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zraeli Press

Artists of Nazraeli Press展   2004_0214 ▶︎ 2004_0328 / 월요일 휴관

제리 율스만_untitled_흑백인화_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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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214_토요일_05:00pm

참여작가 딕 애렌츠_돈 커비_론 반 돈겐_롤프 혼 마사오 야마모토_마이클 케냐_제리 율스만

강의_2004_0306_토요일_05:00pm_White Wall 갤러리 주제_사진의 예술적 개념과 상상력의 문제 / 강사_신수진

후원_미국대사관_일본대사관_네덜란드대사관

관람료 / 일반_5,000원 / 학생_4,000원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와이트월 갤러리 서울 강남구 청담동 101-5번지 Tel. 02_548_7520

들여다보기의 즐거움 ● 사진은 움직이지 않게 고정된 영상이다. 움직이는 영상은 고정된 이미지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므로 영상의 본질적인 시각적 속성은 사진과 같다. 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움직이는 영상을 보는 것과 고정된 사진 이미지를 보는 것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사진은 찬찬히 곱씹으며 들여다볼 시간을 준다. 모든 시각 매체들은 언어적인 소통 도구들에 비해 순간적으로 즉각적인 인상을 가지게 한다. 어떤 이미지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거나 공포스러운 느낌에 휩싸이거나 평온하거나 진기한 인상을 받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진에서의 그 첫 번째 인상은 얼마든지 바뀌거나 더 풍부해질 수 있는 것이다. ● 사진전을 보러 가면 나는 나만의 방식에 따라 전시장을 돌아다닌다.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순서대로 모든 사진을 비교적 빠른 걸음으로 훑고 지나간다.-이 정도만으로도 사진에 대한 첫 번째 인상은 만들어진다. 그리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한 장 한 장 들여다보기를 시작한다. 좋은 사진은 이 시간 동안 나에게서 수많은 영감과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처음 받은 인상이 더욱 강렬하게 정교화 되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과 기분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을 때 나는 그 사진들이 담긴 사진집을 찾는다. ● 책은 마치 사진처럼 들여다보기를 즐길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다.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책들은 원작에 더해진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끼게도 해준다. 만드는 사람의 해석이 담기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사진과 사진집들은 원작과 함께 그 사진들을 실어 공들여 제작한 사진집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두 배의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다. 여기에 참가한 모든 작가들은 사진집을 통해서 자신의 사진이 새롭게 탄생하였으며, 책이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형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 디지털 프로세스의 일반화가 이 세상에서 종이로 된 책을 없애고 출판 시장을 사양길로 보낼 것이라던 예측은 빗나가고 있다. 오히려 디지털 환경은 더 다양한 양질의 책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대한 정보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될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매체의 생명력은 실용적인 쓰임새에만 깃드는 것이 아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매체일수록 예술만이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 인류가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우리가 아름다움을 소유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책과 사진은 우리의 두 손에서 어느 것도 대신할 수 없는 들여다보기의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제리 율스만_untitled_흑백인화_1982

JERRY UELSMANN_사진, 상상의 날개를 달다 ● 최근 선보인 제리 율스만(Jerry Uelsmann, 1934- )의 『예술 인용(Referencing Art)』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되는 예술 작품의 속성과 매체 환경의 변화를 통해서 함께 변신해 가는 예술의 양식에 관한 이야기 거리를 담고 있다. 율스만은 지난 반세기 동안 쉼없이 지속해온 방대한 작업을 통해 조합인화 사진 기법으로 확고한 작품세계를 펼쳐온 사진가이다. 이 책에서 제리 율스만은 짤막한 권두언을 통해 자신을 이미지 제작자(image-maker)라 칭하며, 살아오는 동안 깊은 인상을 받은 예술작품들에 대한 경의를 담아 이 사진들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 전통적인 예술 창작에 있어서 사진집의 제목에 쓰인 '인용(reference)'과 '예술(art)'은 서로 함께 하기 어려운 단어였다. 그러나 율스만은 이 책을 통해서 인용하기의 의미를 근대적 예술개념에 대한 재해석에 초점을 맞추어 풀어내었다. 이러한 시도를 적절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1966년 주창한 포스트-비주얼라이제이션(Post-Visualization) 이론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의 주장을 이전 세대의 프리-비주얼라이제이션(Pre-Visualization)에 대한 화답의 차원에서 해석하자면, '사진 이미지의 시각적 효과는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암실에서의 실험적 창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핵심으로 볼 수 있다. 포스트-비주얼라이제이션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율스만은 조합인화법을 택하였다. 서로 다른 네거티브에서 얻어진 이미지들을 하나의 프레임에 조합해 넣음으로써 새로운 공간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과정에서, 촬영은 이미지의 구성 요소들을 수집하는 초보적인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 율스만은 조합인화법을 활용하여 근대 예술을 재해석하기 위해 역사적 예술작품을 직접 기호적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작품의 핵심적인 아이콘을 작가의 얼굴과 중첩시키기도 하였다. 구태여 래일랜더(Oscar Gustav Rejlander, 1813-1875)나 로빈슨(Henry Peach Robinson, 1830-1901)까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조합인화 기법의 사후 조작성은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진가들을 매료시킨 방법이었다. 현실적 제약에 메이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이는 사진 이후의 다른 매체에서도 재현성에 대한 강박적 태도를 벗어나는 단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시도이기도 하다. 뤼미에르 형제의 추종자들이 처음에는 자연에 대한 재현의 가치에 집중하였지만, 점차 슈퍼임포지션(superimposition)이나 에디팅(editing) 기법을 강조하면서 영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었던 것처럼 말이다. ● 율스만이 취하고 있는 사진적 표현 양식은 의미적으로 관련된 요소들을 이어 붙이기 하는 것이다. 그의 사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요소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퍼즐 맞추기 하듯이 읽어나가도록 유도한다. 매우 서술적이며 언어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초현실적인 외형을 띄고 있어 몽환적인 인상을 받을 수도 있으나 대체 왜 이러한 시도들이 이루어졌는가를 생각하다보면 자연히 그가 매우 이성적인 아티스트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 역사를 관통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새로운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낯설고 엉뚱한 소리처럼 들리다가도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고 당연한 시각이 되어 가는 것이 예술의 미덕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진정 주목해야 할 율스만적 시각의 선구성은 디지털 프로세스의 조작성이 일상화됨으로써 사진이 본격적인 상상력의 세계로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부각된다. 21 세기형 인류의 감수성은 디지털 기술을 통해 조작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혼동하지 않는다. 모든 사진 이미지에 대해서 조작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모든 의무사항을 벗어버린 사진 매체의 본격적인 활약은 이제부터가 아닐까. 피사체에 대한 재현의 부담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상상력에 기초한 어떠한 시도도 가능하게 된 오늘날에서야 말이다.

마이클 케냐_fifty five birds_흑백인화
마이클 케냐_chapel cross power station_흑백인화

MICHAEL KENNA_은빛 침묵의 울림 ●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연은 끊임없는 과제의 근원이다. 모든 더불어 살아가기가 그러하겠지만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지배와 순응의 순환고리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을 지배함으로써 삶을 유지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으며, 동시에 자연에 순응함으로써 그 일부로서 살아갈 수 있다. 자연은 아무런 말이 없으나 인간은 일생을 통해 그들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 마이클 케나(Michael Kenna, 1953- )의 작업은 카메라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자연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들은 바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는 언제나 세심하고 정직한 장인의 자세를 견지하며 자연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서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스려서 평정심으로 바라다본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잘 균형 잡혀 있고 모든 요소들이 조화로운 형태를 띄고 있다. ● 사진에 등장하는 피사체들은 나무나 돌, 조각상이나 다리와 같이 고정된 지형지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침묵하지 않고 말을 걸어온다. 마치 완전한 적막의 한가운데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몸 속의, 내면의 울림처럼 그 소리에 귀기울이며 우리는 명상에 빠져든다. 그의 풍경 속 자연은 사람과 사물이 함께 공생해 가는 장소로 가꾸어져 있는 것이다. ● 이처럼 그의 사진은 단선적이며 명료한 참선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사진을 보는 동안 우리는 표지판이 완벽하게 정비된 쾌적한 길을 달리는 것과 같이 어떠한 갈등이나 위협감도 느끼지 않는다. 다만 정확하게 재단된 화면 안에서 적재적소에 배치된 유도점들을 따라 편안하게 눈길을 두기만 하면 된다. 강한 원근감을 주는 선적인 요소와 패턴의 배열과 같이 반복되는 형태적 요소들을 좇아 그의 여정에 편안하게 동행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분명한 첫 번째 착시점과 시선의 유도는 관찰자의 시점, 즉 렌즈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기법을 활용하는 전형적인 사진적 프레이밍(framing)의 미학을 여실히 보여준다. ● 마이클 케나의 사진의 관심사는 오직 스스로 선택한 사진적 표현 양식들을 자신의 감성을 시각화하는 일에 온전히 기여하도록 활용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이야기 거리와 세계에 대한 남다른 해석을 제시하기에 공격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것에 비해, 그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고유한 속성에 충실한 자세로, 사진을 자신의 언어로 완벽하게 소화하는 일에 순수하게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 그 순수성은 전통적이며 수공적인 은염 프로세스(Gelatin silver process)를 통해 빛을 발하고 있다. 흑백사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참으로 아름다운 은입자의 변주는 사진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정제된 물성을 느끼게 한다. 밝음과 어두움만으로 변환된 모노크롬의 세계, 그것은 이상화된 자연이며 신비한 대화의 장이다. 따라서 사진에 찍혀진 장소가 어디이며 그때가 언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진가가 그 장면들을 대한 순간에 느꼈을 내면의 울림, 침묵하는 자연으로부터 얻어낸 은빛의 울림을 함께 들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행복감에 젖을 수 있는 것이다.

마사오 야마모토_#1051 SOUL-4_흑백인화
마사오 야마모토_#1056 SOUL-2_흑백인화

MASAO YAMAMOTO_작은 신(神)의 세상 ● 사진가는 자신이 본 것을 사진에 담고, 그 느낌을 고스란히 전하기 위해 사진을 완성한다. 보는 사람과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 전시장인지, 책인지, 모니터인지에 따라 마무리되는 방법은 달라질 수 있다. 마사오 야마모토(Masao Yamamoto, 山本昌男)는 특별히 그 만남의 장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진가 중 하나이다. ● 그의 사진집은 책이 아니다. 상자에 고이 접어 담겨진 흰 벽이다. 그는 전시마다 다른 디스플레이를 선보이는데, 그의 독특한 사진집도 그가 직접 창조한 벽면의 느낌을 담아 제작된 것이다. 같은 사진이라도 다른 공간에 들어가면 새롭게 배열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벽면에 콜라주를 하듯 매번 다채로운 설치(installation)를 시도한다. 단순히 벽에 걸린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세계가 스며든 공간을 선보이기 위한 것이다. ● "주변의 모든 사사로운 물건들에 깃든 영혼을 느끼고, 언제나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야마모토의 사진들은 매우 작아서 각각에 무엇이 찍혔는지를 보려면 아주 바짝 다가가야 한다. 벽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놓는 그 순간, 우리는 야마모토의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미지의 우주 공간을 유영하듯이 한 장씩 눈길을 옮겨가며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만물신의 영토이다. 사진은 작은 신들이 가득한 그만의 세상인 것이다.

론 반 돈겐_anemone coronaria_흑백인화
론 반 돈겐_Dahila Lady Darlene_흑백인화

RON VAN DONGEN_꽃이 아름다운 이유 ● 론 반 돈겐(Ron van Dongen, 1961- )의 사진은 꽃으로 가득하다. 심지어는 잎이나 줄기도 거의 보이지 않고 꽃의 봉오리만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짧은 순간동안 절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아주 까탈스러운, 그래서 그만큼 또 매력적인 대상을 그는 능숙한 솜씨로 다룬다. ● 오래 전에, '죽어야 사는 여자(Death becomes her)'라는 영화가 있었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는 두 여자들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걸 보면서 절정의 아름다움을 지속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망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름다움은 상대적인 가치여서 아름답지 않은 것과 함께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늙지 않는 절세가인이나 시들지 않는 꽃이 있다면, 그 아름다움에 숨막혀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 사진은 기억이며, 오래도록 기리는 제단이다. 곧 사그라들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사모곡이다. 백에 백, 흑에 흑, 회색에 다시 회색으로 얹어진 흑백사진 속의 꽃은 그래서 아련한 추억의 향기를 풍긴다. 손안에 쥐면 금새 꺼질 듯한 그 온전히 아름다운 순간을 붙잡기 위해서 사진은 존재한다. 날카로운 윤곽선을 만드는 조명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부드럽게 확산된 자연광만으로 피부에 와 닿을 듯한 공감각적 표면이 창조되었으며,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4×5 카메라의 세로 포맷과 Polaroid 55P/N 필름 프레임의 가장자리로 번져나가는 빛의 흔적 또한 아스라한 단아함을 드러내 주었다. 꽃이 아름다운 건 곧 져버릴 운명이기 때문이고, 꽃을 담은 사진이 아름다운 건 순간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돈 커비_Wheatfield Panawawa Road_흑백인화
돈 커비_Wheatfield & Forest_흑백인화

DON KIRBY_자연의 지문(指紋) ● 돈 커비(Don Kirby)의 『WHEATCOUNTRY』는 말 그대로 밀과 풀로 가득하다. 소재만으로 이야기하자면 사진에 찍힌 대상은 하늘, 밀밭이나 풀밭, 그리고 그 사이로 난 길이 전부이다. 마치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늘 보는 빌딩 숲을 신기해하지 않듯이 어쩌면 누군가에겐 평범하기 짝이 없는 소재들을 일관되게 다룬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진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중의 누군가 이 사진들을 보고 미국의 오레곤이나 워싱턴 주를 직접 찾아간다 해도 이러한 장면을 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 그의 사진 속 밀밭은 프레임과 빛으로 변형되어 있다. 그가 프레임을 정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양상을 보이는데, 하나는 하늘의 비중을 최소화하고 땅을 가득 채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과 땅의 비중이 대등한 느낌이 들도록 선택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대형 카메라를 사용하여 충실하게 살린 풀의 디테일과 그 세부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형태가 모두 살아있는 것이 특징인데, 광대한 대지 위에 나 있는 경작의 흔적들이 굽이굽이 연결된 모습이 마치 거대한 지문을 찍어놓은 듯하다. 프레임 가득 대지만이 찍혀져서 크기를 가늠할 만한 아무런 지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하늘이 땅은 같은 톤으로 처리되어 어느 한쪽으로도 그 무게가 기울지 않는다. 하늘 밑에 땅, 땅 위에 평범하게 보이는 것은 하늘은 밝고 땅은 어둡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 커비의 사진 속 하늘은 땅만큼이나 복잡한 디테일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밝지 않다. 그 곳에는 대지에서와 같은 하늘의 지문이 있는 것이다. 미묘하게 서로 다른 파장을 반사하는 자연의 색들을 흑백 사진에서 강한 콘트라스트의 형태로 분리해 내기 위해 그는 정교하게 필터를 사용하였다. 자연의 지문은 돈 커비의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프레임과 빛의 작품인 것이다.

딕 애렌츠_Yew Trees_흑백인화
딕 애렌츠_Fairy Glen_흑백인화
딕 애렌츠_Gondolas_흑백인화

DICK ARENTZ_무소유의 지혜 ● 우리는 쉽게 역사를 이야기하지만 인간은 그저 순간을 살다 간다. 우리는 쉽게 물건과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듯 행세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물건들은 시간을 뛰어넘어서도 살아남아 인류의 생존을 증거 한다. 소유한 것은 어쩌면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 딕 애렌츠(Dick Arentz, 1935- )가 차용하는 방법은 플래티눔과 팔라듐 인화(platinum and palladium print)이다. 흔히 백금인화라고 하는 이 방법으로 인화상을 만들기 위해 그는 백금염과 철염을 혼합한 백금감광액을 종이 위에 손으로 직접 도포하여 한 장 한 장 인화지를 제작한다. 프레임 주변부에 남아있는 붓자국 같은 것이 감광유제를 입히는 이 과정에서 생긴 흔적이다. 그는 자신의 시각을 백금인화에 적합하도록 조율해왔고, 완성도 높은 백금인화를 위한 거의 모든 기술적 문제들을 다루어온 장인이다. 계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완벽한 네거티브 역시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 가까이 다가가서 이 사진들이 보여주는 암부를 들여다보라. 충분히 어둡지만 차갑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그 느낌이 바로 좋은 백금인화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긴 셔터스피드가 만들어낸 양감이 느껴지는 섬세한 텍스쳐이다. ● 애렌츠는 100년이 된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130년이 된 인화방법으로 사진을 만든다. 그리고 사진술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찍혀진 유럽의 풍경을 사진에 담는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그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며 시간과 역사에 대한 경외심에서 시작된 것임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뿌리를 찾는 것, 소유하기보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빌려 쓰는 것-이것이 그의 사진가로서의 삶이 지닌 미덕이다.

롤프 혼_Study #8 680 24 Interchange_흑백인화
롤프 혼_Six Oaks Oakland Hills_흑백인화

ROLFE HORN_관점의 기술 ● 롤프 혼(Rolfe Horn, 1971- )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국 서부의 사진명문 Brooks Institute 출신으로, 이제 막 프로 사진가로서 경력을 시작한 작가이다. 그의 「The 680/24 Freeway Interchange Demolition Project 1999」은 해체되어 가는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 사진에 담기는 피사체의 형태는 카메라의 위치, 즉 시점에 따라 변화한다. 어느 곳에서 바라보느냐가 무엇을 보게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길 위에서 차를 타고 달릴 때는 볼 수 없었던 것을 길의 아래에서, 길의 바깥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전형적인 사진의 시각적 조형성 중의 하나로서, 고철이나 콘크리트 더미에 불과한 파괴된 도로를 훌륭한 환경 조형물로 재탄생 시키는 관점인 것이다. 현실 속에선 이미 사라지고 없는 해체된 도로가 사진 속에서 다시 이어진다. 8"×8"의 작은 프린트들이 나란히 디스플레이 된 장면 앞에서, 우리는 프레임을 넘어서 역동적으로 뻗어 가는 공간의 이음새를 느낄 수 있게 된다. ■ 신수진

Vol.20040214a | Artists of Nazraeli Press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