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면도 십자가

박종규 회화展   2004_0206 ▶ 2004_0228

박종규_Layers of Two Dimension & Three Dimension_혼합재료_15×15×15cm

갤러리 신라 대구시 중구 대봉1동 130-5번지 Tel. 053_422_1628

평면도 십자가 ● 박종규는 파리에서 공부할 때, 쉬포르 쉬르파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쉬포르-쉬르파스(지지체-표면)는 회화에 대한 일종의 실증적 유물론의 태도에서, 회화란 프레임, 직물, 물감 등으로 되어있다는 명제를 내세웠다. 쉬포르-쉬르파스는 서구의 미술사에서 반복된 일류전 비판의 70년대 프랑스 판이다. 헐리우드를 내세운 미국식 대중문화가 마구잡이로 세계를 제패해나갈 때, 70년대 초에 유럽 회화가 초기 아방가르드처럼 그 물리적 조건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만한 일이다. 이것은 흔히 생각하듯이 그림의 넓은 상상적 세계를 무덤덤한 사물로 축소하려고 했던 것보다는, 그림을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공간으로 확장하려는 유물론적 태도를 뜻했다. ● 내가 보기에, 박종규의 작업에는 쉬포르-쉬르파스와 공유하는 어떤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입방체를 평면도로 제시하거나, 비닐로 늘어지게 만들어서 입체는 평면으로, 평면은 입체로 만든 것은, 쉬포르-쉬르파스의 주제의식과 유사하다. 또 물감을 그냥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실리콘 피막처럼 촉감의 대상으로 만든 것도 그렇다. 이들은 모두 평면이 망막에 흡수되거나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미지보다는 만질 수 있는 물건에 가까운 것이므로, 쉬포르-쉬르파스의 명제에 충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종규의 작업은 쉬포르-쉬르파스보다 훨씬 심미적이다. 여기서 심미적이라는 것은, 그냥 예쁜 오브제라는 뜻도 되지만(아마도 그럴 경우에는 비판이 되겠으나), 섬세하고 감각적이라는 말에 가깝겠다.

박종규_Layers of Two Dimension & Three Dimension
박종규_Layers of Two Dimension & Three Dimension_혼합재료_55.5×61cm

섬세하고 감각적이라는 말이나 예쁘다는 말이나 그것이 그것으로 들릴 수 도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섬세하고 감각적이라는 것은, 오히려 이 작업들이 상당히 표현적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쉬포르-쉬르파스와 반대되는 면이다. 아그네스 마틴의 작업을 볼 때, 우리는 손으로 그린 연필선의 떨림 따위를 보면서, 이 그림들이 단순히 격자(Grid)와 같다고 할 수 없듯이, 박종규의 작업도 최소한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회화적 요소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리콘이 매끄럽게 공업적인 표면처럼 처리되지 않았으며, 연필선이 칠해진 평면의 틈을 비집고 묘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그러니까 일반 회화에서 나타나는 '화가의 몸'이 배제되기보다는, 섬세한 긴장 속에서 역설적으로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캔버스가 노골적으로 사물화 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된 물질이 오히려 일종의 신비감을 갖춘다. ● 이러한 '예술적'인 측면은, 실리콘처럼 유기물과 무기물의 중간에 있는 듯한 재료나 반투명의 비닐의 사용에서도 느껴지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십자가와 같은 아이콘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물론 여기서 십자가는 육면체(정확히는 벽면에서 튀어나온 오면체)의 평면도이지만, 그는 이것이 십자가처럼 보인다는 점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종교적 아이콘은 완벽한 각도와 평면을 지닌 육면체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하자면 수학이나 우리 머릿속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에 의해, 신비감의 다소간 문학적인 근거를 얻게 된다.

박종규_ Layers of Two Dimension & Three Dimension_혼합재료_83×58cm
박종규_Layers of Two Dimension & Three Dimension_혼합재료_87.5×47.5cm
박종규_Layers of Two Dimension & Three Dimension_혼합재료_90.5×71.5cm

2001년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그의 작업은, 그래서 그런지 심리적인 공명을 자아내고, 어떤 작업은 특히 심리적 외상(trauma)의 표현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런 관심에서 보면 사진 위에 비닐조각을 붙인 세 개의 작품이 특히 흥미롭다. 그 중 하나는 시멘트 벽면이 드러난 천정을 찍은 사진 위에 비닐과 테잎 조각을 붙인 것이다. 이 작업에서 역시, 비닐과 종이 테잎이 사진의 트릭을 재치 있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입체와 평면의 게임을 다른 형식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도 십자가가 등장한다. 여기서 십자가 형태는 이미 사진 안에 있는 건물의 구조를 반복한 것이며, 비닐은 마치 딱딱한 콘크리트 구조물의 상처를 감싸고 있다는 듯이 십자가 형태를 감싸고 있다. 다른 두 개의 사진 작업도 이와 비슷한데, 하나는 사진 찍혀진 벽의 재질이 강조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페인트칠이 강조된 것이라서, 십자가 형상에 각각 다른 에피소드(여기서는 평면, 입체, 회화 등에 대한 참조들로 미술사적이고 관념적인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는)를 결합하고 있다는 점만이 다르다. 이 사진+비닐 시리즈에서, 십자가 형상은 육면체의 평면도에서 거의 독립해, 약간 비극적인 상징처럼, 비의적인 문자처럼 보인다. ● 1999년에 반투명의 실리콘고무 피막만으로 만든 일련의 오브제들을 보면, 그의 작업이 어떤 허무감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나로서는 그의 '실패작'이라고 생각되는 실리콘으로 떠낸 사람의 형상에서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또는 성공작으로 보이는 벽에 걸려있는 수건 같은 형상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가 평온한 수학적 이상세계의 불가능성에 관하여 말하려고 하는 때에도, 이 작업들에는 어떤 비극적 정서가 배여 있다. 이러한 비극적인 정서는 드물게는, 일상에 대한 재담으로 나타나기도 하고(두개의 열쇠사진), 보통은 수량적인 인식과 물질의 성질 사이의 불일치(같은 면적을 다른 소재로 만든 작업들)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는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사물에서 '쌍'을 발견한 98년 작 사진들처럼, 주변에 편재하는 이원적 구조에 대한 강박으로도 나타난다. 나는 너무 하나의 주제로 한 작가의 전작을 소급하여 꿰뚫는 비평에 의구심을 갖지만, 그의 95년 작업이 여성과 남성 이미지를 엇갈리게 겹쳐놓은 것에서 이러한 주제가 그에게 꽤 오래된 것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박종규_Layers of Two Dimension & Three Dimension_혼합재료_51×76.5cm
박종규_Layers of Two Dimension & Three Dimension_혼합재료_51×76.5cm

'이러한 주제'란 이 동일성의 실패, 여러 가지 엇갈림이다. 우선 입체와 평면이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림의 재료와 그림이, 동일 면적과 다른 물질이, 빈 것과 찬 것이, 두개의 열쇠 구멍이, 모든 쌍들이 엇갈린다. 그가 발견한 쌍에는 예컨대, 의자와 책상이 붙어 있는 강의실 학생용 걸상이 있다. 이것은 책상과 의자의 '결합'처럼 보이지만, 책상과 의자가 어색하게 붙어있는 쪽에 가까워서 의자로도 책상으로도 불편한 게 이 특이한 걸상이다. 이 모든 엇갈림이란, 이를테면 이 걸상의 비애와도 같은 것이다. ● 박종규의 작업은 회화나 시각, 또는 사물을 반성하려는 점에서 70년대 서구미술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분석학적인 관심사로 보아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는 인식의 구멍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면서, 그것을 심리 외상적인 이미지와 연결시킨다. 나는 이러한 양가적인(ambivalent) 경향이, 나쁘게 보면 하나의 타협이며 좋게 보면 풍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은 현관문의 아래 위로 달린 열쇠구멍에 맞는 열쇠를 찾는 것처럼, 확률의 문제 만은 아니다. 이것이 한편 의지의 문제인데, 그가 열쇠에 조그마한 표시만 하더라도 열쇠를 혼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박찬경

Vol.20040219a | 박종규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