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으로 남는 호흡의 쉼표

조문희 문인화展   2003_0604 ▶ 2003_0613

조문희_探梅1_한지에 수묵담채_92×96cm_2003

초대일시_2003_0604_수요일_05:00pm

동산방 서울 종로구 견지동 93번지 Tel. 02_733_5877

여류문인화의 脈 그 拙樸의 筆墨 맥을 이어가는 여성적 文氣 ● 조문희의 작업은 그 근간이 문인화이지만 한번 더 조명해 들어가면 조선시대 여류들의 체취를 느끼게 하는 여성 특유의 필치와 일기(逸氣)가 있다. 그것은 학문이나 품성이 스며있는 선비적인 문기(文氣)와 더불어 남성과는 다른 정아(靜雅)한 고요와 섬세한 안목으로 녹여진 부드러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한다면 강한 자들의 힘과 형식을 껴안아 가는 모성적인 삶의 포용력과 너그러움이 여성적 섬세함과 어울려서 필묵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보여지는 이러한 요소들은 의도적 형식이 아닌 자연스럽게 전통 속에 묻어오는 일종의 페미니즘적인 요소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녀는 최근 몇 년간 침묵을 지켜왔지만 이번 전시를 통하여 다시금 새로운 시각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조금 세분하는 것 같지만 '여성적 문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그의 대체적인 작업경향은 그 근저에 전통적인 문인화의 흐름을 계승하려는 고전에 대한 연구자세가 있다. 이러한 요소는 화제에서 보다 잘 나타나고 있다. 그의 화제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나 글씨체는 조선시대 내방가사(內房歌辭), 즉 『규원가(閨怨歌)』로 유명한 허난설헌(許蘭雪軒)과 같은 여류작가들의 고매함을 추구하고 있다. 그 졸박의 고전미도 그렇지만 언제나 추스려가고, 정련한 마음가짐을 담아가려는 여인네의 체취가 있다. ● 달뜨면 오시겠다 말해놓고서 달떠도 우리 님은 오시지 않네. 아마도 우리 님 계신 곳엔 산이 높아 저 달도 늦게 뜨나봐. ● 시(詩)라기 보다는 가사(歌辭)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한 이와 같은 화제는 단순한 문학적 의미를 넘어서 그림과 함께 어우러져야만 하는 시화일체(詩畵一體)의 형태를 띠고 있어 평소 삶의 자세와 학문적 성향을 엿보게 한다.

조문희_賞春_한지에 수묵담채_45×45cm_2003

간소함과 기다림, 품격과 관류(貫流) ● 조문희의 이번 동산방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그가 보여준 지금까지의 작업경향으로 볼 때, 그간 자신이 걸어온 전통적인 경향에 대한 일단의 정리와 함께 일종의 과도기적 변화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아래에서는 두 가지로 나뉘는 이번 전시의 경향을 정리해보고 이를 통해 그녀의 새로운 지표를 읽을 수 있다. ● 첫째는 비교적 전통적인 그의 스타일로서 구사된 사군자나 석류, 감 등 이전 백악예원 전시에서 상당부분 선보인 경향들로서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다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작품 「月夜吟梅 1」 「賞春」 「寂靜處」 「대화」에서 처럼 물론 소재는 큰 변화가 없다지만 전반적인 공간구성의 역동성이나 긴장감, 과감한 생략과 강조의 리듬감을 추가하고 있다. 그 중 探梅 시리즈의 경우 형상을 생략하면서 떨어뜨리는 점만으로 표현하려는 새로운 감각 등은 백악예원 전시와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조문희_분노_한지에 수묵담채_44.5×44cm_2003

물론 문인화의 경우가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 그 변화의 가능성이 어떠한 분야보다도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 분야에 대한 미술계의 관심이 많은 이유는 바로 그 변화의 기대치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렇다 할 만한 현격한 변화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전통의 틀을 유지하면서 서서히 변모해 가는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이제 새로운 지평을 예고해가려는 그녀의 '조용한 실험'이 숨쉬고 있는 듯하다. ● 조문희의 이번 작품에서 보듯, 이 시대를 영위하는 작가의 작품이지만 문인화의 경우 근대이후의 조형적 미학체계와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시각으로 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 우리의 '전통적 사고'에서 유희되었던 자연합일의 사상이나 풍류의 맛깔스러운 여유, 정서, 유가사상을 근간으로 한 고도의 간소함과 발효되어지는 기다림, 인위적이지 않은 적절한 삶의 품격과 관류(貫流) 등이 묻어 나오는 정서 등은, 근대 이후의 서구회화는 물론이거니와 중국의 문인화와도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 '작업을 업으로 하지 않는 시대', 삶의 쉼터로 생각하고 한바가지 샘물을 들이키는 정도의 청수한 마음의 표현으로 생각하던 시대의 경지를 어떻게 재현하고 계승해 가는 가 하는 점은 바로 조문희의 고민 속에 묻어있는 과제이자 무엇보다 우리미술계에서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과제일 것이다. ● 이번 동산방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그녀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다소 변신을 시도하고 있지만 고대전통 회화사상에 대한 한 맥락을 이어볼 수 있는 드문 기회로 평가되어진다.

조문희_기다림_한지에 수묵담채_45×45cm_2003

두 번째의 특징은 위에서 언급한 비교적 '전통계승'의 경향에 이어서 이를 현대적으로 변화시켜나가는 새로운 작업들을 들 수 있다. 이 점은 이미 위에서 살펴본 전통적 경향에서도 상당부분 나타나고 있지만 나아가 「探梅시리즈」 「洛花如有意시리즈」등 일부 작품에서는 작가 나름대로의 실험적인 경향을 선보이고 있다. ● 이 시리즈에서는 기존의 여백을 사용하지 않고 원근이나 필력과 화필의 품격, 기운생동의 일취(逸趣)를 추구하기보다는 회화적 공간으로서 인지하고 있다. 또한 바탕을 흰 여백의 공간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화면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가리워진 매화를 찾아가는 작가의 해석은 사군자나 문인화가 갖는 기존의 형식을 넘어서 탈유미적(脫唯美的) 입장을 제기하고 있다. 실험단계이기는 하지만 그의 이 같은 접근은 여백의 기존개념에 대한 상당한 변화를 보이는 면으로서 여지를 남긴다. ● 지만 과제는 남아있다. 필력이나 공간의 운용, 소재의 선택, 화면의 격조 등에서 읽을 수 있는 정체성에 대한 변화, 화선지와 모필에 의한 필획의 관계에서 설정되어온 오랜 시간동안의 전통적 미학체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그렇다. 더욱이 문인화가 여기나 격조의 세계관을 중심으로 표출되었던 장르였다면 이번 조문희의 실험은 근대이후 서구식 회화로 그 뿌리를 변화시켜나가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이점은 시서화 삼절이라는 문인화적 본질과 조형미학적 차원의 서구중심 회화적 세계관을 복합적으로 이어가려는 의도로 여겨진다. 여기에는 아직까지 일단의 문제가 있다. 다소 안정적이지는 못하지만 이에 대한 기대치는 '포스트 조문희'의 가능성으로 여지를 남긴다.

조문희_道_한지에 수묵담채_80×98cm_2003

여백으로 남는 호흡의 쉼표 ● 얼마전 『화』라는 책으로 우리 곁을 스쳐간 틱낫한 스님이 남긴 여운과 같이 조문희의 문인화는 회화적 조형성으로보다는 여유로 남는 호흡의 쉼표처럼 여백을 구가하는데서 아직까지의 매력을 찾을 수 있다. 그의 세계는 세상사의 정보나 수많은 일상의 언어들이 배제되어있다. 물론 그녀만의 일상이 잠재의식의 붓끝에 묻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지만 아직까지 그녀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웬지 청정지역을 만나는 듯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텅비어진 충만'처럼, 졸박(拙樸)의 미학이 있다. ● 현대문인화의 많은 고민을 안고 있는 우리미술계에서 조문희의 작업은 여류로서, 새로운 문인화의 지표를 개척 해가는 중견으로서 지금까지의 다소 보수적인 맛을 어떻게 변신해 갈 것인지 그 기대가 적지 않다. ■ 최병식

Vol.20030607b | 조문희 문인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