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의 사회적 공유로서 자기 고백

삼십展   2003_0117 ▶ 2003_0130

공동 프로젝트_Wanna be, Thought to be__2003

참여작가 김지혜_민정아_최원정_한수희_홍영복

마로니에미술관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0번지 Tel. 02_760-4601

삼십:부유하는 세대_어느 세대나 독특한 문화적 체험과 사회적 정체성을 공유한다. 그것은 개인별 성별 계층별 차이를 넘어서 그들이 자라나고 살아가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체험의 공유에서 비롯된다. 한국에서의 삼십대. 그 중에서도 이제 막 서른을 넘기거나 아직 중반을 넘기지 않은 이들. 1970년대 이후의 경제부흥을 계기로 소위 보릿고개 걱정 없이 경제적 풍요를 누리며 자란 첫번째 세대인 동시에 엄격하고 보수적인 가족과 사회 속에서 규율화된 가치관을 교육받으며 자란 세대이다. 한편 부모들의 한결 같은 교육적 열망 아래 성장하여 '받는'것에도 익숙한 세대인 이들. 이제는 독립된 성인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대 수준과 경제적 책임감을 의식하게 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생계를 위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세대이기도 하다. 집단주의와 거대담론에 익숙한 386세대와는 다른 사회적 경험을 했지만 그렇다고 거대담론이 사그라진 포스트모던 시대에 익숙한 개성과 자유와 상상력을 자유롭게 누리기에는 너무나 보수적인 세대인 그들. 서른 중반 이전의 삼십대들은 아직까지 이렇다 정의되지도 않았고 형상화되지도 않았지만, 한국이라는 공간과 현실의 틈새에서 쉼 없이 부유하며 흘러가는 세대이며 분명히 실재하지만 언급되지 않은 세대이고 주목되지 않았던 세대이다. 이러한 세대의 경험과 정체성을 규명하고 정의하는 작업은 급변하는 한국 사회의 한 축에서 공유되고 있는 일상적 삶의 양식과 문화적 의미들을 구체적으로 탐구하고 형상화 하려는 작업이다. ● 체험의 사회적 공유로서의 자기 고백_ 서른 초반에서 중반의 작가들로 이루어진 "삼십"전시팀은 한국에서 삼십대의 일상과 문화적 삶의 양식을 형상화 하고 mapping 하려는 의도로서 자기 고백 혹은 자기 성찰의 방법론을 택한다. 다양한 미디어을 통한 고백적 diary나 성찰적 고찰을 통해 세대적 체험을 규명할 수 있는 특성화된 요소들을 찾아내어 형상화하고 그들을 관통하는 의미들을 정체성의 맥락 위에서 살펴본다. ● 성별, 계층별, 개인적 성향별로 각기 다른 경험과 근간을 가지더라도 같은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그 개별적인 문화 사회적 경험들을 관통하는 요소, 즉 개인적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공통 요소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개인적 경험에 의존하는 자기 고백이나 성찰의 방법론을 택하는 "삼십"의 시도는 세대적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한 단정적 일반화를 피하고 개인적 체험을 부각하고 낯설게 함으로서 그 공통점을 흐르는 전형성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이렇게 얻어진 전형성은 관념화를 통해 유추된 죽어있는 삼십대의 초상화가 아니라 개인적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 살아 숨쉬는 그림을 관객과 공유하고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할 것이다. ■

Wanna be, Thought to be_김지혜 민정아 최원정 한수희 홍영복 공동 프로젝트_2003 ● "Wanna be, Thought to be"는 수백개의 소형 스피커를 이용한 Interactive Sound Installation이다. 작은 원형의 스피커들은 전시장 바닥에 세워져 있고 각각의 스피커에서는 '삼십'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 (Sound collection) 흘러나온다. 관객이 그 곁을 지날 때마다 센서가 감지하여 스피커는 좌우로 움직이게 되고 수백개의 스피커는 마치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듯 작은 움직임을 보이며 낮은 목소리를 낸다. 마주한 벽면에는 텔레비젼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앞에서 관객들은 그들의 과거였거나 현재이거나 혹은 미래가 될 "삼십"에 관해서 제시되는 여러 질문에 답하고 이야기하게 된다. 관객의 이야기는 녹음되어 스피커를 통해서 미리 채집된 사람들의 인터뷰와 더불어 플레이된다. ● "Wanna be,Thought to be"는 관객이 이야기하는 익명적인 자기 고백인 동시에 공유할 수 있는 미래 회고적 기록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른 세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관객의 참여를 통해서 불완전하고 경계적인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 "삼십"에 대해 작가와 관객이 함께 고민하고 공유점을 모색하려는데 그 의의가 있다. ■

김지혜_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_2003 ● 콩과 팥. 콩팥_ 대표적 곡물로 단백질이 풍부하고 팥은 산후의 부종에 좋고 악귀를 물리치는 효험이 있다. 콩은 오래 먹어서 성인병도 예방하고 몸이 가벼워 질 수 있지만 팥은 오래 먹으면 살이 빠지면서 몸도 무거워져 예부터 장기복용은 금하는 등 서로 반대되는 성격을 갖는다. ● 콩과 팥이 합해져 생긴 단어 콩팥_ 왜 콩팥일까? 콩처럼 생겼나? 그럼 팥은?? 팥 색깔이여서 일까? 노폐물에서 피를 제거 하는 기관으로 척추를 사이에 두고 두개가 서로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다. 하나만으로도 살 수 있지만 하나도 없이는 살 수 없다. ● 흔적 남기기_ 붉은색 흙으로 손바닥만한 수많은 그릇들을 만든다. 조물조물… 그릇 표면에 마치 인장을 찍듯 새겨질 내 지문들… ● 콩(과)팥을 심다_ 나 자체인 그릇들 안에 콩과 팥을 심는다. 페미니즘과 사랑이 나에게 콩과 팥이 아닐까... 늘 나를 허덕이게 하는 두가지… 서로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지탱해 주기도 하는 콩팥처럼… ● 콩(과)팥을 키우다_ 콩은 나에게 사랑을 암시하는 물건이다. 너무도 사랑하는 내 신랑과 아이를 위해 난 평생 콩과 가까워져야 한다. 팥은...나를 나이게 하는 것이다. ● 콩(과)팥 밭을 가꾸다_ 수많은 콩그릇 팥그릇을 마치 밭처럼 펼쳐 놓는다. ● 콩(과)팥 사이를 오가다_ 콩과 팥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는 나처럼 관객들도 콩과 팥 사이를 지나 다니겠지… 난… 아마…평생을…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할 것이다. 온전한 콩팥이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또한 나는 내 사랑의 콩팥을 지켜야 한다… ■ 김지혜

민정아_Unity_2003 ● single_ 1990년대 X세대라는 말이 나오며 개개인의 개성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나! 그 하나의 존재를 위한 영역의 벽을 쌓아간다. ● multiple_ 비록 외양은 다르지만 같은 생각이나 행동들을 통해 타인의 모습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보곤 한다. 그리고 타인을 닮아가고자 그 사람이 보는 책을 따라 읽기도 하고 똑같은 음식을 먹기도 한다. 내안에 잠재된 무수히 많은 나를 찾는 것이다. ● unity_ unit은 하나를 지칭한다. unity는 다수의 통일을 의미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눈에 비추어진 타인의 단편만을 보고 그 사람을 정의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일률적인 잣대로 평가하려고 한다. 계속 하나의 unit만을 바라본다면 언제 벽을 허물고 다양함 속에서 unity된 새로움을 창출 할 것인가? ■ 민정아

최원정_Drawing Invisible_2003 ● 우리의 눈과 비디오 카메라의 렌즈를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비디오 카메라는 NTSC 방식으로 1초에 29.97개, 약 30개의 그림들을 기록한다. 즉 카메라는 하루 24시간 중 우리가 수면으로 소비하는 대략 8시간을 제외한 16시간 동안 약 1,728,000개의 그림들을 기록하고 저장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실제로 하루동안 우리의 육안은 무엇을 보고 기록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보고 듣고 기록하는 일련의 작용에는 기억이라는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인 선택의 작업이 전제되어 있어 지극히 기술적인 카메라의 기록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의 기억은 불연속적이고 선택적이기에 카메라의 기록과 다르다. ● 메모, 일기, 에스키스. 무엇인가를 기록하기 위해 되풀이하는 일상적 행위들이다. 이들은 불완전한 우리의 기억을 보조하는 삶의 기록이며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DRAWING INVISIBLE은 이러한 일상의 단편적인 기록들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짧은 텍스트나 작은 드로잉들은 불명료한 삶속에서 지나쳐 버린 생활의 단면들을 온전하게 보여준다. 어느 순간에 이들은 우리의 두뇌에 입력되어있던 자료들을 기억의 작용으로 끄집어내어 환기시킨다. 이 일상의 단편적 기록들을 카메라로 촬영하여 '그림'으로 수집한다. 30장의 그림이 모여 움직이는 1초를 이루는 비디오 카메라의 기록 방식에 따라서 이 그림들을 한데 모아 실험영상을 제작한다. 일상의 기록(A diary)을 다시 기록(Recording)하는 기술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실험영상은 그 본래의 기능, '기록'으로서의 전달력을 상실하게 된다. 삶의 단편적인 기록들은 하나의 불연속적 영상으로, 일루젼(Illuison)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읽을 수 없는 텍스트, 볼 수 없는 드로잉으로. ● 실험영상과 그를 통해 관객에게 기억될 여러가지 잔상과 의문들. 나의 작업은 작품과 그를 둘러싼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기억과 기록의 경계가 와해되는 순환의 과정 그 가운데에 위치한다. ■ 최원정

한수희_ Scalet Letter_2003 ● 사람들은 제각기 그들의 가슴속에 주홍글씨를 품고 살아간다. 그것이 비록 17세기 중엽의 '헤스터 프린'이 일생 동안 가슴에 걸고 살아야 했던 그 'A'는 아닐지 라도. 수치심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교육 받아온 사람들은 눈치 보는 군중과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다른 객체를 끊임없이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찾으며 그 우위와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 삼십이라는 나이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매김을 해야하는 나이이다. 남과 비교해서 더 나은 삶을 영위하는 것만이 제대로 산다는 말을 듣는 물질만능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가슴속에 저울을 달고 순간 순간을 끊임없이 저울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와 남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살아야 하는 삶,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어둡게 빛나고 있는 주홍글씨일 것이다. ● 두 개의 모니터가 각각 나타내는 주체와 객체의 마음은 서로를 끊임없이 탐구하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변화시킨다. 주체의 위치는 객체의 주관적인 높고 낮음에 따라 계속 변하며, 무의식 속의 등호는 주체를 객체와 끊임없이 비교하여 새로운 객체에 대항하는 상대적이며 사회적인 매트릭스로 이동하게 한다. 객체와 비교할 때 비로소 그 존재가 확인되는, 숨어있던 인간의 원죄가, 그 수치스러운 자신감과 자괴감이 붉게 발광한다. ■ 한수희

홍영복_서른 즈음, 안과 밖 그 사이_2003 ● 어릴 적, 아이들과 놀다가 내가 집에 들어오면, 그애들은 어디 가는 걸까, 그들 모두가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바라봄으로써, 내가 들음으로써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존재한다는, 철저하게 나만이 존재했던 소우주였던 셈이다. ●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소우주는 무너지기 시작하고. 대신 내가 얼마나 작은 부분으로 이 거대한 시스템 안에 속해있는가, 수 없는 관계 속에 거꾸로 나라는 객체를 정의하게 되었다. ● 소우주가 갖고 있던, 믿어 의심치 않는 일체감 대신, 내 자아는 이제 분리되고, 응시되기 시작했다. 외부와 내부, 이방인과 내부인, 거주자와 여행자…. ● 역설적인 것은, 두개의 다른 시스템 안에 임시적으로 거주한다는 현재의 개인적 상황이 30즈음에, 무너졌던 소우주의 싹을 다시 틔워내고 있다는 점이다. 외부란 내가 관여하지 않는, 내 시선, 기억 안에서만 존재하는 불특정한 이미지들일 뿐, 결국 바라보는 나만이 실재하는 온전한 소우주가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 홍영복

Vol.20030120a | 삼십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