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ellow Memory

이태훈 사진展   2003_0813 ▶ 2003_0819

이태훈_Danny #3_컬러인화_20×16"_1995

초대일시_2003_0813_수요일_06:00pm

인사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29-23번지 Tel. 02_735_2655

무기표의 신호와 일상_Les signes d'insignifiance et la banalite ● 카메라에 의한 모든 진술은 어떤 이미지든지 여하간 인간 행위의 결과라는 사실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보는 관점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사진 읽기들을 경험할 수 있다. 사진 이미지의 개념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볼 때, 사진은 근본적으로 크게 두 가지 개념적 본질에서 이해된다. 한편으로는 결과로서 출현한 이미지를 이해하는 방식인 아날로그적(analogue)인 본질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결과가 아닌 행위 그 자체에서 원인적인 것을 이해하는 지시적(digital)인 본질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시각적으로 출현한 이미지의 진술을 사진적 행위(l'acte photographique)라고 하고 또 그러한 진술 체계를 사진적 장치(le dispositif photographique)라고 한다. ● 우선 아날로그 본질은 찍혀진 대상과 그 지시대상과의 유사관계(코드)에서 사진을 이해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어떤 상황이 재현된 사진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흔히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것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메시지를 숨겨 놓았을까?"라고 자문하면서 마치 암호를 풀 듯이 제시된 문제를 해석하려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작가도 관객도 아닌 단지 예술적 결과로만 나타난 사진 그 자체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어떤 양식(bon sens) 또는 규정된 의미로부터 재현(re-presentation)에 일치하는 모든 것을 사진 예술로 이해하는 사고들을 말한다.

이태훈_Joyce #5_컬러인화_20×16"_1997

이와 같은 사진적 분석은 결과물로부터 방출되는 메시지의 일방적인 "발신"에 있는데, 이럴 경우 사진의 대상은 거의 대부분 특이함과 이상함에 관계한다. 그래서 흔히 사진가는 그의 필름에 예외적인 것, 드문 것, 예견치 않은 것, 결코 재현되지 않을 사건-이미지 등 언제나 일상적인 것들과는 다른 특이한 것들을 담는다. 그것들은 마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처럼 사진가가 그 곳에 그리고 그 순간에 있었다고 우리를 믿게 한다. 그래서 좋은 사진은 사진가가 계속 숨어서 지키는 대상과의 좋은 만남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사진가는 보이는 세상에서 가장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암시적인 이미지 즉 특별한 의미를 지칭하는 상징-이미지를 만드는데, 그때 좋은 사진은 변사의 웅변과 같은 스투디움으로 읽혀지는 표명적 사진으로 전혀 관객의 주관적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흔히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쉽게 분류하기도 하지만 여하간 이러한 사진들을 "보여주는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태훈_Joyce & Danny #4_컬러인화_20×16"_1998

그러나 "감추는 사진"은 사진의 지시적인 본질에 관계한다. 이러한 개념은 적어도 방법적인 측면에서 유사성과 재현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찍혀진 대상과 그 지시대상(혹은 작가의 의도) 사이의 관계가 상징이나 코드로 이해되는 유사관계가 아니라, 단지 물리적 원인관계로 이해되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사진으로 재현된 어떤 상황 앞에서 관객이 가지는 의문은 "왜 이 장면을 찍었을까?" 또는 "어떠한 감정의 동기가 작가로 하여금 이 장면을 재현하게 했을까?" 라는 원인성에 관계한다. 사실상 오늘날 사진 이론적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으로 이해되는 것은 "사진에 있어 우리는 그 구성적인 방식 밖에서, 그러한 이미지를 있게 한 것 밖에서 더 이상 이미지를 생각할 수 없다 (...)"_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Nathan, Paris, 1992, p. 57._라는 것이다. 결국 사진은 정답 없는 상황적 진술일 뿐인데, 대부분의 경우 언어가 재현하는 영역밖에 존재하는 그리고 유일하게 상황으로만 지시할 수 있는 어떤 무엇이 바로 작가의 진정한 메시지인 셈이다. 또한 관객의 입장에서 사진 읽기는 더 이상의 의미조합이나 논리적 서술구성이 아니라, 물론 모두에게 공통된 코드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제시된 상황으로부터 자신의 경우로 환원된 상황적 메시지에 있다.

이태훈_Joyce & Danny #7_컬러인화_16×20"_1996
이태훈_Joyce & Danny #8_컬러인화_16×20"_1995

사진을 찍는다는 것, 그것은 보이는 세계에서 자기 과시적이고 장관적인 것 또는 모두에게 공감되는 어떤 새롭고 특이한 의미만을 보여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지시적인 사진은 가장 평범하게 시행된 지극히 진부한 사진이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어딜 봐도 전혀 특이한 것이 없는 닮음의 극단적인 평범 속에서 나타나는데, 그 이면에서 무엇인가 있음직한 형이상학적인 "무엇"을 감추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는 문화적 코드들은 평범과 일상에서 의미적으로 돌출된 것(studium)인 반면, 있음직한 "무엇"(무의미)은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무감각과 무감동 그리고 무의미(punctum)이기 때문이다. 사진에 있어 이러한 내재된 형상들의 유일한 지시는 그것이 연출이든 아니든 사실상 그 상황적 진술뿐이다. ●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여기 보여진 작가 이태훈의 사진들은 의심할 바 없이 지시적인 사진들이다. 여기서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지극히 평범한 이미지들 예컨대 "아이들 사진" 시리즈는 이미 오랫동안 의미-메시지에 익숙한 우리들의 눈으로 볼 때 "어떤 심오한 철학이나 해석학적 메시지를 숨겨 놓았을까?"라는 의문 속에서 단지 수수께끼로만 나타난다. 사실상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들은 더 이상 관객에게 어떤 해석학적 분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경우의 상황 제시일 뿐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사진의 지시대상은 우선 작가가 경험한 일상의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의 지표(index)이다. 굳이 말하자면 어려운 이국 생활 속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아이들에 대한 교차되는 미묘한 감정들의 혼돈이랄까? 그런데 이러한 인상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구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언제나 뒤엉킨 감정의 실타래와 같이 뒤범벅된 규명 불가능한 감성의 음색(tonalite)이다.

이태훈_Danny #1_컬러인화_16×20"_1996

이러한 신호들은 궁극적으로 이미지가 제시하는 상황으로부터 유추된 관객 자신이 과거 경험한 상황적 느낌이나 인상의 연상으로 환원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 보면 작가가 보여주는 아이들 사진은 관객에게 이미지가 담고 있는 어떤 있음직한 해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무의식적으로 관객 자신의 기억을 자극하는 일종의 지시소(deictique)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사진으로 찍혀진 상황들이 비록 관객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적인 경험이 아니라 하더라도, 관객이 그것들을 자신의 경험적 상황의 연장선상으로 돌려놓을 때, 갑자기 언제부터인가 슬며시 잊혀진 숱한 가족의 애환과 삶의 아쉬움이 마치 영화의 장면들처럼 지나갈 것이다. 이와 같은 관객 자신의 경험으로 침수되는 기억과 회상의 환유적 확장 ! 바로 여기에 사진의 진정한 힘이 있는 것이다. ● 결국 이러한 이미지들은 단어가 주는 의미들의 단순한 조합이 아닌 어떤 감정의 여운을 주는 일종의 신호의 순수 서정시로 이해된다. 이것들은 사실상 사진 읽기에서 의미와 논리를 배경으로 하는 우리의 해석학적 서술구성을 완전히 전복시키고 있다. 굳이 오늘날 후기 구조주의에서 "평범 미학"의 발견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진이 외시하는 평범한 것들은 오히려 의미의 빗장을 벗기는 의도 그 자체이며 동시에 그 영역을 벗어난 탈선 그러나 겉은 없고 알맹이만 부유(浮流)하는 무기표의 신호이다. ■ 이경률

Vol.20030810a | 이태훈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