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의 경계에서

책임기획_장경호   2004_0218 ▶ 2004_0224

김창겸_세상에 남은 이를 위한 기도_단채널 비디오 영상_00:10:30_2004

초대일시_2004_0218_수요일_05:00pm

퍼포먼스_군침도네_성능경

참여작가 김창겸_박경주_박불똥_백기영_성능경 임흥순_조미희_차기율_천성명 후원_한국문화예술진흥원 / 협찬_덕원갤러리

덕원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02_723_7771

오늘날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근본적인 힘은 자본주의와 기술문명이다. 자본의 확대재생산은 오늘의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의 고리로 작용하고 있고, 기술은 인간의 인식과 감성에까지 근본적인 변화를 강요하는 수준에 다다르고 있다. 자본과 기술의 무한질주는 도처에서 우리 삶과 문화를 파괴시키며 옥죄고 있다. 유전공학, 나노테크놀로지, 로봇공학으로 대변되는 하이 테크놀로지가 제시하는 인류의 장밋빛 미래는 그것이 갖는 자기복제, 자기증식성으로 하여 동시에 인류절멸의 위기를 내포하고 있으며, 생태계 파괴와 환경문제는 이미 몸 속까지 파고든 형편이다. ● 갈수록 심화되는 자본의 포섭 속에서 테크놀로지가 자체논리를 지니고 문화변동을 주도하는 시대에 과연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세계와 대면해야 할 것인가? 자본과 테크놀로지에 의해 삶과 현실이 공중 분해되고, 가상현실을 통한 현실의 파편화와 조작은 대중의 삶을 해체하여 몽환적 상태로 내몰고 있다. 급기야 이 몽환성은 현실과 이미지의 구분을 넘어 일상에로 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전이가 확산되면서 삶과 현실의 괴리가 급속하게 진행되면 인간의 삶은 심각한 국면에 처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문화예술의 추락현상도 그 기반이 되는 삶의 리얼리티가 점차 중력을 상실하는 데 기인한다 하겠다.

박경주_프로젝트 음반 "What is life"_2003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삶의 희구, '살림'. 죽임에 대항하고 해방하는 "살림". 이 "살림"에의 지향이 삶의 본래모습이다. 생명의 본래면목(一元的 自存)에서 보면, 태어남과 죽음은 하나다. 나고 죽는 것은 시작과 끝, 서로 대척적 관계의 양극점이 아니라, 우주자연과 생명 본연의 순환질서에 따른 생명활동의 연장이다. 생명은 쉬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 쉬임없이 활동하고 그러한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외화(外化)하고 전환하는 것이 생명의 존재규정이기 때문이다. ● 그런 반면 '죽임'은 부당하게 삶을 저해하는 요소이자, 생명억압을 말한다. 즉, 비생명적 생존조건, 부당한 생명현실이 삶을 압제하는 것이 '죽임'이다. 이러한 '죽임'의 제 경향들과 맞서 싸우고 물리치는 일은 생명보존, 생존유지를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 된다. 이는 곧 제대로 살아있음을 위해 저나름의 "살림"을 사는 생명체의 자기회복, 자기정위의 과정인 것이다. ● 제대로 살아있다는 것은 제각기 제몸에 알맞은 氣로 충일되어 있음을 이른다. 천지만물은 이 氣의 조화에 의하여 생성되고 소멸하며 순환한다. 삶이란 時空을 함께 아우르며 생성과 소멸 사이에 존재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성으로부터 소멸에 이르는 여정에서의 단순한 생존, 물질적 존재태가 아니라 정신과 물질을 동시에 내포하는 "살림"을 사는 삶이다.

백기영_남도까지-생명의 땅 프로젝트_흙, DVD영상-슬라이드 프로젝터 설치_2004

"살림"을 사는 삶이란 다르게 말하면 신나는 삶, 신바람 나는 삶, 신명나는 삶이다. 신명이 난다는 것은 생기로 가득찬, 생명력이 한껏 고양된 상태를 일컫는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틀지우고, 생기찬, 신명나는 삶을 사는 일은 바로 제생명을 체현하는 일이 된다. 신명이 난다는 것은 이렇듯이 사람마다 내재되어 있는 자신의 신령을 스스로 육화시키고 체현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말하자면 神明이란 生氣, 즉, "산 者의 산 氣"다. 그것은 생명의 다른 이름이다. ● 신명이란 알 수 없는 실재로부터 북받쳐 나오는 생의 의욕이자 '생명의 집단의욕'이다. 우리들이 흔히 쓰는 '살리고 살리고'라는 말은 이러한 신명을 북돋우는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신명을 북돋아서 삶을 고양시키는 행위가 바로 '살리고 살리고'다. 너와 나의 구분이 무의미한, 이미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져 존재하지 않는 상태, 그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신명모음', '신명나눔'이 '살리고 살리고'다. 그러므로 집단적 신명이란 삶 그 자체를 이른다. 무궁한 생명의 세계관에서 보면, 삶이란 개체적 변별성에 따라 영위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역동적 관여를 통한 집단적, 공동체적 영위를 기조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살리고 살리고'는 공동체적 삶에 있어서의 '신명불림'이라 할 것이다.

성능경_군침도네_퍼포먼스_2004

삶이 현실적 장애에 부딪히면 흔히 '살'(煞)이 끼었다고 한다. '살'은 곧 '죽임' - 삶을 부당하게 저해하고 옥죄는 요소를 말한다. 이러한 '살'을 풀어서 물리치고 삶의 본래모습을 회복시키는 것- 신명모음, 신명나눔, 신명불림이 바로 "살림"이다. 이와 같이 죽임의 세력, 경향들과 부단히 싸워 이겨내는 일은 어디까지나 '살'을 푸는 일, 즉 '살풀이'를 통해 신명을 되찾는 일이 된다. 그리고 이점은 '살림'의 의미규정상 매우 중요하다. ● "살림"의 경계에 있어 신명불림이 갖는 의미는 우선 스스로 살려낸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다른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서 '살려지는' 것이 아니다. '살려주십시오', '살림을 주소서'가 아닌 끼리끼리 '살리고 살리고'인 것이다. 스스로 삶의 주체, 집단적 생명활동의 주체임을 깨달아 스스로를 끼리끼리 살리는 일이 된다. 인간적 삶이 지향하는 바, '살림'이란 어디까지나 '살림' 자체가 목적이 된다. '죽이고 죽이고'가 아니라 '살리고 살리고'인 것이다. 죽임의 경향, 세력들과 싸우는 일은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닌, 죽임의 경향, 세력들을 물리치되, 그러한 척결을 통해 대척적 우위를 점하는 것이 아닌, 싸움을 통해 원한을 축적하는 과정이 아닌, 원한과 상극을 지양 극복하고 해원상생의 공동체적 삶을 지향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는 곧 "눌리지도 누르지도" 않는 생명의 자주성, 그 "수동적 적극성"을 의미한다. 삶의 주체, 집단적 생명활동의 주체임을 깨달아 스스로를 살려내는 "눌리지도 누르지도" 않는 생명의 자주성 그 "수동적 적극성"이야말로 생명의 본성이며 '살림'의 핵심이요 요체다. 그러므로 '살림'이란 결국 죽임의 세력, 경향들로부터 생명을 지켜서 고양시키는 일이 된다.

임흥순_승리의 의지_무성비디오/6mm/흑백_00:05:00_2004

예술은 삶을 드러내고, 일깨우고, 고양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항상 삶의 참모습에 다가서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삶에 대한 정시는 예술의 책무라 하겠다. 이를 위해 예술가는 항상 생명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의 토대 위에서 생명긍정의 친화성에 입각하여 삶의 멍에를 예술적 무병체험으로 걸머지고 이를 부단히 예술의 세계로 고양시켜야 한다. 예술가가 창출한 삶의 울림은 다시 공동체적 삶으로 보편화됨으로써 예술의 공유화를 통한 '삶의 집합화'와 '예술의 삶으로의 환원'이라는 예술로서의 총체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조미희_100명의 백인한국인_디지털 프린트_2004

보편적으로 인간의 삶은 집단적 문화와 긴밀한 연관을 맺으며 현실을 통해 영위되므로 현실을 떠난 삶과, 삶을 떠난 현실은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 현실은 삶의 공기이자 삶이 뿌리내려야 할 삶의 터다. 그러나 현실이 곧 삶은 아니며, 때로는 삶을 압제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삶을 압제하는 현실은 삶의 저항을 받게 마련이다. 인간의 삶은 객관적 현실의 종속변수로 전락될 수 없으며, 역으로 사회구조에 의해 질서와 가치가 설정되는 인간적 삶의 존재피구속성을 강조하고 이를 획책하려는 기도들에 대한 현실인식-현실쟁투-현실해소의 저항운동이 일어나는 필연이 생명보존의 차원에 위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차기율_땅의 기억_단풍나무, 자연석, 스텐레스, 물, 진동모터장치_720×750×360cm_2003

예술적 무병체험이란 다른 말로하자면 '한'의 공유를 의미한다. 생명의 세계 내에서 '한'은 삶이 현실적 장애에 의해 억눌려 있는 모습이 되며, 또 한편으로는 신명창출의 역동적 계기가 된다. '한'의 축적이 없는 곳에서는 '한'의 극복도 없다. 반복되는 고통과 좌절 속에서 퇴적된 비애의 응어리가 밀어내는 엄청난 힘에 의해서만 '한'은 비로소 소멸되는 것이다. '한'의 소멸은 '살림'으로 가는 길이면서 또 '살림' 자체다. '한'을 깔고 있으면서 '한'을 뚫고 나타나는 역동적 '신명' 속에는 아픔이라는 통과의례가 있다. 슬픔, 고통, 헤어짐, 파괴, 죽음, 등등. 삶의 비극적인 면면을 풀어헤쳐 더불어 나누고 아픔을 공유하는 일, 그것이 바로 '나눔'의 현실적 의미이며 '살림'이다. 그것은 너와 나의 경계가 이미 무의미한 생명의 세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아픔의 나눔, 서로서로 나누어 느끼는 움틀림, 그리하여 공유하는 신명과 '한'. 삶의 나눔. 생명 나눔이다.

천성명_거울 속에 숨다_혼합매체_가변설치_2003

그러므로 '살림'은 우주에 대한 영성적인 인식, 자연에 대한 생태학적, 환경론적 인식,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삶은 분별의 세계가 아니라 생득의 세계다. 그래서 삶의 세계는 세계이되 이미 세계가 아니며, 삶에 대한 여러 인식들 또한 인식이되 이미 인식이 아니다. 삶의 세계는 굳이 이름하자면 체득(體得)이요, 체인(體認)이요, 체현(體現)의 세계라 할 것이다. 따라서 예술 역시 진실로 '삶의 미적체화(美的體化)'다. 그것은 바로 치유와 활생으로 가는 길에 다름 아니다. ● 그런 의미에서 『살림의 경계에서』展은 동시대 한국현대미슬에 있어서 치유와 활생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오늘의 작가 스스로가 자본과 하이 테크놀로지의 역장 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시대성을 '살림'의 의미를 통해 다각적으로 접근하고, 살림의 경계에서 체험하는 삶의 리얼리티를 체현하는 일은 현단계 한국현대미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즈음의 미술이 대개 그렇듯이 테크놀로지와의 융합이라는 미명 아래 굴종을 강요당하거나 아니면 자본의 신전에 엎드려 명맥유지에 목을 매는 한, 한국 현대미술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으로 보인다. 『살림의 경계에서』展은 점차 상실해가고 있는 예술의 의미를 치유와 활생의 의미를 통하여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정체성을 담보하고 이들 작업들이 생산하는 의식과 이미지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활로를 열고자 한다. ■ 장경호

Vol.20040218a | 살림의 경계에서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