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치유]

김은진 회화展   2003_0702 ▶ 2003_0708

김은진_The Portrait_종이에 채색_177×80cm×2_2001

초대일시_2003_0702_수요일_05:00pm

인사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29-23번지 Tel. 02_735_2655

영성을 지닌 인삼과 인형 ● 깨진 화병과 거울, 사기인형 등의 조각을 모은 후 본래의 육체를 안타깝게 추억하면서 그 파편들을 조심스레 붙여놓은 일련의 작업(Healing, 치유)들을 선보였던 김은진은 오랫동안 머리 속에 맴도는 작가였지만 그 후로는 그녀의 작업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수업시간에 그녀의 작품을 가지고 슬라이드수업을 하며 '치유'에 대해, 상기의 고통에 대해 그리고 이미지와 관련된 여러 말들을 해왔다. 그런 시간이 꽤 지난 후 이렇게 느닷없이 다시 그녀의 근작과 마주했다. 4,5년의 공백을 뚫고 나온 작업은 장지에 채색물감으로 공들여 그려진 그림들이다. 그제서야 그녀가 동양화를 전공했음을 깨달았다. ● 세로로 길게 드리워진 종이 위에 고관절 인형과 인삼이 텅 빈 배경을 뒤로하고 커다랗게, 거의 등신대 크기로 그려졌다. 단색으로 단호하게 칠해진 배경은 인형과 인삼의 육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인삼과 인형은 의사인간, 유사인간형이 되어 두루마리 형식의 프레임 안에 꽉 차게 들어 앉아있다. 보는 이의 시선은 전적으로 그 대상과 마주한다. 그것 이외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빼앗길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김은진_The Portrait_종이에 채색_175×140cm_2001

창백한 표정을 지닌 서양식 고관절 여자인형과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있거나 광배를 두르고 보살의 몸에 걸쳐진 영락 같은 붉은 구슬로 이루어진 목걸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인삼(人蔘)이 그려져 있다. 그 인삼은 또한 차도르나 장옷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기도 하고 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포즈, 두 개의 인삼이 남녀가 엉켜있듯이 서로 얽혀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람의 몸과 살을 닮은 인삼의 육체에는 민화에서 흔히 보는 목단 꽃 그림이나 복(福), 수(壽)자, 구름문양 등이 잔뜩 치장되어 있다. 간혹 어떤 것들은 머리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거나 응고된 체 매달려있다. 나로서는 그런 형태는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피에타를 그린 전형적인 도상과 몸을 연상시켜준다. 서구의 종교화의 전통에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시각적 효과의 극대화가 놓여져 있다. 이른바 성혈(聖血)이 그것일 것이다. 그리스도 스스로 자신의 살과 피를 빵과 포도주로 비유하기도 했는데 이 작가는 기독교인으로서 그 피와 살의 냄새를 모든 일상에서 몸으로 맡고 있어 보인다. 그런 면에서 종교적이고 비가시적인 것들에 대한 믿음이 유난히 강하다는 인상이다.

김은진_The Portrait_종이에 채색_177×80cm_2003 / 177×70cm_2002 / 177×80cm_2001

그림과 관련된 몇 마디 말을 나누는 과정에서 작가 자신은 이러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궁리하기보다는 그저 눈앞에 떠올라주는 이미지를 따라 그려간 것뿐이라고 했는데 나로서는 그것 역시 설명하기 힘든 모종의 종교적 체험, 영적 만남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여성작가들이 남성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교적인 성향, 그러니까 영성이 유독 강하다. 특정 종교의 믿음이나 신자라는 것보다는 모든 일상적 체험에서 여성들은 본능적 느낌, 감각, 몸으로의 파악과 적응, 영감과 초월적이고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확신에서 돋보인다. 그래서인지 상당수 여성 작가들의 작업에서 질펀하고 비릿한 종교적 내음을 맡는 편이다.

김은진_The Portrait_종이에 채색_75×177cm_2002

김은진의 그림에도 죽음과 희생, 죄사함이라는 종교적 주제가 슬쩍 번진다. 그런가하면 흡사 불교나 무속 등에서 만나는 자기구원과 기복 신앙적인 절실한 마음의 한 자락이 공들여 표상 되고 있음도 본다. 여성으로서의 몸과 그 몸에서 비롯된 영적 체험이나 감각으로 일상을 살아내면서 그 안에서 자연스레 포착된 이미지를 그림으로 올려놓았다. 그 그림은 또한 우리의 전통적인 미의식과 주술성으로서의 이미지의 특성과 사례를 흥미롭게 응용한 결과이다.

김은진_The Portrait_종이에 채색_175×135cm_2003

종교나 믿음, 예술활동 역시 자기 구원이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주는 과정의 하나다. 미술은 마술이었고 주술이었다. 예술적 활동이 영혼과 교감하는 활동이라면 보이지 않는 세계,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잠재된 세계, 동시에 한 개인의 내면 속에 있지만 우주 전체가 함께 호흡하는 세계를 드러내고 그 세계를 교감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의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일종의 주술사, 마법사이자 무당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기도 하고 동시에 인간과 세계가 처한 질병을 영적으로 치유하는 일을 하는 것이 예술가다. 김은진은 자신의 영적 감수성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자기가 깨닫고 만난 이미지를 우리 눈에 보이게 한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보여지지 않았던 것들에 몸을 만들어준다. 그것을 통해 비합리적인 소통 가능성의 여러 갈래의 길과 힘을 보여준다.

김은진_The Portrait_종이에 채색_80×177cm_2003

인간의 몸을 흉내낸 인형에 목숨을 불어 넣어주고자 하거나 인삼의 형체에서 사람의 몸 혹은 아프고 병든 몸, 죽어 가는 몸을 떠올리고 이를 차분하게 관조하듯이 들여다보면서 작가는 그 육체에 복 복 자와 목숨 수 자를 부적처럼 써주었다. 오래 살고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목단 꽃도 풍성하게 문신 마냥 둘러주었다. 아프고 신음하는 몸을 눕히고 베개를 베어준 후 그 피를 시트가 다 받아내고 있는 풍경도 주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을 치유하고 보듬고 보살피고자 한다. 여기서 종교와 예술은 홀연 겹쳐진다. 바로 그런 작가의 마음과 시선에서 태어난 이 인형과 인삼이 더없이 강렬하고 음산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림만의 또 다른 힘을 만난다. ■ 박영택

Vol.20030703a | 김은진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