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기 위함인가, 유지하기 위함인가

이명일 회화展   2004_0512 ▶ 2004_0531

이명일_존재하기 위함인가, 유지하기 위함인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73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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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512_수요일_05:00pm

노암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02_720_2235

작가 이명일을 알게 된지도 어언 10여 년이 되간다. 이 당시의 그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단순하지만 평범을 거부하는 화면분할과 약간은 신표현주의적 스타일의 아이콘화 된 일상적 소재들이 화면 군데군데 등장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 이명일은 지금까지 국내보다는 해외의 미술시장에 역점을 두어 온 것으로 여겨진다. 서울에서 그는 개인전과 '블루엑스'(Blue-X)를 결성하여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였는데 그가 발표하는 작품들은 그때마다 조금씩 변모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 이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는 종종 대형 의뢰작품들(commissioned works)을 제작하는데 몰두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기억나기도 한다. 그것들은 그의 주된 작업경향들과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소품들과는 달리 거대한 화면에서 강력한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작업들이었다. ● 소위 건축장식미술품을 비롯하여 여타의 공공미술과 같은 의뢰작품들에서 필자는 간혹 그것을 제작한 일부 작가들의 이중성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전시회에서는 추상이나 비구상 작가로 스스로 주장하거나 그렇게 인지되어온 작가들이 이들 의뢰작품에서는 전혀 엉뚱하게도 진부한 사실적 작품을 그려낸다. 그런 작가의 스타일이라고는 전혀 상상치 못하기에 그런 작품 앞에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작가의 작품이 사회적인 어떤 '진술'(statement)이라면 그들은 한 입으로 두말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셈이 된다. 그 중 일부는 유명한 작가들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진술'을 쉽게 포기하고 의뢰인의 미적 안목수준에 적당히 타협해버린다. 사실 이는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정당화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명일_존재하기 위함인가, 유지하기 위함인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91cm_2004

바로 이점에서 필자는 작가 이명일의 고집과 일관성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작품과 관련해서는 자기의 '진술'을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작가이다. 만일 후원자(patron)가 이 작가의 그림과 다른 스타일을 요구해올 경우 이 작가는 십중팔구 그 후원자의 마음을 바꾸어 놓게 하는 재능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그러한 요구를 과감하게 거부하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 이 작가에게는 그럴 수 있는 뛰어난 능력과 그리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통찰력도 갖추고 있음을 종종 느끼게 된다. 이 작가는 한때 모 TV방송의 미술프로그램 디렉터와 MC를 맡기도 했음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그러한 다재다능함 때문에 간혹 이 작가가 과연 평생 그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명일은 작가이며, 그의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늘 작업이 자리잡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 한때, 작업 이외의 몇몇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명일은 늘 일정한 일관성을 유지하여 왔으며, 그것은 일상과 작품의 '피드백'(feedback)이었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은 썩 좋은 자세는 아니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결과(outcome)가 나오기까지 소요되어야 하는 진정한 투입(input)을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명일_존재하기 위함인가, 유지하기 위함인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183cm_2004
이명일_존재하기 위함인가, 유지하기 위함인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180cm_2004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재료는 물론이고 예술가가 영감을 얻기 위한 '해외여행'까지도 비용으로 세금공제를 한다고 한다. 한 작가의 작품이 나오기까지 소요되는 대부분의 투자를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제도가 존재하는 않은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명일 이지만, 그럼에도 이 작가는 작업에서 그와 같은 시간적, 육체적, 정신적 투자들에 역점을 두고 있다. ● 작가의 성공은 결코 재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어떤 작가가 성공하고 그의 이름이 보통명사화 되기 위해서는 예술적 재능 이외에도 작가의 비교적 일관된 인생여정, 철학, 함께하는 교우관계, 작품의 매집, 그리고 시장에서의 투자가치를 유발시킬 수 있는 요인, 그를 위한 전략 등 무수히 많을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은 한 작가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 40대 중반의 작가 이명일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온당치 못할 것이다. 어찌 됐든 이 작가는 작가의 길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으며, 철저한 프로페셔널의 근성을 가지고 있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 그의 최근작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단순화되었으면서도 훨씬 밀도가 높아졌다. 무엇보다도 최근작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높은 채도를 유지하는 화면의 전개이다. 인간을 연상케 하는 패턴들은 무수히 표출되기보다는 일정한 범위에서 셀 수 있는 가산명사의 지시체들처럼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들 단순한 패턴들이 하얀 백그라운드와 결합하여 나타나는 형상들은 또 다른 신선하고 의미론적으로 무한한 느낌을 던져준다. ■ 이영재

이명일_존재하기 위함인가, 유지하기 위함인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91cm_2004
이명일_The Life_종이에 아크릴채색_76.5×49cm_2004

작가와의 대담이성원_선생님께서 몇 년 동안 전시를 안 하시다가 하신 건데, 그동안 TV프로를 진행하시느라 정작 본업인 작업에는 좀 소홀하셨던 게 아닌지요. 90년대 중후반 해외전시를 통해 호평을 받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의 전시작품 얘기에 앞서 선생님의 예전 작업성향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 이명일_작업은 계속했었는데..... 저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과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을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하는가 고민하고 굉장히 혼란스러웠을 때가 방송을 했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90년대 중후반까지 해외전시를 여러 차례 하면서 호평보다는 관심을 끌었다고 볼 수 있겠죠. 이성원씨가 여기서 전시를 하니까 더 좋게 말씀을 해주신 것 같은데요. (웃음) 이미 지난 일이고, 그 전시를 통해 저를 뒤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었죠. 예전의 작업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같습니다. 풀어가는 방법에서의 차이일 뿐이죠. 우리가 성숙해 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겠죠. 과거에도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한 유지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을 해왔었습니다. 표현방식이 그때는 좀 우울했다고 할 수 있고, 지금은 굳이 얘기하자면 사유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관념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면 될지 모르겠네요. / 이성원_TV를 통해서 보던 선생님을 실제 보니 기분이 조금 묘한데요. 선생님은 작가였기 때문에 실제로 더 구체적으로 작품을 보셨을 텐데, 방송국에서 디렉터와 MC를 하시면서 느끼셨던 점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이명일_제가 진행하던 프로를 가끔 봤다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동시간대에 드라마나 오락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조금 힘들었을 수도 있죠. 지나간 얘기를 자꾸 물으시니 좀 난처합니다만, 사회속에서 작업을 하고 살아가려면 경제활동도 해야되겠죠, 그게 또 살아가는 자세라고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지금 생각해 보니 시청자들에게 다양한 작품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과, 현장상황에 적합한 작품들을 위주로 방송을 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면서 다가왔던 느낌은 작가로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기쁨인지 운명인지 하는 묘한 딜레마에 빠져봅니다.

이명일_존재하기 위함인가, 유지하기 위함인가_캔버스에 혼합재료_91×73cm_2004

이성원_과거의 작업에 비해 표현방식의 변화가 많이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 이명일_작가가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동일한 형식성을 꼭 유지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절대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늘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감정과 가치가 다를 텐데, 어떻게 똑같이 않은 내용을 같은 표현방식으로 계속 작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작가는 항상 변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이성원_작업의 소재는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해서라고 하셨는데 철학적이면서도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쉬운 소재도 많으실 텐데 굳이 이런 소재를 택하신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 이명일_글쎄요. 적절한 답변일지 모르겠는데 문화란 정신에서 오는 게 아닌가요. / 이성원_그럼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정신문화란 무엇인가요? / 이명일_그거야 뭐 나를 찾아가는 거죠. / 이성원_선생님이 생각하는 존재체의 이미지와 배경이 가지고 있는 의도성은 무엇인가요? / 이명일_색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흰색 위에 놓일 때 같아요. 제가 의도하는 존재체의 이미지는 순수한 영혼의 번뇌에 있습니다. / 이성원_선생님 작품을 들여다보면 무언가 다가옴을 느끼는데 그것이 무엇인가요? / 이명일_우리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 나 아닌 나가 될 때 느껴지는 영혼의 교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이성원_작품에서 보여지는 존재체의 형태는 인간의 옆모습으로 보여지는데, 어떤 사람은 머리가 거꾸로 되어있으며, 약간 숙이고 있는 모습, 고개를 젖히고 무엇인가 응시하는 듯한 모습, 그리고 규칙적으로 군집되어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마치 무언가를 얘기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 이명일_공간구성에 있어서의 다양한 사유의 모습들입니다. 더 설명이 필요한가요. / 이성원_인체부위 중 두상을 택한 이유가 있다면? / 이명일_인간이 사고하는 모습과 표정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부위가 아닌가요. / 이성원_원색의 색감, 형태의 구성, 그 안에서 보여지는 긴장감이랄까 그런 모습들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셨는데 선생님이 가장 중점적으로 나타내고 싶으신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 이명일_색과 형태라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약속된 인식의 코드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저는 그런 것들에 대하여 충실하게 이행도 하지만 진정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자아의 정체성을 해부하고 싶은 것입니다. / 이성원_작년 Blue-X 전시 때 선생님 작품을 보았던 관람객들 대부분의 궁금증은 미세한 부분 표현에 대한 질문이었는데요. 스프레이를 이용하여 표현한 것이냐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명일_그런 질문을 많이 듣는데 소감을 얘기하자면 기분이 좋습니다. 철저한 붓작업이며 간혹 그로 인해 많은 인내도 필요하지만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 / 이성원_작가가 한가지의 양식을 창조하여 그것을 계속 발전시키고 변화한다는 것이 많은 용기와 고뇌가 필요할 텐데요. 아마 모든 작가선생님들의 해답 없는 숙제일 것 같습니다. 지금 선생님만의 독특한 색깔을 찾으신 건지, 아니면 또 다른 변화를 추구하실 건지 궁금합니다. / 이명일_글쎄요, 다가가면 멀리 있는 뿌연 안개 같은 거죠. / 이성원_이건 작품과는 관계가 없는 질문입니다만,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시죠. / 이명일_전시 준비기간 중 소홀했던 이한나리에게 미안함과 사랑을 전합니다. ■ 이명일_이성원

Vol.20040515a | 이명일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