도시의 욕망과 상황의 그림자들을 응시한 채 또 다른 대안과 이상향을 찾아 현실에 맞서는 인상을 주고있는 것이다.

박도철_自畵景 3_캔버스에 유채_53×80cm_2002

Ⅳ. 언젠가 박도철은 자신의 그림 속에서 발견되는 드로잉적 요소의 태동배경을 설명하면서 유년기 시절 '비행기 만들어 날리기'에 심취했던 기억을 떠올린 적이 있다. 새의 자유로운 비상을 흉내내기 위해 시도했던 '배행기 만들기'는 무의식중에 그로 하여금 상상력의 해방의 도구로서 드로잉에 천착하게 했고 드로잉의 가벼움, 경쾌함, 미완성, 프로세스적인 자기 환원적 요소가 종국에는 자유로운 그림의 추구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그의 이전 개인전 '그림과의 대화'에서 보았던 '바람이 불자 많은 점들이 움직이다'라는 드로잉 작품은 이번 신작들의 태동을 예고하듯 중앙의 인물을 중심으로 점들이 회오리 바람처럼 돌아나가는 풍경이었는데,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현 화단에 만연해 있는 스케일리즘(scalism)의 거대증후군에 당당히 맞선 매우 힘있는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이번 개인전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자화경' 시리즈는 결국 그러한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 독백, 끄적거림으로서의 드로잉이 인간, 생명, 자연에 대한 말걸기로 전이되고 자신이 찾지 못한 것들을 일깨워 주는 내면의 가장 고독한 반려자가 되어, 종국에는 자신을 모든 타자에게 열어 제친 화법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그 모든 타자중에는 그가 화가로서 처음 만난 반 고흐를 비롯해 뭉크 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열정이 용해된 채 그들의 환생과 겸재 정선에 대한 경외심이 대화와 화답의 방식으로 그의 화면에서 수평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한 바 대로 '내면의 정신성 대신 기술에 의존해 가는 현대미술'을 바라보며 그 바닥난 내면의 신화라는 화약고의 도화선에 다시 불을 당기고자 한 작가 정신의 발로일 것이다. 개성의 모든 심연이 상실 되어가는 지점에서 선현들의 영험한 기운을 받아 사산된 정신을 복원해 보려는 몸짓 말이다.

박도철_빈자리_캔버스에 유채_89.5×145cm_2002

그렇게 바다의 어느 한 흔적도 그리지 않았으나 안개와 노을 묘사만으로 그 바다의 넓이와 깊이를 느끼게 하는 '그리지 않은 그림', 산(山)을 그리지 않았으나 대상의 배경을 찾아 그려 나가다가 산이 정확히 드러나는 그런 그림을 향하여 박도철은 진정한 그리기의 자유로움을 찾아 나선다. 우리는 바로 그 그림에서 외롭고 나약한 한 존재의 은밀한 중얼거림을 만나게 된다. 낯선 동물처럼 웅크린 채 절망과 소망이 교차되는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풍경 속의 한 점에 불과한 바로 그 사람, 점 하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 이원일

Vol.20030113a | 박도철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