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터치로 된 '사실'의 성취

허미자展 / HEOHMIJA / 許美子 / painting   2004_0508 ▶ 2004_0517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90×106cm_2003_부분

초대일시_2004_0508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요일_10:00am~06:00pm

금산갤러리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Tel. 02_735_6317 www.keumsan.org

허미자 하면 떠오르는 것이 균열이었다. 검정이기도 했고 짙푸른 것이기도 했던, 갈라지고 터진 균열들! 처음에 그것들은 깊은 어두움이었다. 아니면, 몇 겹 그늘이 드리운, 무거운 창백함이기도 했다. 그 자체가 너무 '실제'여서, 더 이상의 독해는 어떤 것이건 사족에 지나지 않는 그런 갈라짐이었다. 이상하게도 심연을 보게 하는 터진 표면이기도 했다. 내 기억으론 그때 그것들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실존 외의 다른 독해는 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출구없는 심연으로 인해 그의 회화는 이미 '존재에 대한 증언의 격을 획득하고 있었다. 일테면, 실존을 표명하는 가장 물질적인 레토릭쯤 이었을까! ● 그러던 것에서 우선 칠흑 같은 암흑이 벗겨졌다. 화면에 빛이 침투하면서 표면의 균열이 드러났다. 다음으론 조심스럽게 색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황폐한 지평 위에 움직이고, 꿈틀거리고, 가로지르는 것들, 살아있고 활력을 지닌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씨앗을 상징하는 타원형태이기도 하고, 자유롭게 흩어진 채 그림의 상하좌우를 활보하는 터치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근래에 들어선 보다 실사적 차원에 근접한 나무나 들풀 같은 식물이기도 하다. 균열 정도도 점차 견딜 만 한 것으로 완화되어 왔다. 대체로 갈라진 틈들이 매우 온화하고 규칙적이며 섬세해졌고, 어떤 그림들에선 아예 균열 자체가 목격되지 않기도 한다.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90×106cm_2003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90×106cm_2003

허미자의 침묵하는 균열은 이제 깊이를 모르는 심연으로만 열렸던 대신, 밖으로 식물을 키워낸다. 이름 없는 들풀들, 혹 그 열매들이 갈라진 틈들 위로 드리워진다. 마치 그림자처럼. 그것들은 화려하지도 않고, 코를 찌르는 향기를 내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그것들은 관상용이 아니다. ● 어쩌면, 그것들을 식물로 보는 자체가 이미 시각적 편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까다롭게 뜯어볼수록 그것들을 식물이랄 순 없다. 거기 어디에 꽃잎이나 파릇한 잎사귀들이 있는가? 그것들은 오히려 마티에르가 거친 표면을 이리저리 스친 붓 자국들에 더 가깝다. 빠르거나 느리게 완급이 조절된, 터치의 분방한 구사라 해도 될 것이다. 간결하고 절제된 텃치들의 차라리 추상적인 교차들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고.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40×60cm_2003

그럼에도 그것들은 충분히 살아있다는 느낌이다. 심지어 바람에 흔들리기까지 한다. 그것들을 다만 중성적인 붓질이나 세련되게 실현된 터치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기엔 재현된 식물들이 너무 생생하며, 요약될 수 없는 자유로움을 지니고 있다. 자유롭게 행해진 각각의 터치들은 절묘하게 중첩되고 조화를 이루면서, 다른 어떤 뛰어난 실사 못지않은 '사실'의 성취에 도달한다. ● 허미자의 회화에서 붓 자국과 줄기와 잎사귀를 따로 규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들은 가장 자유롭게 실현된 선이며 터치들이고, 동시에 가장 눈에 익은 들풀들이기도 하다. 재현은 실제와 가장 멀면서, 동시에 가장 가깝다. 방식과 표현, 더 나아가 도구와 목적 간의 구분도 불분명하다. 과연 이같은 통합을 텃치의 기교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40×30cm_2003

허미자의 캔버스 위에서 불편스럽게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알다시피, 균열들은 인위적인 손질의 결과가 아니다. 배경에 깔리는 몰아치듯 하는 붓질로 인해 화면에는 가만히 머무를 수 없는 흐름이 만들어진다. 이로서 물질로 가득한 화면에는 슬쩍 시간성이 주입된다. 그 위로는 자극적이지 않은 명암의 단계들과 계산 없이 자유롭게 흩어진 터치들이 얹혀진다. 이 균열과 흐름과 터치가 만나는 방식은 철저하게 반구성적이다. 즉, 그 에너지는 잠재로부터 분출되는 것이고, 그 방식은 철저하게 임의적이다. 그럼에도 그것들 각각은 다른 어떤 사려 깊은 구성보다 더 상호침투적으로 위치된다. 그것들은 이상할 만큼 충돌하지 않으며, 하나의 신체, 즉 회화라고 하는 신체 안에 녹아들어 있다.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60×120cm_2003

그럼에도 허미자의 회화는 회화에 관한 어떤 거창한 설교와도 무관하다. 허미자를 위해 '회화론'은 너무 거창할 뿐이다. 격식을 갖춘 분석이나 규칙, 이론, 개념화에 도달하기 전에 허미자의 것들이 모두 말라비틀어지고 말 것이다! 회화론을 내밀기엔 허미자의 것들이 너무 자유롭다 해도 되겠다. ● 그렇다고, 허미자의 회화가 근엄한 침묵을 택한 것은 더 더욱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코 '빛바랜 익명의 들풀 한포기'를 넘어서지 않는다. 이 소박함, 수줍음, 쉽게 권태를 부르지 않는 단정함,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서 슬쩍 풀기를 빼는 격 없음.... 이러한 완숙한 정서로 인해 우리는 바로 등 뒤까지 따라 붙은 불안스런 삶에도 불구하고, 잠시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 심상용

Vol.20040508a | 허미자展 / HEOHMIJA / 許美子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