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mar

최영진 사진展   2003_0903 ▶︎ 2003_0916

최영진_무제_디지털 흑백 프린트_62×71cm_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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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903_수요일_06:00pm

갤러리 룩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02_720_8488

자연의 본성_사진의 본성 ● 황대권의 책 [야생초 편지]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다. "아마도 국화가 없다면 가을도 없다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정말이지 국화가 빠진 이 땅의 가을 풍경은 삭막 그 자체일 거다." 이 말을 그대로 옮겨온다면 이렇게도 말해질 것이다. "아마도 갯벌이 없다면 바다도 없다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정말이지 갯벌이 빠진 이 땅의 바다 풍경은 삭막 그 자체일 것이다." 꽤 오래 전에 사진가 주명덕 선생이 갯벌 사진 몇 장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때 무심코 "뻘이 참 아름답네요" 했더니 선생께서 "뻘은 바다의 피부야"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매우 짧은 시간동안 서대문 저편으로 지는 늦은 오후의 햇살 아래서 선생의 갯벌 사진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그때 오고갔던 여러 말 중에서 유독 "뻘은 바다의 피부야"라고 했던 선생의 말은 왠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뻘 마사지니, 갯벌욕이니, 시화호니, 세만금이니 하는, 갯벌에 관한 말들이 나올 때면 일초의 지체함도 없이 곧장 그 말이 날아와 박히고 마는 지울 수 없는 형상언어가 되었다.

최영진_무제_디지털 흑백 프린트_62×71cm_2002
최영진_무제_디지털 흑백 프린트_62×71cm_2002

오늘 이렇게 또 최영진의 갯벌 사진과 마주한다. 원래 갯벌이란 하잘 것 없다. 그저 자연의 한 부분으로 말없이 자리하는 이 갯벌이 세간의 관심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산업화 이후의 그 무엇 때문이다. 예술적 미감으로서 갯벌이 석양의 연인들에게 낭만적 기호로 자리하는 경우가 있었고, 종종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주된 피사체가 되어 노을과 더불어 아름다운 풍경사진을 연출하는 주무대가 되어주기도 하고, 또 이따금씩 어촌풍경의 한 전형으로서 우리 어머니들의 삶의 밑천이 되는 생의 상징으로서 표현되는 되었던 경우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후기 산업화 시대 이전까지는 갯벌은 그저 갯벌일 뿐이었으며, 오늘 관심사가 될 "뻘" 역시 그저 뻘이었을 뿐이다. ● 그러나 뻘이 그저 뻘일 수 없는 문제, 갯벌이 그저 갯벌일 수 없는 것은 비단 정치적 이슈 때문도 아니고, 석양으로 지는 일몰사진의 아름다운 배경 때문도 아니고, 또 바닷가에 사시는 우리 어머니들이 생업으로 여기는 삶의 터전의 문제도 아니다. 마치 사막에서 모래가 그저 모래에 불과하지만 그저 모래일 수 없는 위치와 같다고나 할까! 주명덕 선생이 "뻘은 바다의 피부야"라고 했던 말이 뻘이 피부에 좋다는 말이 아니듯이 갯벌은 생명에 관한 것이고, 존재에 관한 것이고, 본질에 관한 것이고, 더 거창하게 말하면 우주에 관한 것이다. 사람의 피부가 그러하듯이 "뻘"은 바다가 겪는 온갖 형상의 존재의 자국이고 흔적이다. 다소 어긋나게 기호학적으로 말하면 갯벌이란 바다가 있었다는, 바다의 존재가 남긴 각인, 증상, 자국, 흔적, 단서로서의 "인덱스(Index)"이다. 그래서 사막의 모래가 그저 모래일 수 없는 것처럼, 뻘도 그저 뻘일 수 없는 것, 국화 없는 가을이 더 이상 가을이 아니듯이, 갯벌 없는 바다도 더 이상 바다가 아닌 것이다.

최영진_무제_디지털 흑백 프린트_62×71cm_2002
최영진_무제_디지털 흑백 프린트_62×71cm_2002

최영진의 갯벌 사진은 언급했던 모든 것들을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정치적, 환경적 이슈가 아닌 바다와 갯벌 사이의 존재론적, 초자연적, 우주적 그리고 기호학적 인덱스들과 만나게 한다. 그러니까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바다와 갯벌의 관계는 바다가 있음으로서 갯벌이 존재하는 존재론적 증상이고 단서이며, 초자연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알 수 없는 순간에, 시간에, 공간에 바다가 흘리고 간 초자연적인 힘의 자국이자 흔적이며, 또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바다가 갯벌 위에 수놓고 간 수많은 기하학적 형태와 형상들로서 하나같이 우주적 생성과 창조의 신호(sign)와 상징(symbol)을 가지며, 마지막으로 기호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것들의 관계들은, 즉 바다와 갯벌이라는 지시 대상과 그것들의 물리적 연관 관계들은 서로 지시하고 지시 받는 의미체계이다. 그러니까 각인, 증상, 흔적, 단서를 비롯하여 신호, 상징에 이르는 여러 기호학적 조건들은 바다가 있음으로 존재하는, 존재론적 인덱스로부터 한 발짝 벗어날 수 없다. ● 최영진의 갯벌 사진은 모든 인덱스적 기표들이 그러하듯이 본질적으로 침묵하며 오로지 기호로서 자리한다. 그리고 세상의 인덱스가 그러하듯이 그가 표상한 이미지들 또한 우연성과 자동성의 조건 속에서 자리한다. 최영진의 갯벌 사진은 마치 우리가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에서 보는 것처럼, 자연성과 우연성에 따른 바다와 갯벌간의 "추상적 기계"(들뢰즈) 앞에 서고 그것들이 그리는 우연적, 자동적 형상들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진의 기계성에 포착된 갯벌의 형상과 형태 앞에서 비로소 바다라는 추상적 "존재(being)"와, 바다라는 물리적 "정수(essence)"를 깨닫게 되고, 또 이것들의 관계항을 통해서 바다가 갯벌에 흘리고 간 예측할 수 없는 기하학적 추상들과 만나고, 또 바다가 남기고 간 저 헤아릴 수 없는 초자연적, 초현실적 기호학적 형태들을 통해서 바다라고 하는 무한한 "숭고함(sublime)"과 만나게 되는는 것이다.

최영진_무제_디지털 흑백 프린트_62×71cm_2002
최영진_무제_디지털 흑백 프린트_62×71cm_2002

최영진의 사진에는 이 모든 것들이 들어 있다. 그의 사진은 결코 창조가 아니며, 뿐만 아니라 가공도, 변조도 아니다. 그의 사진은 사진을 통해서 재현되는 현실의 자국, 즉 원본을 있는 그대로 복제하는 하나의 인덱스일 뿐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사진의 힘이 있고, 그의 사진에 힘이 있다. 먼 옛날 이야기로 돌아가자. 사진의 발명가 윌리엄 핸리 탈포트가 사진을 발명하고 나서 쓴 글 『자연의 연필』(1884)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광선의 존재는 그것들을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있으며, 그리고 광선의 존재는 그것들이 사출하는 효과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진에 관한 아주 고전적인 말이다. 이 말을 새삼스럽게 인용한 것은 최초의 사진 발명가가 대상을, 빛을, 그리고 사진을 통해서 각 자국들 사이에 "봄(seeing)"의 문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즉 탈보는 사진이란 현실의 자국이고, 빛의 자국이고, 그리고 이것들을 카메라가 중개한 사진의 자국으로 이해함으로써 일련의 자국들이 사진에 내재함을 알았다. 즉 현실을 볼 줄 알고(사물의 자국), 인식할 줄 알고(빛의 자국), 그리고 사진으로 표현할 줄 아는(이미지의 자국) 능력을 가져야 이른바 "사진의 리얼리티"가 존재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 최영진의 사진은 탈포트가 사진의 발명 순간 인식했던 바로 그것들이 매우 충실하게 적용되어 나타난다. 그의 사진에는 사진적인 조건들이 충실하게 자리하며, 전통적 프린트가 아닌 디지털 프린트에 의해 표상된 이미지이지만 사물이 지시하는 존재론적 조건들이 사진적으로 꽉차게 프레임 안에 담겨져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바다라는 존재가 흘리고 간 매우 다양한 존재론적, 조형론적, 기호론적 인덱스들을 만나고 종국에 가서는 프레임 안으로 끌어들여진 사진의 힘을 알게 된다.

최영진_무제_디지털 흑백 프린트_62×71cm_2002
최영진_무제_디지털 흑백 프린트_62×71cm_2002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 사진가이자 이론가인 스티븐 쇼어는 [사진의 본성The Nature of Photographs]에서 사진의 본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진을 보는 방식은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사진은 물리적 대상이란 것인데, 바로 하나의 프린트로 보는 것이다. (중략) 묘사적 차원에서 보면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세상이 하나의 사진으로 전환해 가는 과정에는 네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사진이 가지는 평면성, 시간성, 프레임, 그리고 포커스이다. 이것들이 사진의 내용과 구조를 결정한다." ● 스티븐 쇼어의 말을 끌어들인 것은 이 말을 음미하면서 최영진의 사진을 보자는 것이다. 사진에는 사진만의 문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의 문법을 알고 보면 보이지 않았던 사진의 그 어떤 면들이 새롭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또 다른 사진의 재미와 감동이 있다. 그의 사진에서 흔히 간과하기 쉬운 피사체의 존재(시간), 피사체를 향한 눈길(초점), 피사체를 담아 내는 그릇(프레임), 그리고 피사체가 사진 속으로 들어와 앉은 모습(평면성) 및 구조들이 보인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사진은 성공한 작품이 되었다. 황대권이 [야생초 편지]에서 말한 "국화가 없다면 가을도 없다"라고 했던 말이나, 주명덕 선생이 했던 "뻘은 바다의 피부"라고 했던 말들을 조용히 음미해 보면 세상에는 어떤 정수(精髓)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정수들이 세상이란 이름으로 표상되고, 상징화되고, 희망이 됨을 알 수 있다. 최영진의 갯벌 사진에서 그 의미를 깨울 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진의 의무는 달성됐다고 생각한다. ■ 진동선

Vol.20030903b | 최영진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