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과수원에서

이경수 사진展   2003_0624 ▶ 2003_0706 / 월요일 휴관

이경수_과수원-orchard_컬러인화_144×111cm_200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경수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3_0624_화요일_05:00pm

성곡미술관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02_737_7650

이경수는 4×5인치 컬러리버설필름 color reversal film을 넣은 핀홀카메라 pinhole camera 로 여러 해 동안 '아버지의 과수원'과 '과수원의 아버지'를 강박 관념적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작가는 핀홀카메라로 찍은 과수원의 꽃과 열매들, 그 풍경 속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시든 육체의 잠상 latent image들을 컬러네거티브필름 방식으로 현상 development했다. 다시 말해 현실과 동일한 음양과 색상으로 재현되는 컬러리버설필름 현상방식을 택하지 않고, 색상과 음양의 배치가 현실과 반대로 나타나는 네거티브이미지로 현상한 다음 프린트했다. 그 결과 이미지의 명암의 대비 폭이 커졌고, 색상의 채도는 비현실적으로 강화되었다. 푸른 하늘은 코발트색으로 빛났고, 민들레는 치자열매보다 더 노랗게 물들었다. 아버지 얼굴의 주름과 그의 몸에 새겨진 노동의 상흔은 사과처럼 검붉은 빛을 띠었고, 새봄의 도래를 알리는 배꽃은 흰빛으로 작렬했다. 작가의 핀홀카메라와 더불어 현실의 색상과 명암은 그 미묘한 연속성을 잃어버렸다. 각각의 색조는 그 곁에 있는 다른 색과 격렬하게 대립했고, 밝은 빛은 어두운 그림자를 불러들였다.

이경수_과수원-orchard_컬러인화_144×111cm_2000

'아버지의 과수원'과 '과수원의 아버지'는 아주 작고 작은 바늘구멍을 통해 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화면의 중심부는 밝지만 주변부는 어두웠다. 작가의 핀홀카메라는, 사진용어를 빌면, 4 ×5인치 필름을 포괄할 만큼 이미지 서클이 충분히 크지 않기 때문에, 네 끝 가장자리에 비네팅 vignetting이 생겼다. 그리고 너무나 적은 빛을 받아들이는 그의 핀홀카메라는 맑은 날의 경우에도 약 10초의 노출시간을 요구했다. 아주 예외적이지만 흐린 날 촬영을 시도할 경우 약 40초 이상의 긴 노출시간이 소용되었다. 따라서 핀홀카메라의 이미지 속에서 움직이는 모든 사물은 최소한 10초 동안 꼼짝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그 움직임 때문에 흐릿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꽃조차 그 움직임의 흔적을 드러냈으며, 팔순이 지난 아버지의 느린 동작도 그 움직임의 자취를 흐릿하게 보여줬다. 선명한 이미지를 위해서는 '과수원의 아버지'는 부동의 자세를 유지해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그가 늘 그랬듯이, 그가 일군 과수원을 움직이지 않고 응시하여야 했다. 노동과 세월에 지친 몸을 의식하고, 잃어버린 육체의 기운을 절감하여야 했다.

이경수_과수원-orchard_컬러인화_144×111cm_2000

그렇다면 컬러리버설필름으로 촬영한 '과수원의 아버지'를 네거티브필름의 방식으로 현상하는 작가의 선택은 무엇을 지시하는가? 작가는 무엇 때문에 현실의 색상과 명암의 계조도가 그 연속성을 상실하고, 이미지의 주변부가 어렴풋이 어둠에 잠기는 핀홀카메라로 아버지와 과수원을 응시했는가? 왜 그는 '아버지의 과수원'을 필름면에서 정확한 초점을 형성하지 못하고, 장시간의 노출이 필연적인 핀홀카메라를 고집했는가? 작가의 말에서 그 단서를 찾아보기로 하자. ● "나의 어린 시절은 과수원의 흙냄새와 함께 한 삶이었다. 어린 시절 먹거리의 낭만과 아름다운 꽃들의 기억도 있지만, 가시덩굴이 무성한 탱자나무, 날카로운 철조망으로 굳게 닫혀있는 울타리는가 안겨준 미묘한 감정도 있다. 어느 덧 고목으로 변해버린 과수원의 수목들은 늙으신 아버지의 초췌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 (......) 땅과 한평생을 살아오신 아버지의 모습을 과수원의 수목들의 생태에 견주어 표현하였다. 땅을 평생 지켜온 아버지의 몸, 손과 발이 과수목의 원줄기와 가지라는 관점에서 동일한 시각으로 보았다. 이는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에서 퇴색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과수원의 풍경이 하나로 비춰지고 있다. 과수 한 그루 한 그루 그 자체가 아버지의 수족과 흡사하고, 수목들의 삶은 아버지의 삶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이경수_과수원-orchard_컬러인화_144×111cm_2000

사진작가에게 있어서 과수원은 아버지의 은유 metaphor이며 환유 metonymy이다. 과수원은 그 형태나 속성에 있어서 아버지의 삶과 유사성, 닮음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은유이며, 과수원은 아버지의 육체와 물리적 인접관계 속에서 서로 접촉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의 환유이다. 아버지와 과수원은 은유와 환유라는 이중의 비유관계로 불가분 맺어져 있기 때문에 '과수 한 그루 한 그루 그 자체가 아버지의 수족과 흡사하고, 수목들의 삶은 아버지의 삶과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며, 작가의 '마음속에서는 퇴색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과수원의 풍경이 하나로 비춰지고 있다.' ● 과수원과 아버지가 은유와 환유의 관계를 맺으며 '하나로 비춰지는' 이러한 상황은 일종의 환각상태이다. 아버지의 손과 발, 눈길이 닿은 과수원의 모든 사물들에서 그의 형상, 그의 삶을 보는 것은 팔순을 넘긴 노부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의 정이 빚어낸 일종의 혼돈상태이다. 작가는 아버지가 접촉한 과수원의 모든 것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착란의 시선을 가진 셈이다. 이러한 환각의 시선은 현실의 색상과 명암의 계조도를 현실처럼 재현하지 못한다. 과수원의 민들레와 배꽃은 착란의 색채로 물들며, 아버지의 주름과 시름은 검붉게 얼룩진다. 긴 세월의 그림자는 어둠처럼 그의 몸을 감싸고, 나무 가지는 그의 몸처럼 거칠기만 하다. 이 착시의 색채와 형상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컬러리버설필름에 네거티브필름 현상방식을 적용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하늘은 그의 사라진 희망처럼 코발트빛으로 빛나고, 마지막까지 매달린 사과는 그의 시름처럼 붉게 타올라야 했다.

이경수_과수원-orchard_컬러인화_92×72cm_1999

연민과 죄스러움의 감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혼돈의 시선은 일반 카메라의 시선처럼 명확할 수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아버지의 대체물인 동시에 작가의 어린 시절을 간직한 과수원은 일반 카메라의 재현처럼 선명할 수 없는 법이다. 유년시절의 추억은 거의 언제나 흐릿하며, 기억의 주변부에는 회한과 그리움의 감정이 어둡게 드리우기 때문이다. 핀홀카메라의 흐린 기억의 영상만이 작가의 지난 시간과 노부의 흘러간 세월을 암시할 수 있다. 핀홀카메라가 아니면 유년시절도, 과일나무에 중첩된 아버지의 이미지도, 그의 몸이 간직하고 있는 과수원의 이미지도 떠올릴 수 없다. 핀홀카메라와 더불어 5cm까지 다가가 '가시덩굴이 무성한 탱자나무, 날카로운 철조망으로 굳게 닫혀있는 울타리'를 응시할 때만이 그의 유년시절은 되돌아왔다. 더는 다가갈 수 없는 거리까지 다가가 핀홀카메라와 함께 과일나무가 된 아버지의 육체와 아버지의 육신처럼 보이는 과일나무를 10여초 동안 바라볼 때만이 작가는 늙은 농부의 아들이 될 수 있었다.

이경수_과수원-orchard_컬러인화_92×72cm_1999

따라서 이경수에게 있어서 핀홀카메라는 단순한 재현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과수원의 풍경을 통해 작가의 유년시절을 되찾는 도구이며, 시든 아버지의 육체를 통해 그의 존재의 기원을 탐구하는 도구이다. 과수원의 초목과 아버지의 육체에 무한히 다가갈 수 있고, 그 대상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바라보게 만드는 핀홀카메라만이 '과수원의 아버지', '아버지의 과수원'을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에 부합했던 것이다. 일반 렌즈의 최단 초점거리인 20-30cm로는 작가의 몸이 비롯된 존재의 근원에 도달할 수 없었고, 일반사진기의 60분의 1초, 125분의 1초의 응시시간으로는 어린 시절의 '미묘한 감정'을 다시 맛볼 수 없었다. 사진기의 기원인 핀홀카메라만이 그의 존재의 뿌리와 오랜 기억을 재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렌즈도, 뷰 스크린도, 셔터장치도 없는 기원의 사진기만이 작가의 추억과 부성애, 그리고 그가 알지 못하는 정신의 상처를 일깨울 수 있는 도구였다.

이경수_과수원-orchard_컬러인화_92×72cm_1999

사실 이경수의 사진은 사라진 유년시절과 시들어 가는 아버지의 육체를 오랫동안 보듬으려는 시도이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사진이라는 기억의 장치로 영원히 붙들려는 기도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불가능한 시도 앞에서 아쉬움과 슬픔의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핀홀카메라와 더불어 그는 영원히 순환하는 계절 속에서 시들어 가는 노부의 삶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그는 만개한 배꽃과 붉은 사과가 안겨주는 격렬한 회상과 회한의 감정을 억누르며, 삶에 지친 육체를 말없이 받아들이는 노부를 말없이 수긍할 뿐이다.

이경수_과수원-orchard_컬러인화_92×72cm_1999

2002년 6월 프랑스의 남부도시, 몽펠리에 Montpellier에서는 한국의 사진작가 15명의 초대전이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유력지「르 피가로 Le Figaro」는 뒷짐을 지고 배꽃이 만개한 파란 하늘의 과수원을 바라보는 노부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다음과 같은 해설을 달았다. "이경수의 전시된 사진은 언뜻 보기에는 대단히 평온해 보이지만, 천천히 살펴보면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알 수 없는 고통을 솟구치게 만든다. (...) 흙을 움켜쥐는 노부의 손에는 어쩔 수 없이 사라지는 모든 것 앞에서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격렬한 고통의 상처가 새겨져 있다." 이경수의 사진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알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우리가 그의 사진에서 경험하는 '격렬한 고통의 상처'는 '아버지의 과수원'과 '과수원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사랑을 아무런 말없이 홀로 되새기는 작가의 시선에서 기인한다.

이경수_과수원-orchard_컬러인화_92×72cm_1999

그리고 아들의 침묵과 응시를 침묵으로 쓸쓸하게 받아주는 노부의 헤아릴 길 없는 사념에서 비롯된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이 말없는 연민이 과수원 전체를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격렬한 고통의 상처'에 휩싸이게 만든다. 이 두텁고 둔탁한 침묵이 삶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전율케 한다. 과수원 울타리의 탱자나무 가시와 날카로운 철조망처럼 우리의 삶에 대한 의식을 아프게 찌르고 만다. ■ 최봉림

Vol.20030624a | 이경수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