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ind Hand

송영규 회화展   2003_1220 ▶︎ 2003_1230

송영규_믿지 않기로 약속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130cm_2003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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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1220_토요일_05:00pm

갤러리 상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9번지 Tel. 02_730_0030

눈먼 손의 고백 ● 성찰이라 하기엔 그 깊이가 턱없이 부족하고, 날선 관찰이라 하자니 그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내 모습에 그저 겸연쩍어질 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수많은 관계의 편린들을 주섬주섬 쓸어 담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이처럼 안팎이 모호한 경계의 어딘가에 어정쩡하게 서있다. 인간이 삶에서 어떤 종류의 의미를 확인하거나 혹은 잃게될 때, 그러한 사건들의 배후에는 대개 타인의 출현이라는 진부하지만 치명적인 계기가 놓여있게 마련이다. ● 이 그림들은 주위에 놓인 수많은 관계의 연쇄들로부터 채집한 몇가지 단편들의 기록이며, 혹은 내 몸에 닿아 슬쩍 빗겨가거나, 그 어딘가에 선연한 무늬를 남기기도 한 어떤 인장(印章)들의 우울한 모사(模寫)이다.

송영규_믿지 않기로 약속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130cm_2003
송영규_결박당한 밧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230cm_2003
송영규_구겨진 벽 앞에 서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116.7cm_2002

그림 안에는 상처에 대한 어눌한 고백, 냉소로 위장한 연민, 껍질처럼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과 치유에 대한 가난한 모색이 잠겼다. 관계의 전위(前衛)인 손은 밧줄에 묶였고, 상처를 예감하고 눈감으려던 귀는 오히려 더욱 커져버렸지만, 화면 밖을 응시하는 주름 가득한 또 다른 손은, 웃는 듯 우는 듯 어리숙한 표정으로 관계를 두려워하고 관계를 준비하며 관계를 열망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송영규_자화상의 시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27cm_2003

관계의 결핍과 과잉, 재난과도 같은 뜻밖의 상처들은 시간의 무게에 눌려 퇴적되고, 결국 아름답거나 슬프거나 혹은 남루하기도한 삶의 무늬가 된다. 이 그림들을 통해 발굴된 오래된 조각들은 나의 정교하지 않은 연장으로 인해 그리 온전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고백의 효용성에 대한 과장된 신뢰와 감정의 과잉, 신경질적인 노동으로 치장된 나의 지적 결핍은 그림 안에 근근히 남아있는 그것들을 오래도록 파편으로만 머무르게 하는 원인이 될지도 모르겠다.

송영규_정일을 위한 두 개의 초상-내게 그렇게 말하지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97cm_2003_부분
송영규_정일을 위한 두 개의 초상-내게 그렇게 말하지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97cm_2003

하지만 난 이 기형의 미덕들에 대해 결연히 냉담해질 수가 없다.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수많은 상처와 그것이 결과하는 태도의 양상들을 묘사하는 데에, 절실함으로부터 길어 올린 이 어눌한 수사(修辭)들이 나름의 몫을 해준 듯 하기 때문이다. ● 그림을 통해 치유를 기도했던 나의 바램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림의 과정이 마련해 준 것은 사람을 바라보는 조금 온건해진 내 시선의 자리와 삶의 태도에 대한 약간의 정련이었다. 치유의 주체는 그저 시간. 나태하지만 견고한 진리. 두 번째 전시의 준비를 마감하며, 맹목의 진심은 뒤에 남기고 선량한 냉소만 가지고 간다. ■ 송영규

Vol.20031220a | 송영규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