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 프로젝트 #01

뮌展 / mioon / video.installation   2003_0917 ▶︎ 2003_0930

뮌_오실로스콥-가라오케 프로젝트2_인터렉티브 영상설치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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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 홈페이지_www.mioon.net

초대일시_2003_0929_월요일_08:00pm

* 무료입장 노래방 파티

뮌 mioon 김민선 KIMMIN & 최문선 CHOIMOON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B1 Tel. 02_735_4805

노래방 프로젝트 ● 노래방에서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고, 박수를 치는 사람이 있다. 노래를 부르는 순간에, 그 노래부르는 사람은 노래방의 능동적 존재가 되어 노래를 이끌어가며, 나아가 노래방의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반면 그 노래에 반응하여 박수를 치는 사람은 수동적 존재로 남는다.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관계를 단지 능동적인 존재와, 그에 이끌리는 수동적인 존재로 구분한다는 것이 무리가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속해있는 모든 조직이나 사회에서 또는 단지 두 사람의 관계에서도 쉽게 그런 구성원간의 상호관계를 인지 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현대의 동서양을 막론하고(물론 그 사회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작게는 처음 만난 남녀관계에서도 그렇고, 또는 한 사회의 언론과 그 언론에서 정보를 얻는 대중이 그렇고, 나아가 온라인상의 떠도는 정보와, 그 정보를 동시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계가 그렇다. ● 단지 문제는 일반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로서의 대중이, 그 대중의 수동성과 대비되는 능동적인 존재에 대한 비판의식이 결여되었을 때 생긴다. 이 비판의식의 결여는 그 사회의 능동적 집단이 유도하는 집단주의적 동원의 메커니즘이 잘 기능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그런 집단주의 의식은 개인의 정체성을 집단주의 정체성으로 변화시켜, 자발적 참여를 하게 하고, 집단 광기에 빠지게 하며, 그 광기에 빠진 대중들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쓰여지는 수단이 된다. 이 무비판적 대중의 전체주의적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노래방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전시장을 방문하는 관람자의 능동적 행위에 의해 화면의 영상이 변하고, 모든 방문자는 능동적인 존재로서의 위치에서 눈앞의 수동적인 존재들을 조종하고 지켜볼 수 있게 된다. 그 조종과 지켜봄을 통해서 방문자인 대중은 수동적인 존재로서의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 mioon_김민·최문

뮌_노래방 프로젝트 #01_인터렉티브 영상설치, 설계도_2003

스펙터클의 사회가 제공하는 무대에서1. 오늘날 우리가 자주 문화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계속해서 달라지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흔히 문화를 '삶의 양식'이라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삶의 여러 유형을 말하는 분류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삶의 양식을 형성하는 사회적 구조와 개념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구조와 개념이 잦은 변화를 겪고, 때로는 혼돈을 일으키며 급격하게 변하면서 새로운 해석의 틀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문화란 변화를 읽게 하는 텍스트이자, 사회적 구조와 개념을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러니 문화를 보면 사회구성의 구조적 틀이 보이고,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패러다임이 보이는 것이다. ● 많은 실천적 지식인들이 바로 문화를 강조하고, 또 이를 통해 새로운 사유방식과 담론을 생산해 내면서 우리에게 한 사회를 훨씬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접근하도록 도왔다. 미술 영역에도 마찬가지이다. 미술의 문제를 내적 표현과 자율적 조형원리, 혹은 재료와 물질에 기반한 환원주의로 점철된 모더니즘 논리로부터 벗어나, 개념적 성찰과 전환을 시도하는 비물질적 작업과 문화에 대한 비평적 시각으로 주제적 접근을 시도하는 양상을 맞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조형성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미술이 폐쇄적인 자율성의 논리로부터 벗어나 오히려 변화하는 사회와 문화에 능동적으로 개입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술매체의 발달로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체제는 영상문화로 대체된 듯하고, 그 문화적 컨텍스트 속에 우리의 무의식과 허위의식, 잠재된 욕망과 억압기제 등이 교묘하게 펼쳐져 있는 오늘의 현실에 말이다. ● 이 시대의 예술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 문화 속에 펼쳐져 있는 복잡한 의미의 그물망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의미의 그물망이 복잡하게 문화 속에 얽혀있다는 것은, 곧 대중문화와 영상문화의 많은 부분이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말고도 그것이 만들어내는 의미가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문화 읽기'라는 이야기가 예술에서 또 다른 실천의 맥락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를 읽어간다는 것은, 문화의 의미구조를 드러낸다는 것이고, 이어서 그 의미구조에서의 허위의식과 이념적 기제를 '해체'한다는 논리가 될 것이다. 해체의 실천은 미술에서의 개념적 성찰과 다르지 않고, 문화론적 접근의 개념적 작업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현대미술의 개념적 작업의 연장으로 '문화 읽기'가 주요 부분으로 거론되는 것이다.

뮌_노래방 프로젝트 #01_인터렉티브 영상설치_2003
뮌_노래방 프로젝트 #01_인터렉티브 영상설치_2003
뮌_노래방 프로젝트 #01_인터렉티브 영상설치_2003
뮌_노래방 프로젝트 #01_인터렉티브 영상설치_2003
뮌_노래방 프로젝트 #01_인터렉티브 영상설치_2003
뮌_노래방 프로젝트 #01_인터렉티브 영상설치_2003
뮌_노래방 프로젝트 #01_인터렉티브 영상설치_2003

2. mioo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김민과 최문이 함께 잡아내는 이 시대의 문화적 풍경은 일종의 '스펙터클'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문화가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비롯한 독특한 어법이 바로 스펙터클이 아니겠는가. 화려하고 풍요로운 영상의 세계를 우리는 마치 무대에서 펼쳐지는 광경처럼 객석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구경'하듯 바라본다. 스펙터클은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오늘의 세계를 담아내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현실은 스펙터클이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비쳐지는 지도 모른다. 수많은 욕망과 무의식의 풍경이 그 스펙트럼을 통해 투사되면서 또 다른 현실을 만들기 때문이다. 김민과 최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바로 그 지점, 즉 스펙터클의 사회적 풍경이 있는 지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 ● 무엇보다도 이들은 스펙터클의 '피상성'을 바라본다. 기본적으로 스펙터클은 엄청나게 긍정적인 것이고, 반박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좋고, 또 좋은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다. 스펙터클의 범주는 외양에서 시작하고 외양에서 그치게 된다. 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으며,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이 수동적으로 수용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모순도 없고, 모순을 건드릴 필요도 없으며, 그 자체로 자기충족적인 것이다. ● 이들의 설치작업인 「관광객 프로젝트」가 바로 스펙터클 문화의 겉보이기 방식을 말하는 경우라 하겠다. 이 작품은 자금성과 브란덴부르크 개선문, 피라미드와 파르테논 신전, 뉴욕의 쌍둥이 빌딩과 콜로세움 등의 전형적인 관광 기념물의 이미지를 깃털로 만든 대형 화면에 투사하고, 그 기념물에 관광객들을 집결시켜 기념물 전체를 덮어버리는 순간에, 갑작스레 바람이 불면서 모두 날아가 버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학적이면서도 단순 명쾌한 방식으로 말하며, 빠르면서도 경쾌한 리듬으로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이 실제로 스펙터클의 어법과 많이 닮아있다. 그러나 그 어법에 의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집으려는 의도임을 알아차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관광객은 더 이상 역사와 문화에 능동적으로 다가가려는 주체가 아니라, 관광산업의 대상일 뿐이고, 또 그들이 세계를 접하는 방식도 대상화에 따른 상투형 모델에 지나지 않음을 누구라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관광 기념물은 문화적, 역사적 컨텍스트가 제거된 그저 '겉으로 보기 좋은' 기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스펙터클 문화 속에서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단지 서성이는 '구경꾼'일 뿐이라는 사실은, 다른 한편 현대사회에서의 개인의 존재적 의미로 연결되기도 한다. 「Piazza della Signoria」는 이태리의 어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별하여 가짜 이름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구성한 비디오 작업이다. 작가는 군중 가운데 한 사람씩 선택하여 그에게 이름을 부쳐주지만, 결국 이들은 '아무도 아닌' 그저 군중으로 남는 것이다. 또 미술관 관람객을 대상으로 이미지를 중복시켜 마치 관람객이 유령처럼 서성이다가 빠져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Gone Around」 역시 문화와 관람객과의 관계가 실제로 형성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겉도는 현실을 말한다. 문화라는 것이 진정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소모품이 아닐까.

뮌_관광객 프로젝트 2003_DVD 영상, 깃털_가변설치_2003

3. 스펙터클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세계를 직접 파악할 수 없다. 세계는 단지 어떤 매개물을 통해 바라보아질 뿐이다. 그것이 카메라 렌즈이건, 영상이건, 라디오이건, 텔레비전이건 간에, 혹은 이념의 필터이건 우리는 늘 세계를 걸러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것은 어떤 목적에 따라 가공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스펙터클은 자신을 스스로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자신의 시각적 요소와 청각적 요소를 통합하여 인간의 촉각을 상승시키는 방식으로 자기 변형과 생산을 거듭한다. 그러나 스펙터클이 우리와 대화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기술적 확장을 통해 자신의 발전만을 목표로 할 뿐이어서 구체적인 인간 활동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스펙터클은 마치 거울 방처럼 무한히 반복되는 형상을 비쳐주되, 결코 현실과는 만날 수 없는 허상인 것이다. ● 「오실로스콥」은 어린이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는 아이들의 이미지를 음향의 파형처럼 오르락내리락하도록 만든 작품이다. 음향의 장단과 고저, 강약 등의 모든 소리의 요소들을 눈금으로 나타내는 장치인 오실로스콥의 원리를 활용하여, 기계적인 그래프 대신 어린이들의 움직임으로 그 형태를 대체했다.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즐기는 아이들의 경쾌함을 소리와 함께 엮어 마치 시각적 유희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한 효과를 제공한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소리가 조절될 수 있는 까닭에 이 움직임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다시 말하면 이 움직임은 음이 조율되는 것처럼 임의로 변경되는 것이다. 전체의 광경은 언뜻 흥미롭고 경쾌하며 역동적이지만, 스펙터클이 그런 것처럼 그것은 상호 소통의 관계가 아닌 목적에 따라 가공될 수 있는 관계로 제한되어 있다. ● 「오실로스콥」의 원리는 차후 「노래방 프로젝트 2」로 이어졌다. 다시 말하면 소리에 의해 움직이는 오실로스콥의 영상을 전시장에 들어오는 관람객이 내는 소리에 따라 반응하도록 하는 일종의 인터랙티브 방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관람객은 두 개의 화면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게 되고, 노래 소리의 음량과 울림의 정도에 따라 화면에서는 사람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행위를 반복하게 된다. 또 「노래방 프로젝트 1」은 이전의 단채널 비디오 작업인 「우리」의 연속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종의 극장 개념을 가지고 만든 것인데, 화면 전체를 객석으로 채우고, 단일한 인물로 구성된 관객이 마치 카드 섹션의 스펙터클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사라지면서 집단화되는 개인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다. ● 이번 대안공간 풀에서 발표하게 될 작품이 바로 「우리」와 「오실로스콥」의 원리를 발전시킨 「노래방 프로젝트 2」이다. 여전히 전시장 두 개의 벽면은 객석으로 채워지고, 무대로 상정되는 중앙에는 관람객이 가수로 등장하게 될 좌대가 놓여있다. 관람객이 노래를 부르면 마주 보이는 객석의 관중이 그대로 반응한다. 손뼉을 치거나 춤을 추거나, 감정이 고조되어 일어서거나... 만일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객석 역시 텅빈 상태로 남을 것이다. 그러니 노래방에서 우리는 늘 스펙터클을 만드는 것이다. 어찌보면 노래방은 스펙터클을 만드는 사회적 공간이기도 하며, 또 한편으로 스펙터클은 사회의 주요 생산물이 될 수도 있다. 「노래방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스펙터클이라는 것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소비되는가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뮌_관광객 프로젝트 2003_DVD 영상, 깃털_가변설치_2003_부분

4. 김민과 최문의 작업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한번의 작업은 그 다음의 작업에서 기술적 전개와 내용적 발전을 실현하기 위한 단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작업은 완결된 작품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늘 과정 속에 있는 셈이다. 그런 면모가 이들의 작업을 개념적 성찰로 유도하고, 사고의 전환을 이루는 실천적 맥락을 갖게 하는 것이다. 결국 예술이란 것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반성하게 하는 데서 근본적으로 개념적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스펙터클의 사회를 드러내고 그 내부의 소외논리와 피상성 혹은 물신주의와 권력의 기제를 읽게 하는 김민과 최문의 작업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개념적 성격을 강하게 갖는다. ● 문화를 읽는다는 것, 그리고 문화적 현상과 외피를 둘러싼 의미구조에 주목한다는 일은 한편으로 시대적 요구일 수 있다. 그만큼 사회변화의 진폭이 크고, 이에 따른 삶의 양식의 변화도 빠른 것이어서 그렇다. 예술의 개념과 역할 또한 그 변화에 반응한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도하는 힘의 정체에 반응하는 것이다. 오늘날 문화를 만들어 가는 힘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끝없는 욕망의 기운일지도 모른다. 예술이란 여전히 주의력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잡히지 않는 것을 명확히 하는 일이니, 그것이 오늘에는 문화라는 얼굴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김민과 최문의 주의력과 시선이 문화라는 그 복잡하고 교묘한, 화려하고도 허망한, 유쾌하지만 텅 빈, 정교한 듯 하지만 간교한, 행복하지만 덧없는 실체에 머무는 이유가, 다시 말하면 그들이 작업을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 박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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