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고, 나는 나다

오혜선 조각展   2003_0115 ▶ 2003_0121

오혜선_닫히다, 열리다_합성수지, 지퍼, 오프너_74×36×62㎝_2001 병뚜껑은 어떠한 세계와 대면하여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초대일시_2003_0115_수요일_05:30pm

갤러리 창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Tel. 02_736_2500

사물을 통해 들여다 본 현대인의 관계성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저의 작품의 주제는 '현대인의 인간관계성'입니다. 현대인의 소외, 고독한 대중, 인간 실존의 위기.. 이미 수없이 많은 사회학자들이, 작가들이, 그들의 저서와 작품으로 다뤄온 이 화두를 본인이 다시 들고 나온다는 것은 보시는 분들께 식상할 뿐만 아니라 지긋지긋한 느낌마저 지울 수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케케묵은 주제를 들고나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이야기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 현대 사회 속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장 속, 쉴새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위에서 조립되어 나오는 공업품처럼 비슷비슷한 외양을 가진 사람들이 거대한 사회 속에서 무리 지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사냥을 하고 농사를 짓는 자급자족의 생활로 혼자서도 꿋꿋하게 살아갔다면 오늘날 현대인들은 고도로 조직화되고 분업화된 사회 시스템 속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타인과 공유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타인과의 관계성이 그 어느 시대보다 중요해 졌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만 문제는 인간관계마저 이 시대의 화두인 '합리화', '효율성', '스피드', 그리고 경제적 법칙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오혜선_너는 너고, 나는 나다_합성수지, 압축합판_10×310×230㎝_2001 생김생김이 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조각들.. 퍼즐 조각들은 서로 끼워 맞춰지길 원한다. 그러나 실상 하나의 퍼즐 판 속에 똑같은 모양은 단 한 개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퍼즐은 반드시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어야만 완벽하게 끼워 맞춰질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타인을 만날 때 아주 '합리적'으로 '효율성'을 따집니다. 과연 나에게 이득이 되는 사람인지, 이용가치가 있는 것인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써먹을 기회가 있는지) 또는 이 사람을 만남으로서 내가 손해 볼 일이 있는지, 드러내놓고 혹은 은연중에 계산을 하게 됩니다. ● 가장 아름답고 순결해야 할 연인관계도 그다지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신문의 한 머릿기사를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뉴스 중에는 혼수문제로 맞아죽은 며느리에 대한 기사도 있고, 또는 일등 신랑감의 조건이 나열되기도 합니다. 너무 극단적인 것 아니냐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사랑보다는 조건에 맞춘다라는 말은 그다지 낯선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현대인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에, 또한 상호간 유리한 거래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현금 또는 신용카드 할부로 구입하는 방식처럼 사람들은 타인을 같은 방식으로 바라봅니다. 그야말로 널려져 있는 수많은 상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또는 효율적인 것을 찾아) 취하고, 쓰고, 또 그 이용가치가 사라져 버리면 쓰레기통에 버려버리는 시스템을 따르고 있습니다.

오혜선_나는 이제 쉬고 싶다_합성수지, 오브제_92×47×64㎝_2001 우리는 모두 다리를 3개만 소유한 의자들이다. 실상 의자는 3개의 다리로도 지탱하고 서 있기도 하지만 그만큼 불안하며 불안정한 존재들이다.

현대사회는 테크놀러지 문명에 따른 정보화로 인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관계가 광범위해졌으며 또한 비대해진 사회 시스템은 사람들을 조직화로 만들었습니다. 사회가 조직화되고 복잡해질수록, 물질문명의 풍요로움을 누릴수록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성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표면적이며 수단적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어떤 '필요' 에 의해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따라서 하나의 타인이라는 존 재는 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필요가 없어지면 등한시되는 하나의 소모품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 현대인은 불안합니다. 모든 것은 너무나 빨리 변해버리니까요. 급변하는 현대 사회 속에 사람들은 이제 변하지 않을 그 '무엇'을 찾게 되었습니다. 바로 지금,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타인에게서 말이지요.

오혜선_나는 늘 배가 고프다_합성수지, 천, 솜_큰 통조림 75×45×59㎝ / 작은 통조림 15×15×20㎝_2002 규격화된 모습으로 대량생산된 통조림은 휴대하기 간편할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단단한 통 안에 밀봉되어 있어도 유통기한이 있어서 결코 영구적이지 못하다. 그것들은 언젠가 우리의 허기를 '잠시' 채워주고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들이다.

저는 제가 만들어낸 사물들을 통해 결국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사람' 은 언제나 제 작업의 주제이자 목표입니다. 다만 사람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사물을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이 시대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시대의 산물인 사물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지요. 하나의 사물은 한 시대, 하나의 문화, 그리고 그 시대의 정황, 또한 한 개인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 저는 현대 사회 속의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물을 통하여 현대인들의 관계성을 표현해 보았습니다. 저의 사물들은 뒤샹이 취한 '빌려오는' 방식이 아닌 오브제를 모방한 사물들입니다. 만들어낸 사물들을 최대한 변형시키지 않고 똑같이 재현해 내는 것은 '진짜 같은, 그러면서도 진짜가 아닌 가짜'를 통해 사물이 사물이 아닌, 은유적 의미를 내포한 또 다른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제가 선택한 사물들은 대량생산된 공업 생산품의 소모적인 특성을 드러낼 수 있거나 현대인의 관계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들로서 작품에 도입된 사물들은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그 의미가 또다시 메시지를 형성하는 것의 일부분으로 편입됩니다. 작품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개체성은 양적가치로 구현되는 현대사회의 익명적 다수의 타인들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백색으로 통일된 색채 역시 현대사회속 구성원들의 익명성, 유사성, 몰개성화 등을 표현하기 위해서 입니다.

오혜선_『너는 너고, 나는 나다』展_갤러리 창_2003

아직 이 시대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그런 '조건'보다는 사랑을 택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존재하니까요. 그렇게까지 못되게 구는 제 자신 곁에도 아직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습니다. 끝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부모님, 힘들 때마다 달려와 주는 친구들, 부족한 제자를 끝까지 이끌어주시는 선생님들, 언제나 든든함으로 곁에 있어주는 동료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만큼 너무나 고마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합리적' 이라든가 '효율적'인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관계들이 존재합니다. 휴대 폰을 살수는 있습니다만, 그 휴대폰으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줄 타인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 자, 여러분들도 한번 다시 바라봐 주십시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세요. 그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세요. 그리고 지금,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세상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고, 또 그런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고 살아가고는 있지만, 실상 자신이 너무나 절실할 때 곁에 있어주는 타인은 지금 당신의 곁에 있는 그 사람뿐입니다. ■ 오혜선

Vol.20030114a | 오혜선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