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그 섬세한 감성언어

이해은展 / LEEHAEEUN / 李海恩 / painting   2003_0627 ▶ 2003_0708

이해은_minuet_캔버스에 유채_132×150cm_2003

초대일시_2003_0627_금요일_05:00pm

갤러리 아티누스 서울 마포구 서교동 364-26번지 B1 Tel. 02_326_2326

원작보다 뛰어난 각색이 없고 일편보다 뛰어난 속편이 없다는 말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역사의 흐름과 맞물려 눈부시게 발전하는 기술이 있고 축적된 경험이 있건만 왜 옛 원작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역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기교가 아닌 내용이며 화려한 기술이 아닌 솔직함이기 때문이다. 기교로 가득 채운다면 보는 이의 눈을 현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교의 과잉은 결국 내용자체까지 삼켜버린다. 정말 좋은 기교는 작가의 의도를 과장 없이 정확히 담아 내는 데서 비롯된다. 지극히 비논리적이지만 그래서 캔버스를 가로지는 하나의 선이 보기 좋은 이미지로 가득찬 수백 개의 선보다 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이처럼 뉴턴 역학의 합법칙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바로 미술이 갖고 있는 매력이다. 여기 그 비논리적 매력에 흠뻑 빠져 춤추는 붓에 몸을 맡기고 있는 젊은 작가가 있어 소개한다.

이해은_Variation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2_부분
이해은_Variation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2

선으로 이야기하는 작가 이해은. ● 흔히 선은 이지적인 영역을 색상은 감성적인 영역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이해은에게 있어 선은 색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감성을 표현하는 절대적인 수단이다. 이와 같은 선의 역할변화는 아마도 클래식을 무척 좋아하는 그의 음악적 감성에서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마치 오선 악보를 타고 흐르는 악상 기호들의 경쾌한 움직임처럼 작가의 붓은 탄력적으로 움직인다.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장엄하게 때론 수줍은 듯이. 그때그때의 감정의 기복이 그대로 화면에 묻어 나온다. 그래서 화면은 하나의 색깔을 띠지 않는다. 마치 여러 사람의 감정이 한 화면에 모여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종종 나의 모습도 보이고 너의 모습도 보이고 제3자의 모습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시간대에 서로 다른 모습과 감정상태를 보이고 있었던 작가가 만들어 낸 다양한 형태의 분신들이다. 서로 이질적인 감정상태를 보이는 선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며 만들어 내는 긴장감은 부조화와 조화 사이에서 묘한 쾌감을 자아낸다.

이해은_Variation-2_캔버스에 유채_72.5×91cm_2002
이해은_minuet-2_캔버스에 유채_144×164cm_2003

회화란? 그림이 아닌 솔직한 느낌의 발산! ● 순간 순간의 솔직한 감성에 충실하기를 고집하는 젊은 작가 이해은에게 있어 하나의 선이 갖는 의미는 그 누구보다 절실한 것처럼 보인다. 작품을 그리는 동안 뒤로 물러나기를 수십 번 반복하며 언제 멈추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무엇을 그릴까? 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 그려 넣을 것인가? 의 문제가 더 절박해 보인다. 이러한 작가의 고민은 그가 그리고자 하는 것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순간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들어내는 형상은 그것 자체로 내용이면서 동시에 감정을 담아 내는 형식이요 수단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무엇에 대한 그림이 아닌 어떤 느낌의 발산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보다 정직하게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유기체적 선의 움직임을 이용한다. 이는 그가 그리고 있는 대상이 비록 의자, 실내 풍경과 같은 무기체의 화학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껍질에 유기체적 선을 입혀 감정이 살아있는 생명체의 호흡을 불어넣어 주기 위함이다. 이러한 그의 전략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딱딱한 직선과 부드러운 곡선 등으로 추상적인 느낌만을 전달하고자 하는 일차원적인 표현방법에서 탈피해 이해은은 보다 복잡한 감정구조를 가지고 있는 유기체적 구조 속에서 그의 느낌을 발산시키기 위한 해법을 발견한 것이다.

이해은_empty_캔버스에 유채_100×80.5cm_2003

색은 선처럼 선은 색처럼 ● 색을 사용할 때는 선처럼 섬세하게 반대로 선을 사용할 때는 색처럼 풍부하게 사용하며 굳이 선과 색을 구별할 필요도 없이 비교적 정확하게 작가의 내면세계를 표현해 낸다. 이해은의 작품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예 처음부터 인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 그래서 일까? 작가는 혼자 남겨진 공간의 우울한 상황을 형광 빛의 밝고 화려한 색상과 자유롭게 꿈틀대는 유기체적 선들을 이용하여 중화시킨다. 표면적인 화면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화려함과 생동감 이면에는 어쩌면 홀로 서기를 위해 숨막히게 달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지 않을까? 아직도 작가 이해은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작품의 상당 부분에서 보이고 있는 하얀 여백이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뛰기를 기다리는 모습처럼 재촉하고 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들춰보기 위해 다시 한번 선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따라가 봐야 할 것 같다. ■ 이대형

Vol.20030702b | 이해은展 / LEEHAEEUN / 李海恩 / painting

@ 통의동 보안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