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_생명의 땅

광주신세계갤러리 / 광주사진포럼 기획展   2004_0204 ▶ 2004_0211

채상묵_밭_흑백인화_45×45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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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204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이정록_김효중_채상묵_김영태_박일구 오프닝 이벤트_창작무 "들의 숨결"

광주신세계갤러리 광주광역시 서구 광천동 49-1번지 신세계백화점 광주점 1층 Tel. 062_360_1630

생산과 생명, 그 '오래된 미래'로서의 들 ● 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게 하는 들, 모든 생산의 터전이자 생명의 고향인 들, 곧 논과 밭, 개펄과 산전은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의 소관으로 이 여신은 신들을 낳은 태초의 원소로 대접을 받는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의하면 태초의 공허인 카오스 다음에, 그리고 사랑의 여신인 에로스 이전에 태어난 가이아는 아무런 남성적 도움 없이도 하늘과 산들과 바다를 낳은 것이다. 그러한 들이니 사람과 곡식, 나무와 새, 풀과 꽃, 그리고 날고 헤엄치고 달리고 기는 모든 비잠주복(飛潛走伏)이 여기서 나고 먹고 보금자리를 틀고 사랑을 하고 꿈을 꾸고 죽어 땅에 묻히지 않겠는가. ● 이런 어머어마한 대지에, 들에, 수수 억만 광년의 우주로부터, 태양으로부터, 크고 작은 별들로부터 빛이 닿는다. 아침마다 여명이라는 이름으로 닿아선 우리의 잠을 깨우고 눈을 깨우고 의식을 깨워선 우리에게 새로운 문을 하나 발견하게 한다. 그 문을 열어젖히고 그 빛의 몸이 되어 우리가 가 닿는 사물들 곧 벼그루터기 우쭐우쭐한 논이며, 된서리 뒤집어쓴 보리밭이며, 해미에 갇힌 개펄과 바다, 그리고 푸른 산봉우리들이 맑은 빛의 눈을 뜨며 생명의 어린 경이로 바뀌는 그 시간은 얼마나 찬연하고 황홀한 일인가.

김영태_산_흑백인화_27×56cm_2004
김영태_산_흑백인화_27×56cm_2004

그 빛의 광휘로움은 여기 땅이 땅만이 아니고 저기 하늘이 하늘만이 아닌 착시에, 아니 바람의 흐름에, 아니 어쩌면 세상과 세상밖에 두루 편재해야만 될 것 같은 신의 숨결에 놓이는데, 그 신의 숨결은 곧 들의 숨결이다. 그 들의 숨결에 놓이게 되면 이제부터 우리에겐 문명과 자본 속의 파시스트적 속도를 넘어 존재의 시간이 열린다. 속도가 사라지자 안 보이던 동백꽃이 피고 굴뚝새가 날고 안 들리던 솔바람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그러면 우리는 여기 화탕지옥에 있어도 모든 곳 가운데 화엄 천상의 일을 도모하게 된다. ● 아니 그 이전에 김효중이 일구어 낸 들을 보아라. 삼시세때 젖 잘 먹고 쑤욱쑤욱 크는 아기들처럼 그 찬연한 빛과 바람 속에서 짙푸르게 차오르는 벼들, 아니 그 벼들이 천리 밖까지라도 툭 트며 황금물결로 찰랑거려선 거기 지나가는 자 누구라도 경배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나락논을 보아라. 또 채상묵이 잘 갈아놓아선 거기 이제 무슨 고운 씨앗이 놓일 것인가 잔뜩 설레게 하는 밭두렁을 보아라. 아니 어느 시인은 겨울날의 보리밭에서 보리(菩 堤) 삼매경에 빠졌다는 그 보리밭의 인고의 생명력을 보아라.

박일구_바다_흑백인화_42×86cm_2004
박일구_바다_흑백인화_42×86cm_2004

바닷가 사람들은 개펄이나 바다 양식장을 들이라고 한다. 그쪽 사람들을 방문하여 주인공을 찾으면 들에 나갔다고 해서 의아해 했는데 여기서 들이라는 게 개펄이나 양식장을 가르킨다는 것이다. 어쩌면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가 하늘도 산들도 바다도 만들었으니 개펄과 양식장을 들이라고 해서 무리는 아닌 것이다. 결국 생산과 생명의 터전으로서의 의미가 강조된 표현인 것 같은데, 나는 이정록이 개펄 가운데 박아놓은 나무막대기에 대해서 잘 안다. 또 박일구가 바다양식장에 띄워놓은 하얀 부표에 대해서도 잘 안다. 그뿐인가. 김영태가 산전에서 잡아낸 고추 지지대에 대해서도 잘 안다. ● 그것들은 모두 평생을 노동과 소외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세운 삶의 꿋꿋하고도 서러운 푯대들이다. 쌀 한 톨을 위해 여든 여덟 번 손길을 주는 사람들의 눈물,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큰다는 콩과 참깨와 푸성귀들에 담긴 사람들의 땀, 뻘밭에 온몸이 빠지면서도 함지박을 밀며 조개를 주워 담아야만 하는 이들의 피, 산비탈을 기느라 허리마저 굽은 비탈이 되어버린 이들의 고통, 태풍에 적조에 혹한에 삼년 양어를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사람들의 넘치는 바다와 같은 시퍼런 한을 누가 모르랴.

이정록_갯벌_흑백인화_각 30×30cm_2004
이정록_갯벌_흑백인화_각 30×30cm_2004

그러면서도 그들은 강물에 나가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정희성,「저문 강에 삽을 씻고」)라며 스스로 위안한다. ● 결국 들은 사람들에게 있어선 농사와 연관을 맺는데 농사를 통해서 사람이 깨닫게 된 것 중 매우 중요한 것 하나는 우주적 의식이다.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곡식 속에서 인간이 본 것, 곡식을 취급하면서 인간이 배운 것, 씨앗이 땅 속에서 변하는 것을 보고 인간이 배운 것은 인간의 삶에 결정적 교훈을 주었다. 농경적 삶이 보여주는 낙관주의의 주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는 씨앗이 지하에서 그런 것처럼 죽은 자들이 지상에서와는 다른 형태로 회생할 수 있다는 전역사적, 농경적 신념에 있다"라고 하였다. ● 그 자체로는 죽음 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씨앗 하나가 땅 속에 묻혀서 싹을 틔우고 생장하고 꽃을 피우고 다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삶의 농업적 경영을 통해서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우주 속에서, 아니 대지 속에서 그 어떤 다른 형태로 태어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우주의 순환과 리듬을 따라 짓는 농사일지라도 사실 농사는 단조롭고 고된 노동을 직접적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곡식을 심으면 자라고 영그는 그 생명의 생장에 대한 말 할 수 없는 기쁨을 또 어찌 하는가.

김효중_들_흑백인화_38×30cm_2004

그뿐인가. 겨울날엔 항상 텅 비워버린 들을 통해서 우리는 되레 '텅 빈 충만'이라는 것을 배운다. 텅 비어버린 들판이 오히려 더 충만하게 보이는 것은 그 들이 꽉 차 있을 때는 사실 현상적 풍요에 가리어 생의 깊은 것들, 생의 높은 것들, 생의 아득한 것들, 생의 맑은 것들을 못 보기 십상인데, 그것이 텅 비니 거기에서 되레 우리는 우주적 섭리며 대지에의 조응이며 사무사(思無邪)의 마음이며 삶의 성실한 자세 등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 수수 억만 광년의 우주와 순간 찰나의 모든 숨탄것들이 그 빛과 생명으로 너나들이 하는 곳이 들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시공간인 바, 들에 대한 우리의 의식 재고가 있을 때, 그 속에 내연하는 에너지 덩어리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더더구나 문명과 자본이라는 좁은 문을 박차고 이런 새로운 문인 들을 열어젖히면 거기가 바로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현실적으로 현재 들은 생산과만 연관하면 이미 완전히 죽어 있다. 그런 들을 '오래된 미래' 차원에서 되살려 내고 있는 이 다섯 분의 선지자들을 보아라! ■ 고재종

Vol.20040202a | 들_생명의 땅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