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치와 한잔

시월클럽 첫번째 파티_김윤환 영상.퍼포먼스展   2003_0819_화요일_08: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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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819_화요일_08:00pm

김윤환 퍼포먼스_레몬_08:00pm~08:30pm 미국과 선진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와 세계무역기구의 소비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의 다큐영상과 함께 작가의 퍼포먼스 실연

꽁치와 한잔_08:30pm~10:00pm_김윤환 작업에 대한 여러 생각들

주최_시월클럽 / 후원_이미지 속닥속닥

까페시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 367-2번지 Tel. 02_336_8406

'내가 안주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안주가 되려한다. ' 나는 내년이면 나이 40을 맞이하는, 사회적으로 봤을 때는 퇴출을 준비해야 하는 그런 나이이나 화류계에서는 아직도 청년작가군에 속하는 한 예술가에 대해 말하려 한다. 김윤환 Kim Youn Hoan_1965년 대구생_84학번 중대 조소과_86학번 홍익대 회화과_개인전 3회(한국1, 프랑스2)_다수의 단체전_세 번의 아트 페스티벌 참여_주로 사회 정치적 색채의 작품경향을 띤 회화,사진,설치,비디오 영상,퍼포먼스,조각 등으로 작품활동_작품활동 이외로는 서울과 대구에서의 입시미술학원 강사 (10년 간), 시민미술단체 '늦바람' 창립 (95년), 환경운동연합 상근활동가(97년, 지구의 날 예술감독), 임종석 국회의원 선거운동본부 인터넷 부장, 민주당성동지구당 인터넷 부장(99년-2000년), 홍대미대 학생회 활동, 총대의원회, 여러 개의 사상학습T운영, 미술학생회 운동, 민족통일애국청년회 회원-늦바람을 민애청의 소모임으로 시작하여 독립단체로 만듦, 두벌갈이, 민미협, 데달, 알터나시옹, 갤러리 소토도 멤버. 이 모든 것을 대충 뭉뚱그려서 남들 보기에는 백수이나, 스스로는 예술가인 이 정도가 김윤환의 작은 이력이다.

김윤환_이 나무는 어떤 나무를 베어 만들었는가_공공미술 프로젝트, 쁘와띠에_2002
김윤환_소비되는 생명_퍼포먼스, 쁘와띠에_2002

가난한 고학생으로 홍대앞과 대구를 오가는 입시학원 강사를 전전하며, 생계와 학비를 벌어야 했던 늦깎이 복학생인 그에게 88년의 등록금 투쟁의 동참은 자신의 현실에 충실한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발을 담그기 시작한 학생운동은 자연스럽게 사회운동으로 이어졌다. 그가 95년 창립한 시민미술단체 '늦바람'은 80년대 광주시민미술학교, 두렁, 90년대 노미위의 '현장정신'과 그 맥을 같이한다. 미술의 진정한 주인은 시민이다'라는 기치아래 예술문화의 소비자로써의 대중이 아닌 문화의 생산과 소통, 향유의 일 주체로서의 대중 의식을 각성시키며 미술수업, 야외스케치, 시민미술행사, 시민단체와의 연대, 미술교사, 인터넷 홈페이지, 미술소식지 발간 등의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일상과 예술,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구분을 부정하며, 인간의 모든 창조적인 활동은 그것이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결과를 수반하는 것이든 그 '창의성'으로 인해 예술로 규정할 수 있다고 선언한 요셉 보이스의 회고전 '모든 사람은 예술가' 이 94년 파리 뽕삐두 센터에서 개최될 즈음과 비슷한 시간에 늦바람이 시작되고 있었다. ● 그의 관심은 순수하게 미학적인 실험보다는 미술의 사회적인 기능에로 크게 기울어 있다. 전쟁으로 인한 개인과 사회의 정체성 상실과 현대사회의 인간소외, 환경파괴. 세계화문제등은 그의 작품에서 소재 적인 차원으로 등장하는 충분조건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품이 성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이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창조성이 의미하는 바는 변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외적인 사회제도에 규정된 것부터 인간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창조성을 말한다. ● 2001년 1월1일부터 2003년 6월 22일까지, 꼬박 2년 반을 프랑스에서 보내고 있을 때, 한국사회는 참으로 다양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비장함이 사라진 광장의 점거, 낮은 수위의 공감대가 이끌어낸 촛불시위, 유행과 상식이 되어버린 반미의식,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등등의 면면을 인터넷이라는 작은 창을 통해서만 접해야 했던 그는 갈증을 느꼈다. 참여하고, 간섭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한국적 현실에서 비행기 13시간을 타고 가야 하는 낯선 땅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이 비 오는 파리의 마들렌 광장에 10개월된 딸아이 유모차를 세워두고 '피흘리는 성조기'를 그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김윤환_게릴라 전시_퍼포먼스, 쁘와띠에_2001
김윤환_ANTI-WTO_퍼포먼스_2002
김윤환_블록깨기_영상_2003

그렇게 살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이제 한달 반이 좀 넘었다. 뚜렷한 대표작품도, 빛나는 명함도, 재산도 없거니와, 작업실도 없으며, 오라는 갤러리도 없다. 이러한 때에 그는 비슷한 시기를, 비슷한 경험으로 살았던 예술가에게 낮은 고백을 던지며 그 시작점을 삼고 있다. 조금은 부끄러울 수도, 조금은 넘사스러울 수도 있는 별것 아니었으나, 치열했던 자신의 삶을 낮술한잔 마신 얼큰함으로 이제 좀 열어 보이는 것이다. 나 39살, 지지리도 치열히 살았으나 돌아보니 내세울 만한 작품하나 없수다. 그러나 시대를 핑계되기에는 그 시대를 너무 사랑했고, 내 개인 능력을 핑계대기에는 그 노력이 만만치 않았소. 그냥 지금 이 모습 이대로 그대들 앞에 서 있수다. 삐쩍마른 꽁치 안주가 되어, 내 그대들의 술상에 올라갈 수 있다면 기꺼이 안주가 되어도 좋소. 자- 한잔씩들 하시지요. 나도 얼렁 한잔하러 가야겠다. ■ 김현숙

Vol.20030817b | 시월클럽 첫번째 파티_김윤환 영상.퍼포먼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