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e

노암갤러리 기획 정현 조각展   2003_0827 ▶ 2003_0909

정현_공유ⅴ_철,혼합재료_71×21×21cm_2003_부분

초대일시_2003_0827_수요일_05:00pm

노암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02_720_2235

정현의 철조 세계 ● 프랑스의 개성적 대중가수였던 게인즈부르그가 1950년대 후반에 만들고 부른 샹송 중에는 릴라역의 개찰원(Poin onneur des Lilas)이라는 것이 있다. 파리 지하철의 노동자인 노래 속의 주인공은 온종일 지하에서 승객들이 내미는 티켓에 구멍 뚫는 일을 반복하는데 게인즈부르그는 이 인물에 자신을 빗대어 반복적 음율과 가사로 엮어낸 것이다. "나는 릴라역의 개찰원이라네"로 시작하는 그의 노래는 팝아트의 바탕에 째즈풍의 멜로디를 곁들여 독특한 서정을 일으킨다. 또한 제한된 일상 속에서 삶의 리얼리티를 섬세하게 추적하는 예술가의 태도가 잘 반영되어 필자의 기억에 특별히 저장되어 있다. ● 정현의 작업실에서 필자가 문득 프랑스의 옛 가수를 떠올리게 되었던 것은 아마도 사방에 널려진 작가의 작업 곳곳에서 일상과 반복 그리고 현실과 탈출의 욕망 등의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작가 자신이 작품에 명명한 '한계상황'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일상적 리얼리티를 직면하면서 작가가 꿈꾸는 역설적 세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세계의 껍질을 하나씩 더 벗기고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팝아트나 옵아트 그리고 미니멀리즘에 이르는 다양한 조형원리들과 마주치게 된다. ● 그러나 역설적으로 정현의 철조작업은 현대미술 영역의 그 어느 장르로 한정되어 있지 않다. 이는 그의 작업을 평가할 하나의 비평적 저울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다양한 양식의 혼재는 특정한 미학적 기준을 거부하는 작가의 태도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작품제작 행위를 둘러싼 계보적 의미에 대한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각 세계에는 장인적 철저함과 창작을 위한 의지가 배어나 있다. 무의미와 전문성의 만남이라. 우리는 이러한 작가의 예술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사각의 티켓에 구멍을 뚫는 파리 지하철의 개찰원처럼 그가 실행하는 반복적 행위 속에는 어떤 노동과 삶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작가가 실행하는 작업형식의 면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정현_hole200306_철_90×90cm_2003
정현_hole200308_철_90×90cm_2003_부분

정현이 사용하는 재료는 철판, 납, 아크릴 등이며 때로는 전구나 형광등 빛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간의 작업들을 보면 개스통, 파이프, 철망, 텔레비전과 같은 오브제들도 작품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매체로 등장하고 있다. 대부분이 현대조각의 영역에서 낯익은 재료들이자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사물들이다. 작가가 흙이나 나무 그리고 청동에 대한 재료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관심은 아직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영향을 행사하는 철재로 쏠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녹슬거나 기름칠된 표면에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매체로 근대적 삶을 직조해온 친근감이 있다. 구체적 형상이 제거된 매체만으로도 그의 철조 작업은 일상성과 시간성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 이번 개인전에 선보이는 작품의 재료는 역시 철재이며 대략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고 있다. 하나는 개스통이나 파이프 등의 오브제를 선택해 집합적 구조로 결합하거나 임의로 조형화 시킨 입체작업 시리즈이고 다른 하나는 철판 위에 구멍을 뚫어 놓은 평면적 작업 시리즈이다. 우선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입체작업은 조각대가 없으므로 위협적이지 않고 편안하다. 하지만 축성된 공간으로서 전시장 내에 설치된 그의 작업은 진단과 평가의 대상으로 다가오게 된다. 전시된 오브제는 그것을 둘러싼 공간의 힘에 의해 의미의 전치상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며 여기에는 철조 오브제의 물질과 미니멀적 대상성이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정현_hole200313_철_124×242cm_2003_부분
정현_hole200313_철_124×242cm_2003

한편 평면적 작업은 이번 전시회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것인데 이 시리즈에 대한 작가 자신의 태도는 의욕적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작품에 특정한 형상이나 상징성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지고 보면 그의 평면적 작업은 사각의 캔버스 구조를 지닌 바탕에 공간을 뚫어 조각적 공간이 추가되어 있다. 평면과 입체의 합일이 그의 작업에서 시도되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현대미술사를 보면 3차원의 공간을 품은 평면구조는 루치오 폰타나가 일군 조형적 성과였다. 정현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공간이란 감각적이 아니라 옵아트를 연상케 하는 구성적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 여기서 평면적 작업의 기법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사용하는 3mm 두께의 철판 중심에 원형 구멍이 반복적 패턴으로 절단되어 있어 전통적인 화면구조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작업이 기성 오브제가 아닌 그림처럼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중심과 주변으로 구분된 화면구성의 원리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화면에 어떠한 형상이나 상징적 이미지도 표현하지 않음으로 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화면의 구조에 직접 빠져들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작업에 매력을 느낀다면 그것은 재단용 펀치로 찍어낸 구멍의 힘과 그것이 배열된 기하학적 질서 그리고 철재가 지닌 물질성에 근거한 것이다. ● 작가의 전문적 작업에 담긴 무의미의 의미 이외에도 작가의 평면적 작업에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불을 이용한 금속조각의 단조(鍛造) 과정이다. 작가는 절단된 철판의 조각들을 다시 사용하여 화면의 조형요소로 재등장시키는 것이다. 이른바 높은 온도의 불로 가열하여 원형 조각을 순간적으로 유연하게 하고 그것을 철봉 바탕 위에 올려놓은 뒤 두드려 원하는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그의 작업은 평면에서 원형 조각을 분리시키고 그것의 외형을 변형시킨 뒤에 다시 원래의 구멍을 덮는 식의 작업으로 설명된다. 이때 망치와 집게 그리고 산소용접기는 창조적 작업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정현_hole pattern s2_철_35×50cm_2003
정현_한계상황ⅰ_철_220×42×34cm_2003

결론적으로 우리는 정현의 작업에 가하는 열정과 실행이 지향하는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된다. 이에 대해 작가 자신은 겸연쩍게 웃으면서 말한다. "나는 구멍 뚫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구멍을 다시 덮는 일이기도 하다. 공원의 땅을 파헤치고 다시 덮은 뒤 개념의 완성을 시도한 올덴버그 처럼 그의 작업은 철판을 뚫고 다시 채워 넣음으로서 무의미한 의미를 완성시키려는 시도를 반복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이제 필자가 그의 작업에서 게인즈부르그를 떠올리게된 사연을 알 것 같다. 지하철의 개찰원이 티켓에 구멍을 뚫음으로서 승객들을 소통의 영역으로 출입을 허락하는 것처럼 정현의 예술은 미적 무관심과 장인적 엄격함으로 연출된 작가의 철조 세계로 진입하기를 허락하고 있다. 예술의 노정에서 작가는 차별화된 조형적 성과들을 거두고 있지만 어떤 역에서 내리고 갈아타야 할 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들 관객의 몫이다. ■ 김영호

Vol.20030825b | 정현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