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aint-er

댓-그림자(者)展   2004_0225 ▶︎ 2004_0307

박윤경_두통 없이는 사랑도 없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9×59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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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225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박윤경_서루나_윤희경_이지연_정경희

덕원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4층 Tel. 02_723_7771

이 전시는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생각을 그리고 삶을 그려내는 이들이 그리기를 통해 대화를 만들어내고 또 덧대어 가는 장(場)인 셈이다. 이것이 '댓-그림자(者)'라는 전시제목의 1차적 의미이다. 왜 이들은 '그리기'에 몰두하는 것일까? '회화의 죽음, '주체의 죽음'이 회자되고 캔버스의 흰 화면은 회의와 번민, 패러디와 분열증적인 흉내내기의 장으로 바뀐지 오래다. 더 이상 나만의 것이라 외칠 수 있는 것도 없는 듯 하며, '순수함(purity)'과 '진실성(authenticity)'은 이질적으로 혼성화된 파편적 이미지들에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제 우리의 의식과 생각, 그리고 몸마저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타자의 언어와 그들의 시선에 공공연히 의존하는 양상이다. 하지만, 여기 모인 이들은 이를 시위하는 듯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또 그리는 가운데 붓이 화폭에 남기고 간 흔적들, 끊임없이 나타나고 부유하며 다시금 사라져버리는 흔적들을 탐닉한다. 그 흔적은 사고와 이미지의 간극에서 알 수 없지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에로 이들을 끌어들이는 듯하다. 또한 그 흔적은 이들이 미처 말로 하지 못한 것을 여운으로 남기며, 상상의 공간을 열고, 사각으로 구획된 대화의 틀에 겹겹이 살을 붙인다. 그 가운데 이들은 틀 속에 갇혀버린 '나,' 익숙한 '나'를 벗고 미처 알지 못한 낯선 모습의 '나'를 발견해 나간다. 새로이 발견된 '나'는 때로 타자와 구별되기조차 힘든 모호한 모습이다. 이는 당황스럽고 막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의 일부임을 알기에, 이들은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투과하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기꺼이 끌어안는다. 태연한 척 애써 거부하지 않은 채 모호한 '나' 그대로를 화폭에 투사하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갈구하는 이 기나긴 여정에는 두려움과 외로움이 수반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이들만의 희열과 애착, 더 나아가 삶 그 자체가 담긴다. 그러하기에 이들은 그리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 이렇듯, 이 전시에 모인 화가(painter)들은 분명 공통된 시대적 화두와 고민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들 각자의 그리기 사이에서 눈에 띠는 형식적 유사성 혹은 내적 결속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을 읽어내는 나름의 사고방식과 말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그것을 표현해 내는 형식언어가 다를 수밖에 없기에, 다섯 명의 회화 작업을 일괄적이고 체계적인 지형도로 그려내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댓-그림자'展은 서로의 회화에 답하는 댓구의 형식을 띤다. 더 정확히는, 하나의 그리기에 또 다른 그리기가 뒤따르며 덧붙여지는, 즉 하나의 대화에 또 다른 대화가 덧대어지는 형상을 띤다는 것이다. 그 대화의 연결 고리는 매우 단단한 결속을 이루다가도 때론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느슨한 것이 되기도 한다. 또한, 공통된 이야깃거리를 찾았다가도 또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 고리와 고리가 연결되어 있는 형상은 마치 그들 자신이 드리우는 겹겹의 그림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밟고 있는 형상과도 같다. 그리고 이를 전시공간과 연결지어 생각한다면, 각각의 캔버스 화면이 드리우며 흩어지는 그림자들이 서로 다양한 모습으로 맞물려 풍성한 시각적 대화를 창출하고 있는 듯한 모습인 것이다. '댓-그림자'들의 이 다채로운 시각적 맞물림 속에서,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화가들의 정체성에 대한 갈망, 그리기를 지속하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고민과 즐거움 등 진솔한 이야기들을 눈으로 들어보며, 덧 대어나갈 대화의 실마리를 하나하나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박윤경_사과보다 향기로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9×31.8cm_2004

우선, 대화를 여는 것은 윤희경의 이미지들이다. 그녀의 이미지들은 시간의 흐름에 내맡겨 진 채 생성되고 소멸되는, 화면 위를 부유하듯 스치는 붓질에 의해 드러나고 또 사라져버리는 모호한 형상들이다. 화면 속 꽃과 풀포기의 가녀린 떨림을 통해, 우리는 사라짐의 운명을 내장한 존재의 나약함, 그리고 어느 것 하나 고정될 수 없는 불안정한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주변 모든 생명체의, 그녀 자신의, 혹은 회화(painting) 자체의 흔들림일 수 있을 것이다. 대상과 주체, 그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련하게 흩어지며 이내 소멸과 무(無)를 상징하는 흑암(黑暗) 속으로 덧없이 흡수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것이 끝인가. 윤희경은 우주의 본성 앞에 선 존재의 나약함만을, 꺼져가는 생명을 되돌릴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만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인가. 그녀는 왜 이 사라짐을 화폭에 옮겨놓으려 하는가. 여기에는 그녀의 '그리기'에 담긴 모순과 역설이 있다. 사라져가는 시간의 흔적이라도 굳이 화면 위에 붙잡아 놓으려는 그녀의 붓질에는, 실상 그 찰나마저도, 그 생명의 실마리라도 붙잡고 싶은 간절함이 담기기에 그러하다. 결국, 윤희경은 흩어짐을 그려내며 결집을 꿈꾸고, 소멸을 그려내며 소생을 꿈꾸는 역설적인 그리기를 지속하는 셈이다. 이는 어찌 보면 캔버스 위에서 '파괴,' '죽음,' 그리고 '허무'를 말 하고자는 모든 회화들에 내재된 파라독스일 게다. 사라지는 미미한 흔적들로 가득한 그녀의 회화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흔들림은 어느새 사각의 틀을 벗어나려는 미세하지만 강한 전율로, 그리고 고정될 수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은 끊임없는 변화의 가능성으로 열리게 된다. ● '변화의 가능성을 열고 사각의 틀을 벗어나게 하는 것,' 이것이 정경희가 생각하는 미술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우리가 늘상 '진실'이라 믿어온 의미화된 구조, 언어와 이미지의 규범적 관계에 주목하여 그 자연스러움을, 그 당위성을 흔들어 놓으려 한다. 즉, 자신의 그리기를 통하여 우리의 사고와 인식에 틈을 벌리고 '아는 것'을 보는 법이 아닌 '보는 것'을 새로이 인식하고 상상하는 법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쫑긋 세운 긴 귀-토끼, 빨간색-사과는 더 이상 '올바른' 혹은 '유일한' 관계항이 될 수 없다. 그 답은 하나가 아닌 다수가 될 수도 있음이다. 이제 그 답을 찾아내는 것은 그녀의 그림 앞에 선 관람자 각자의 몫이다. 벌려진 틈새 사이로 상상의 공간을 열기 위해, 우리는 머릿속에 육중하게 내려앉은 고정관념을 무(無)의 상태로 비워내야 한다. 그리고 난 후 필요한 것은 마그리트의 '엉뚱함'과 같은 것이 아닐까. 눈앞에 펼쳐진 무한한 자유연상(free association)의 장(場) 위에서, 자신을 엉뚱한 상상에 내맡긴 채 전혀 다른 세계로 날아올라 보는 것은 어떨까. 마치 화면 한 귀퉁이에 우연히 쏟아져 흩어진 검은 형상이 잔뜩 웅크린 토끼의 모습이 되듯, '나는 토끼가 아니다'를 소리 없이 외치다 이내 숨겨져 있던 자신의 날개를 한껏 펼치며 날아오르려 하듯 말이다. 물론 '진실'이란 이름으로 새겨진 것들을 한순간에 지워내고 이렇듯 비상(飛上)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게다. 토끼가 가볍고 부서지기도 쉬운 잠자리 날개로 쉽사리 날아오르기 힘든 것처럼…그러나 정경희의 화면에서, 잠자리 날개는 사각의 좁은 공간을 벗어나 전시실의 공간으로 한없이 뻗어나갈 것만 같다. 비록 희미하고 가느다란 선이 날개의 마디마디가 되며, 또 그것이 화면을 가득 메우는 커다란 날개가 되어 온전한 비상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오랜 인내가 요구됨에도, 그녀는 기어코 검고 육중한 것들을 날아오르게 하려는 듯 날개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정경희의 '날개달기'는 결국, 상상력이 지니는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희망이 담긴 몸짓, 끝없는 그녀만의 날개짓인 셈이다.

정경희_느림보 상상_혼합재료_50×90cm_2004
정경희_Re_혼합재료_30×25cm_2004

이지연은 '상상의 날개'를 달고 중세(Middle Age)로의 시간 여행을 떠난다. 익숙한 현실을 떠나 새롭고 낯선 세계 속에서의 '탐닉'과 '추적'을 통해 세상을 새로이 읽는 법을 배우고, 또 자신만의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까닭이다. 이것이 그녀만의 '날개짓'이며, 동시에 미술가로서 한 사회의 상상체계를 형성해 나가고자 하는 능동적인 참여의 방식이다. 그러나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꿈을 안고 여행길에 나선 이 방랑자는 정해진 행로도, 목적지도 없이 끊임없이 헤매인다. 이내 외로움과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 고독과 불안을 반영하듯 변형, 과장, 파편화된 인물, 동물/괴물들은 화면 위로 불쑥 떠올라 부유하다 어느새 자기만의 영역으로 고립된다. 또 이 조각난 이미지들은 일관된 서술적 연결고리를 상실한 채 출몰하고 흩어지며 하나의 낯선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한 화면 속에 다양한 장면이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파노라마적 구도는 흡사 중세 필사본 삽화의 것과 닮아 보인다. 그러나, 성서의 내러티브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혹은 그 중요도에 따라 구성해 놓은 중세 삽화의 유기적 상징체계와는 달리, 이지연의 화면 속 이미지는 단일한 이야기 구조로 엮어지는 법이 없다. 오히려 이미지의 파편은 분산과 결집, 고립과 확장, 유사와 대립의 구조를 번복하며 겹겹이 새로운 의미의 층을 쌓아나간다. 이러한 이미지의 파편들 사이에서 작가 자신은 거대한 동물들에 비해 더없이 작고 나약해 보이는 중세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의 필사가로 형상화된다. 그녀의 본래 일과는 선대 필사가들이 전수해 준 도식에 따라 주어진 것들을 그대로 모사/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로 한 걸음씩 내딛는 모험가의 도전과도 같이, 그녀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조각난 상상 속 이미지를 화면 위에 던져놓듯 기록해보며 끝없이 이탈을 꿈꾼다. 비록 이탈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분열과 모호함으로 가득할지언정,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복제와 창조, 실재와 허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새로움을 욕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이지연은 '작가의 죽음', '주체의 분열'이 회자되는 오늘날 젊은 화가들의 자화상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서루나_Lortia Lempicka Luna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9×31.8cm_2004
서루나_불투명, 시선의식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3.4×24.2cm_2004

이지연이 중세시대 스크립토리움의 번민하는 필사가의 모습을 통해 예술가 주체의 분열과 정체성에 대한 욕망을 담아내려 하였다면, 서루나는 현실세계로 돌아와 후기자본주의시대 상품화된 여성성의 가장 대표적인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다양한 광고 속 여성 이미지에 눈을 돌린다. 광고 속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이 여성들은 타인의 시선을 거부할 수 없는 숙명처럼 체화(體化)한 채, 오로지 바라보는 이들의 선망을 사려는 목적만으로 분열된 다수의 자아를 자신의 내부에 한껏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서루나는 이 여성들의 모습에서 현대 여성의,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 분열과 혼돈을 읽어내고 있음이다. 그 분열된 자아를 표상 하듯, 그녀의 연작 「모호한 순환 (ambiguous circulation)」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신체, 자아-형상은 이중노출 사진과 흡사하게 엇갈리고 미끄러지며, 무엇이 상(象)이고 무엇이 배경이라 할 것 없이 모호하게 순환한다. 이는 동어 반복적인 자기복제를 거듭하며 겹쳐지고 흩어지는 가운데 미묘한 '차이'들을 생산해내고 있는 형상이다. 서루나는 이를 통해 자아가 분명한 경계를 지닌 하나의 통일체가 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며, 실상 타자를 포함한 분열적 구성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비판적 자각을 사뭇 냉담한 방식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왜 그녀는 굳이 광고 속 여성 이미지, 즉 주체가 사라져 버린 공간 속에서 타인의 기호에 의해 조작되는 가상이미지만을 재차 담아내려 하는가. 왜 그러한 가상성과 익명성에 기대어 냉소적 바라보기를 지속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또 다시 '그리기의 역설'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비록 그녀가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는 광고 속 여성의 분열된 모습을 담담하게 재현해 내지만, 흩어짐과 겹침을 번복하는 그녀의 붓질은 애매하고 불안정안 허상이라도 붙들고 싶다는 초조한 욕망, 정체성에 대한 간절함을 반복해서 노출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즉, 서루나의 화면에는 자아를 둘러싼 외부세계의 흘러듦과 간섭, 그에 의한 정체성의 수정, 변화, 그리고 분열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 가운데 미약해진 정체성 이나마 끝없이 갈구하는 작가 내부의 모순적 충돌과 복합적 감수성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는 셈이다.

윤희경_흔들리는..._캔버스에 유채_72.7×181.1cm_2004
윤희경_작은 흔들림_캔버스에 유채_25×25cm_2004

박윤경 또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늘 접하는 현대 광고 이미지들을 통해 자신, 그리고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나 서루나의 화면에 주체의 분열에 대한 슬픔, 연민, 무기력함과 냉소가 복잡하게 얽혀있다면, 박윤경의 화면은 오히려 즐거움, 밝음으로 가득하다. 홈쇼핑 잡지 광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신기한 일제 다용도 가위, 친구의 마지막 처녀파티에서 마신 와인, 그리고 그녀의 두통 해결사 아스피린 등 생활 속에서 쉽사리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은 화면 속에 경쾌하게 시각화되어 있다. 이 차용된 이미지들은 소비상품으로서의 특성을 굳이 여과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작가가 곁들여 놓은 간단한 제품설명과 함께 우리 앞에 놓이기도 한다. 이 즈음 되면 유쾌해 보이기만 한 박윤경의 의중이 궁금해 질 것이다. 그녀는 현대 소비사회가 제공하는 풍요로움, 망막을 현현하는 시각적 유포리아 속에서 앞선 화가들의, 그리고 우리 시대 화가들의 정체성 찾기의 고민을 한켠으로 제쳐두고 있는 것일까. 오로지 가벼움과 경쾌함으로 머릿속 가득히 들어찬 뿌연 안개를 말끔히 걷어내려는 것일까. 여기서 문제는 다시 '그리기'로 소급된다. 오리지널리티를 부정하듯 끝없이 복제되고 유통되는 상품 이미지들을 담아내지만, 박윤경의 '그리기' 역시 자신만의 이야기,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이 담겨지기를 희망하는 역설적 제스처라는 것이다. 단지, 그녀가 뒤집어 놓으려는 것은 세상을 향한 바라보기의 방식이다. 만약, 차용과 복제를 통한 틀 깨기가 현대 그림 그리는 이들이 지닐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라면, 그녀는 이 모순된 상황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되려 즐겁게 받아들여 보려는 심산인 것이다. 그리고는 쏟아지는 현란한 이미지와 물질, 정보의 범람 속에서 그것들을 거부할 수 없다면 그 안에서 헤엄쳐보자고 당당히 권한다. 무엇이 나의 것인지, 무엇을 그려내야 하는 지 때론 아득해 지지만,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다양함과 풍요로움에 대한 희망으로, 순간순간 우리 앞에 놓여지는 온갖 것들을 새로운 행복의 아이콘으로 변화시켜 보자는 얘기다. 그녀가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해 택한 마법은 '스스로 그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 마치 작은 물고기들이 커다란 상어를 만나면 군집을 이루어 보다 더 큰 물고기의 형상으로 상대를 제압하듯 말이다. 더 많은 이미지로, 더 많은 이야깃거리로 무장하고 망망대해로의 항해를 시작하려는 그녀는 우리를 즐거운 상상으로 가득한 이 여행길에 초대하려 한다. 이제 그 결정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있다.

이지연_A scenery_캔버스에 혼합재료_91×116.8cm_1999
이지연_All that glitter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162cm_2003

현실의 삶 속에 실재(the real) 없는 그림자들(simulacra)만이 존재한다는 한 저명한 프랑스 철학자의 언급은 이제 우리 시대의 공공연한 화두가 되었다. 하지만 빛이 닿지 않는 곳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제 홀로 존재할 수도 자신의 형상을 결정지을 수도 없으며, 또 실재하는 내가 있기에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 이 전시에 모인 그림 그리는 사람들인 듯 하다. 이들은 비록 빛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그것이 얼마나 강한지, 혹은 미약한지 알 수 없지만 발 밑에, 그리고 흰 캔버스에 드리워지는 그림자, 자신과 어딘지 닮아있는 상(象)들을 바라보며 '나'의 존재를 각인해 나간다. 그 상들은 시시각각 다른 모습이다. 단일하고 강한 빛이 때로 짙고 어두운 상을 드리울 때면 나의 존재는 더욱 무겁고 절실하다. 하지만 그 무게는 흩어진 빛무리 속에서 한층 가벼워진다. 발 밑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희미한 반 그림자의 파편들만이 셀 수 없이 흩어진다. 빛은 때로 내 몸을 통과하며 그림자를 거두어 간다. 그 가운데 세상은 나이고 나는 세상이 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것은 분열, 혹은 부재(不在)에 대한 절망감이라기 보다 내 몸을 흐르는 빛에 대한 유희일 수 있다. 세상은 나를 통해 굴절된 모습으로 다시금 열린다. 또한 나와 이웃한 이의 빛 그림자가 나의 것과 겹쳐지며 대화한다. 이웃한 이들이 늘어날수록 빛의 대화는 풍성하게 덧대어질 것이다. ■ 곽준영

● 위 글중 서루나의 작품에 대한 설명은 황재연의 글, 「정체성을 욕망하는 욕망」(2002)에 근거하여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Vol.20040222a | 댓-그림자(者)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