딛고 선 땅

류연복展 / YOOYEUNBOK / 柳然福 / printmaking   2004_0421 ▶ 2004_0427

류연복_딛고 선 땅_다색 목판화_2004

초대일시_2004_0421_수요일_05: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임천고치(林泉高致)의 문화생태학적 실천 - 1. 풍경 지도와 마을의 생태학 ● "정면의 시내와 산과 나무숲이 돌고 깎아지고 구불구불 뻗어나감에 그 풍경을 펼쳐 베풀어나가되 지겨워하지 말고 자세하게 그려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가까운 시야에서 충분히 살필 수 있도록 대비하기 위함이다. 바깥쪽의 평원에 뾰족한 산이 거듭 겹쳐짐에 그 풍경을 잇달아 아득하게 얽어나가되 지겨워하지 말고 먼 곳에까지 이르도록 그려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최대한 드넓은 시야에서 끝까지 조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 가까운 곳에서 먼 곳에 이르기까지 시내와 나무와 돌과 오솔길들 하나 하나를 지겨워하지 말고 자세하게 그리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세하게 그린 것을 목판 위에 붙이고 이를 다시 "지겨워하지 않고" 자세하게 파고 깎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2년 가을 안성에서 예기치 않게 화가 류연복을 만나 그의 작업실에 들렀을 때, 그가 자기 동네 풍경을 목판으로 새겨 놓은 큰 작품들을 보고 불현듯 뼈를 깎는 듯한 저 힘든 노동이 지겹지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판화는 선 하나 하나를 만들어내기가 그림보다 힘이 들지만 생략이 용이하여 작은 크기로도 큰 풍경을 압축해 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목판화의 압축형식을 굳이 풀어내어 큰 풍경을 그림처럼 크고 자세하게 새겨낸다는 것은 정말 지겹도록 각고의 노력을 요하는 것이다. 아마 그저 지나쳐 가는 풍경이었다면 굳이 이렇게 힘든 노력을 쏟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사진 '한 방'에 담아 버리면 그만인 그런 풍경들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류연복이 찍어낸 그 풍경들은 이제 그가 근 10년이 넘게 살고 있는 자기 동네의 풍경이고, 대상화된 풍경이 아니라 매일 보고 걷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삶의 터전이자 자신의 체취가 육화된 장소인 것이다. 그의 외부에 대상화되어 있는 경관이 아니라 그를 에워싸고 심금을 울리며 시선을 사로잡는 바람과 햇살과 별, 온갖 냄새와 소리들로 웅성거리는 물과 숲과 오솔길들로 주름지고 펼쳐진 풍광인 것이다. 그것은 눈으로 재단할 수 있는 기하학적인 공간이 아니라 육체와 마음이 함께 교감하는 살아 숨쉬는 장소이다. 그렇게 오랜 교감이 축적되어 있었기에 최대한 드넓은 시야와 최대한 자세한 조망을 함께 유지하며 마을의 오솔길과 논과 밭, 집들을 품고 있는 주름진 산들로 가득 찬 마을 전체를 목판에 새기는 노고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 서구적인 일점 원근법은 이렇게 두터운 시간의 켜를 안고 있는 육화(肉化)된 '장소성'을 구현하기에 적합한 형식이 아니다. 오솔길을 걸어가면서 바라보는 경관은 고정 카메라로 보는 경관과는 다르게 시점이 시시각각 변화한다. 이렇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점을 가지고 한 장소에서 출발하여 고개를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온 시각적 경험 전체를 그려낼 수 있는 방법은 전통적인 지도 형식의 풍경화 밖에는 없다. 우리 전통의 지도 그림을 보면 바로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위에서 내려보는 약도처럼 평면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각 세부에는 전후좌우에서 바라보는 다(多) 시점의 경관들이 배치되어 있다. 또 크기 역시 원근법의 규칙에서 벗어나 중요한 것은 크게, 그렇지 않은 것은 작게 그려진다. 또한 원근법에서는 후경은 희미하게 그려지고 전경이 자세하게 그려지지만 지도식 풍경화에서는 모든 세부가 "지겹도록" 자세하게 그려진다. 마을의 곳곳과 크고 작은 산과 계곡, 나무들과 오솔길 모두가 소중한 체험의 장소들이므로 이 모든 것은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외부사람이 보기에는 지겹도록 세세히 형상화되는 것이다. 육화된 장소성에 배어든 삶의 내용의 실체가 지도식 풍경화라는 독특한 그림의 표현 형식을 배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류연복은 "민중적 삶이 배어든 민족적 형식의 구현"이라는 80년대 민족민중미술의 과제를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셈이라 하겠다.

류연복_딛고 선 땅_다색 목판화_2004

물론 그가 구현하려는 최근의 그림들은 80년대 민중미술처럼 전투적인 그림들이 아니라 마을의 생태지도와도 같은 평화로운 그림들이다. 80년대 그의 그림들에는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 폭력에 대한 저항의 형상들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었지만, 이제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마을의 산과 들, 나무와 새, 오솔길과 논밭과 같은 인간적 체취가 녹아 있는 자연이다. 물론 마을의 생태지도 내부에도 실제로는 민중생활의 아픔과 좌절, 기쁨과 희망이 짙게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그 아픔과 그림자들은 전면에 부각되지 않고 후경에 배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 대신 전경에 드러나 있는 것은 마을 전체의 생태지도이다. 이미 다양한 관광지도도 있고 자세한 축적지도가 있는 데 굳이 전통적인 형태의 이런 생태지도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 그 이유를 좀 더 따져 보면 지역의 생활정치에 맞닿아 있다. 그가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은 서울에서는 큰 관심을 일으키고 있는 "탄핵 반대" 운동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불필요한 소각장 건설에 대한 반대운동에는 매우 적극적이라고 한다. 지역생활의 개선에 관한 의제를 둘러싸고 생활정치가 부각되고 있는 셈이다. 지역의 마을 단위에서는 대통령 탄핵보다는 지역의 환경을 오염시키고 생활에 미치는 악영향이 큰 불필요한 소각장 건설이 더욱 중대한 문제일 수 있다. 이런 유형의 난개발을 막고 개발을 하더라도 마을의 생태계를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민중생활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개발정책을 선별하는 일은 지역발전의 제일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민중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류연복의 마을 지도는 이런 점에서 민중적인 생활정치적 의제를 누구나 알기 쉽게 가시화 하는 작업에 해당된다. 그가 80년대와는 다른 오늘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민중미술의 과제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실천에 옮기고 있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류연복_딛고 선 땅_다색 목판화_2004

2. 낮은 자세와 큰 풍경의 존재론 ● 2년전 그는 이런 형식으로 안성 마을 전체를 지도형식의 풍경화로 만들어 전시회를 열겠다고 했으나, 그간 사정이 있어 그가 구상했던 마을 지도 전체를 완성하지 못하고 이번 전시회에서는 그 구도를 부분적으로 선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지도 전체가 완성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번 전시회에서 돋보이는 또 다른 그림은 숲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 본 광경을 찍은 그림이다. 매우 드문 경우지만 가끔은 느껴보는, 숲 속에서 하늘을 올려 볼 때의 경이로운 체험의 순간을 대면케 하는 이 그림은 판화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감동을 전해준다. 한 순간 보고 지나치는 사람에게는 생생함을 전달해주는 것으로 그칠지 모르나 작가는 여기서도 지겨울 정도로 자세하게 그림의 모든 세부를 파내는 노고를 거듭했을 것이다. 여기서 색채의 스팩트럼은 흰 여백-녹색의 나뭇잎-검은 나무줄기와 기둥이라는 단순한 3색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판화라는 특성으로 인해 일반적인 회화와는 달리 더욱 강한 콘트라스트를 이루어내고 있다. 특히 흰 여백은 문자 그대로 어두운 숲에서의 환한 햇살을 강력히 환기시킨다. 이 때문에 바람(風)과 태양빛(景)을 지칭하는 풍경의 본래적 의미가 되살아나는 것 같다. 하지만 흑백 판화가 지닌 콘트라스트를 녹색을 사용하여 3중화함으로써 아주 단순한 장치로 숲의 어두움과 밝은 빛이 시원한 바람과 함께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다성적 화음을 발화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류연복_딛고 선 땅_목판화_2004

앞서 언급했던 마을지도가 안성시 내의 작은 동네 마을마다의 장소성의 특색을 마스터 샷(master shot)의 시점에서 보여준 것에 해당한다면, 이 숲 그림들은 마을 주변의 산과 숲에서의 경험의 한 순간을 클로즈 업(close-up) 한 것처럼 보인다. 또 마을 지도가 전통적인 지도형식이었다면, 숲 그림은 아래에서 위를 올려보는 앙각(low angle)의 현대적인 영화적 시각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이질적인 체험은 마을의 모든 장소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며, 매순간의 시각적 경험의 차이를 작가가 의미 깊게 주목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특이한 것은 마을 지도가 눈높이보다 높은 위치에서 눈높이로 체험한 풍경들을 종합한 거시적 풍경이라면, 숲 그림이나 벼이삭을 그린 그림들은 눈높이를 훨씬 아래로 낮춘 그림들이라는 점이다. 추수가 끝날 무렵 논바닥에 서 있는 벼 이삭이 옥수수처럼 크게 보이는 것은 시점을 마치 벌레 수준처럼 낮추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특이한 풍경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화가가 자신의 시점을 땅 아래로 겸손하게 낮추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점을 낮출수록 모든 존재가 커보이게 마련이며, 감사와 존중의 마음도 커지게 마련이다. ● 이렇게 섬세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는 시점은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그린 그림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수 백 마리의 새 떼가 대오를 지어 날아가는 장관을 포착하면서도 새 한 마리 한 마리 모두가 지겨울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고, 각 새들이 취하는 자세와 간격도 아주 미세한 차이들을 유지하고 있다. 이 세밀하고도 전체적인 대오를 목판에 하나 하나 각인한다는 것은 바로 숭고한 마음으로 자연에 대해 경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산수를 그리는 데에는 법이 있다. 넓게 펴서 커다란 그림을 그리더라도 남음이 없게 그리고 작게 줄여서 작은 경치를 그리더라도 모자람이 없게 그린다. 산수를 보는 데에도 법이 있다. 숲과 시내(林泉)의 마음으로 다가서면 가치가 높아지고 교만과 사치의 눈으로 다가서면 가치가 떨어진다."

류연복_딛고 선 땅_다색 목판화_2004

3. 시와 그림, 미술과 생활의 인터페이스 ● "시는 형체 없는 그림이요 / 그림은 형체 있는 시이다" ● 현대에 와서는 시와 그림의 분리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 전통에서 시와 그림은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낸다. 훌륭한 경관은 시를 낳고, 시가 그림을 부르며 다시 그림은 시를 촉발시킨다. 이런 맥락을 떠 올려 보면 류연복의 작은 판화들이 시서화 삼위일체의 전통을 간결한 형식으로 되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취하는 방식은 단순히 전통을 복원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있다. 「NO WAR PEACE」, 「벙어리 장갑」, 「겨울철 말린 호박」에 간결한 시어를 붙인 그림들은 전시용 그림이기도 하지만, 티셔츠의 그림으로도 쓰여질 수 있고, 피켓 그림으로도 쓰여질 수 있는 다중적 기능과 형식을 함축하고 있다. 화조화나 사군자 같은 형식의 그림과 시의 결합도 미니멀리즘적인 현대적 감각에 입각해 있어 따분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와 같은 시도는 류연복만의 장기는 아니다. 80년대 판화운동의 기수 중의 한 작가인 이철수는 오래 전부터 목판으로 미니멀리즘적인 형태의 선불교적 시화를 선보였고 낡은 것으로 여겨졌던 목판화 형식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어내 사람들을 놀라게 한 바 있다. 그러나 이철수의 작품이 지나칠 정도로 경쾌하다면 류연복의 작품은 그의 생김새마냥 투박한 데가 있다. 이런 투박한 힘과 단순한 구도가 잘 맞아떨어지면 장대비가 쏟아지는 여름 풍경을 그린 「장마」 같이 목판화의 선 맛을 함축적으로 잘 드러낸 그림이 나오기도 한다.

류연복_서운산-여름_다색 목판화_70×150cm_2004

물론 이런 그림들은 현대미술의 제도적 틀에 비추어 보면 장식적인 소품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미술의 제도적 틀이라는 것 자체가 감상을 위해 작품을 생활의 맥락에서 분리시킨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이 미술 행위의 초역사적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미술사의 더 긴 지평에서 조망하자면 다른 한 축으로 미술과 생활, 미술과 정치, 시와 그림의 인터페이스의 긴 역사가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류연복이 젊은 시절 정열을 불태웠던 민중미술운동 역시 그와 같은 긴 역사적 맥락을 재활성화하려 한 시도였다. 물론 90년대에 들어 미술과 정치의 활기찬 인터페이스의 흐름은 사그라 들었고 민중미술운동은 일단락을 지었다. 그러나 90년대를 경과하면서 80년대의 역동적 에너지는 미술의 개념이 확장되고, 정치의 개념과 실천형태가 확장되는 가운데 시각문화와 생활정치(life politics), 성정치(sexual politics), 생태정치(eco-politics), 문화정치(cultural politics)라는 확대된 지평 위에서 다시 만나기 시작하고 있다. 아직 이 만남은 산발적이며 소수적이지만, 사회운동의 다각화와 제도정치의 스펙트럼이 확대되면서 서서히 활기를 띄우고 있다. 이 과정에서 80년대 한국사회를 들끓게 했던 정치적 에너지가 이제는 문화적인 형태로 재구성되고 재활성화 되고 있는 중이라 예술가들의 새로운 역할이 예상되는 시점이다. ● 물론 영상매체의 눈분신 발달에 따라 문학이나 미술과 같은 전통적인 예술이 과거의 활력을 다시 얻을 것인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생태정치와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손과 온 몸을 이용하여 자연적 존재와 인터페이스를 하는, 그리고 파고 쓰는 일차적 행위들은 영상매체의 발달과 무관하게 생명 에너지와 정신적 고양을 위해 필수적인 행위들이다. 판각을 하고 손으로 그리며 사유하는 행위는 육화된 장소성과 육화된 정신을 가지고 자연과 소통하는 행위이며, 생명을 고양시키는 행위로서 지고한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도시가 발달할수록 산과 바다와 들과 강에 대한 향수가 커지듯이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류연복의 그림이 도시인을 위한 일시적 위안물이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품은 지방도시의 주변 마을의 삶이 지구적 생태계를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드러내고 있고, 도시적 삶에 대한 치유의 기능을 떠맡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둔다면, 80년대 10년을 거리투쟁에서 보낸 후 90년대 10년간을 지역적 생활정치의 문제점을 체감하면서 자연 속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재충전한 그가 21세기가 요구하는 미술과 정치, 시와 그림의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활성화해 나갈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일이 아닐 것이다. ■ 심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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