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단면이 길어 올린 삶이라는 연못

윤명순 조각展   2003_0827 ▶ 2003_0908

윤명순_허상의 풍경_흙,동선_50×35×15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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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827_수요일_05:30pm

갤러리 아트사이드 서울 종로구 관훈동 170번지 Tel. 02_725_1020

작가 윤명순이 오랜만에 보여주는 이번 전시에서는 흘러감과 멈춤, 유연과 경직, 빠름과 느림, 복수와 단수, 순간과 영원, 차있음과 비어있음,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실체와 그림자 그리고 정주(定住)와 이동 같은 상이하고 대립적인 영역들이 함께 그러나 따로 제 존재를 드러낸다. 때로는 무게를 지니고, 때로는 무게 없이 가볍게. 이러한 공존은 긴장과 이완, 집중과 분산, 단절과 반복의 대칭적 구조에 기초하면서도 밀쳐냄의 거부나 저항 없이 차분히 조절되며 이루어진다. 모두 명사형동사(名辭形動辭) 같은 작품들이다. 변함 없이,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일상에서 움직이는 무수한 변화, 불연속, 단절, 일탈의 욕망에 관한 것이 이번 전시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윤명순_돌아오는 방_흙,동선_가변크기_2003
윤명순_만나지는 풍경_흙,동선_가변크기_2003

작가가 보여주었던 지난 작업들이(주로"변신-대지로부터" 시리즈로 대표된다) 생명의 과정을 자연적이고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관성 있게 다루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공간이나 시간에 대한 작가의 의식이 상당히 변화되어 있다. 공간이나 시간이 더 이상 절대적이거나 초험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경험적이며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곳에서 그리고 모든 시대에 상이한 시간·공간적 경험을 가지며, 비록 무의식적일지라도 그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사회-역사적으로 가변적인 시간과 공간이 모든 경험을 틀 지우고 모든 행위와 사고의 기초가 된다는 것은 이미 익숙하게 알려진, 그러나 여전히 잊어버리게 되는 우리 삶의 지반이다. 윤명순의 이번 작업들은 동질적이고 등분된 시간과 공간의 개념, 또는 기술적인 단순성을 벗어나, 자신에게 체험된 것으로의 시간과 공간을 다루고 있다. 경험적 공간에서 시간이 어떻게 상이하게 체험되는 지를 잘 보여주는 작업이 선(線)조각이다.

윤명순_가까이 있는 일_흙,동선_가변크기_2003
윤명순_하루, 욕망하는 풍경_동선_가변크기_2003

동선(銅線)을 용접하여 거리풍경이나 실내모습을 단순한 구성으로 묘사한 작품들에서 우리는 작가가 아주 오랜 시간 공들인 흔적이나 작가가 의도하고 있는 미적 형태를 만나기보다는, 작가의 심리적 시간에 의존하여 투사되고 있는 욕망과 마주하게 된다. 집들의 윤곽, 내부 공간의 일정한 사물들은 철사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실제공간에 놓여져 있지만, 보는 이들이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작가 자신의 시간에 의존하고 있는 풍경 작품들의 실제공간이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 실제공간은 한편에서는 현실세계의 지극히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또는 개념적인 시간에 관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작가나 보는 이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경험적 시간에 관여함으로써 이중적으로 기능한다. 집의 창문, 상점의 지붕, 깨진 계단, 비어있는 의자, 건물 위의 물탱크 등은 관람자들에게 전체적으로 공간적 지속성을 지각케 하지만, 동시에 통상적 문맥과는 다른 깊이나 돌출로 인해 관람자들은 어떤 공간은 응결되고 고착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며 그러한 부분들은 시간적 관계에서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분리되어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따라서 풍경의 선 조각들은 현실공간의 일부이면서도 그로부터 떨어져 나온 또 다른 어떤 현실이 되어, 현실공간을 복층적이고 불연속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윤명순_하루, 욕망하는 풍경_동선_가변크기_2003_부분

윤명순의 이전 흙 작업들은 함몰되는 형상이나 해체된 자태를 통해 유기적인 성장 자체의 논리를 동질적이고 지속적인 시간 속에서 명상하게 하였다. 즉 형태의 독특함이나 작품표면의 질감 등이 그것의 내부적 중심, 또는 논리적 추론을 통해 규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보여주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기하학적 형태의 흙 작업들은 유기체적 조직들의 발전원칙을 내용으로 삼는 은유적 형상이 아니다. ● 윤명순의 작품들은 작가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단순한 대리물이 아니라, 사물 자체로서 실제세계 속에 위치한다. 이를 통하여 작가의 주관적 세계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객관적 세계가 필연적인 고리 없이도 존재감을 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실제공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은유적 공간에 놓이게 되는 환영주의적 방법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내부적 질서, 이념 등을 통해 동일성의 기반(의미의 공유)을 요구한다. 이 강력한 균질화와 보편화의 작업에서는 기억, 향수, 바램 등에 지배되는 경험적 가치들이 도외시되거나 주변적인 것으로 다루어진다. 이러한 작업과는 달리 윤명순의 흙 작업들은 타인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보편적인 의미가 개별적이고 상이한 존재들을 통해서만, 그리고 다양한 해석을 통해서만 세계 속으로 드러남을 말하는 듯 하다. ● 작가의 부드러운 방식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일상은 그래서 균질화와 보편화의 횡포나 무시간성, 자기중심성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윤명순의 작품에서 삶의 이야기가 얼마나 복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가, 또 단절적이고 이질적인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중첩되어 연속성을 지니게 되는지를 좀 더 가까이 그리고 좀 더 천천히 들여다보게 된다. ● 멀리에서 정주하고 있으면서 잡힐 듯한 삶과 가까이에서 그러나 잡히지 않는 유목적인 삶은 윤명순의 '일상'의 공간에서는 동시적으로, 충돌하지 않으면서 미끄러지며 이어진다. 그리고 이 은밀한 변화가 단층의 넓이에서뿐만 아니라, 복층적 깊이에 기대어 진행된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윤명순_만나지는 풍경_흙,동선_가변크기_부분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작가가 외부세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게도 소통의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통의 방식은 한 편으로는 관계를 떼어내고 조각 내적인 규범이나 체계를 따르고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세속적인 시간과 속성을 수반하면서 조각 내적인 규범이나 체계를 벗어나 있지만, 두 방식 모두 순간에 존재하는 자아에 집중함으로써 과도함이나 집착, 엄격함 대신에 자유로운 대화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덩어리와 덩어리만큼의 빈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철사테두리로 이루어진 작품의 형태들이 강한 소유욕과 그것에 대한 포기를 표상 하는 이중동시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 일 것이다. 우리는 윤명순의 작품을 통하여 치유와 회복을 꿈꾸는 가치론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의미를 다시, 새로이 만나게 된다. 깊이에 대한 단일하고 포괄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전적으로 경험과 신체에 자신을 내맡긴 작가로부터 존재와 존재를 둘러싼 조건들의 상호관련성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 임정희

Vol.20030827b | 윤명순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