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무-물고기의 내면풍경

홍세연 회화展   2003_0611 ▶ 2003_0620

홍세연_idealist_종이에 수채_50×40cm_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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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611_수요일_05:00pm

갤러리 피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1층 Tel. 02_730_3280

흔히 맑은 눈동자를 '호수 같은 눈동자'라고 표현한다. 그냥 '눈동자가 맑다'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호수의 맑고 투명한 이미지를 빌어서 눈동자의 상태를 암시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는 보조관념인 호수를 '통해서' 원관념인 눈동자를 설명하는 직유법의 하나이다. ● 이런 직유는 홍세연의 작품을 감상하는데 유익한 참고가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무를 통해서 물고기를 형상화한 그의 작품은 직유가 주는 풍부한 울림을 회화적으로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나무(나뭇잎)-물고기는 나무(나뭇잎)이면서 물고기이다. 여기서 나무(나뭇잎)는 실감나게 묘사된 나무(나뭇잎)이자 물고기를 형상화하는 재료이고, 물고기는 그것으로 조형된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그의 물고기는 이미 나무의 상징성이 포함된 물고기인 셈이다. 나무의 상징성? 예로부터 나무는 영혼이 깃든 신성한 것으로, 경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굳이 그런 사실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척 보기에 나무는 사람을 닮았다. 대지에 제 육신을 정박시킨 채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모양이 마치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사람이나 손가락을 쫙 펴고 있는 사람의 손 같다. 또 대지를 떠나서는 살 수 없지만 그럼에도 먼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하다. 이런 상징성이 그대로 나무(나뭇잎)-물고기를 구성한다.

홍세연_꼬리_종이에 수채_122×122cm_2001

물 속에서 자유자재로 헤엄치는 물고기. 그 자유로운 생태는 삶의 부자유를 체감하는 작가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물고기는 곧 그의 회화적 분신이 된다. 하지만 그 물고기는 실제의 물고기가 아니라 나뭇가지(나뭇잎)로 조형된 물고기이다. 여기에 홍세연 작품의 묘미가 있다. 그는 물고기를 직유적으로 묘사한다. 나무(나뭇잎)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물고기를 조형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작품에는 나무(나뭇잎)를 통해서 물고기 형상을 만나고, 물고기 형상 속에서 나무(나뭇잎)의 생태를 확인하는 시각적인 즐거움이 있다.

홍세연_심장_종이에 수채_90×90cm_2003

그의 말에 따르면, 물고기 형상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다. 어느 날 우연히 주운 낙엽에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하고 그린 것이 녹색과 갈색의 물고기였다는 것. 여기서 갈색의 나뭇잎 물고기는 비록 나뭇잎이 낙엽이 되었지만(死) 물위에 떨어져서 생명수인 물과 만나고(生) 또 그런 과정을 통해서 초록의 나뭇잎으로 재생된다. 썩은 낙엽의 헤엄(動)은, 비록 썩었지만 어디로 향하는 듯한 그 모습은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보인다. 특히 나뭇가지로 조형된 물고기는 나뭇가지며 줄기가 실핏줄처럼 표현되어서 물고기의 구조를 비교적 세세하게 드러낸다(해부도처럼). 이들 물고기 그림 중에는 더러 토막 난 것들이 있는데, 이는 물고기의 대가리 부분이나 꼬리 부분만 확대한 것이어서, 강한 추상성을 띠기도 한다(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그것이 물고기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토막 난 물고기가 살려고 펄떡이듯이, 그는 부분을 통해서 물고기의 싱싱한 생명력을 클로즈업한다.

홍세연_자궁_종이에 수채_90×90cm_2003

흥미로운 사실은 또 있다. 물고기들이 한결같이 옆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물고기 그림뿐만 아니라 나무(나뭇잎)로 조형된 인물 그림에서도 그렇다. 일본영화 「러브레터」의 포스터 그림처럼 옆모습은 흔히 갈망의 상징으로 풀이된다. 이는 마치 뿌리는 대지에 두고 있지만 하늘을 향해 자라는 나무의 모습과도 통한다. 그것은 현실적인 삶의 조건에 순응하며 다른 세상을 꿈꾸는 작가의 갈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런가 하면, 그는 그림재료인 수채물감조차도 특별하게 사용한다. 그러니까 태아가 양수 속에 있을 때처럼, 편안함을 주기 위해 수채물감을 쓴다는 것이다. 물고기며 식물성인 나무(나뭇잎)를, 그것도 수채물감으로 그리는 건 작품의 맛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재료의 성질마저 상징적으로 활용한다. 나뭇잎의 초록색이나 갈색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듯이 말이다.

홍세연_optimist_종이에 수채_120×180.5cm_2001
홍세연_idealist_종이에 수채_162×390cm_1999~2003

홍세연은 이 같은 작업을 통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고 한다. 그런데 이런 작업이 자칫 퇴행적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는다. 지상의 포유동물이 현재의 모습을 갖기까지는 물고기에서부터 장구한 세월동안 진화를 거듭한 결과라는데, 그는 오히려 모태회귀 양상을 띠며 자꾸만 단순해지려 하기 때문이다. 모태회귀? 물고기의 이미지가 그렇고, 또 물고기를 그리되 물이 느껴지게(헤엄치는 듯 하게) 그리는 것들이 마치 양 수 속의 태아를 연상케 하기에 그렇다. 그는 태아가 엄마의 뱃속에서 안락한 자유를 누리듯이 편안한 마음의 쉼터를 찾아 나선 게 아닐까, 하는 감상을 낳는다. 하지만 이러한 회귀 현상도, 그가 죽음에서 생명을, 현실에서 다른 세상을 꿈꾼다는 점에서 부정적이지만 않다. 그것은 더 나은 삶을 모색하는 부단한 자기 성찰의 한 모습일 수 있음으로.

홍세연_adam_종이에 수채_23.5×18.5cm_2002 홍세연_eve_종이에 수채_95×55cm_1999

홍세연의 작품은 천천히 음미할수록 스며드는 은근한 힘이 있다. 내밀한 자기성찰이나 연애할 때의 감정 표현, 나무로 조형한 엄마의 손 등 작품마다 깃든 사연이 지극한 개인사임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시각적인 재미로 회화의 맛을 잃지 않는다. 즉 보는 즐거움과 생각하는 즐거움을 동시에 선사한다. 특히 중국의 선시(禪詩)를 차용한 다음 문안과 함께 저작한다면 가슴 가득 고이는 작품의 단물로, 싱싱한 생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을 것이다. ● 나무는 나무이고 물고기는 물고기이다. / 나무는 나무가 아니고 물고기는 물고기가 아니다. / 나무는 물고기이고 물고기는 나무이다. / 나무는 나무이고 물고기는 물고기이다. ■ 정민영

Vol.20030612a | 홍세연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