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Flat)'

권소정 조각展   2004_0519 ▶ 2004_0525

권소정_The Flat Man_보드에 색연필, 오일파스텔 채색_35×23cm_2004

초대일시_2004_0519_수요일_06:00pm

인사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29-23번지 Tel. 02_735_2655

외면의 죽음은 내면의 삶을 본다?_잠재 되어있는 지각적 경험이 새롭게 배열한 개념의 이성적 움직임몽상들은 엄청난 권태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자신의 열정과 믿음을 위하여 하나의 대상을 요구하는, 너무나도 신비주의적인 영혼의 동경을 나타낸다. 때때로 그런 몽상이 좌절을 만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그 열정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몽상이 때때로 부정적이 되는 것은 사람들이 그 긍정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_까뮈의 '작가수첩' 중에서 ● 권소정이 표현하는 것들은 다분히 몽상적인 자기의 초상 혹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정신 분열적 자기소외에서 오는 권태로움과 자기형상의 근거를 찾기 위한 불안과 모호, 그리고 다소 슬프게 느껴지는 외도된 형태의 반복을 통해 지식이나 정보의 정도가 아닌 느낌이나 감각적 형태의 정도를 찾는 정신의 진리치 인 듯 보여진다.

권소정_The Flat Man I_보드에 오일 파스텔, 목탄 아크릴채색_81×101cm_2004
권소정_The Flat Man II_보드에 오일 파스텔, 목탄 아크릴채색_81×101cm_2004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어떤 무엇도 고정 불변하는 것이 없어 보이는, 그래서 그 형상은 뚜렷하나 내실로 들어서면 이미 비워진 '공(空)' 즉 "공제(空諦)"와 "가제(假諦)"의 진리를 새로운 개념의 확장된 예술 활동으로 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인가와 접촉이 이루어졌다는 느낌, 인간이 무엇인가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 즉 비유비공(非有非空)의 "중제(中諦 )"에 근접해나가는 예술 작품이 어떤 변증의 형식으로든 끊임없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예술 작품의 의미는 작가에게 있어서나 감상자에게 있어서나, 작품 그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창조한 사고도, 또한 그것을 수용한 사고도 결코 완전한 중립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권소정의 경우가 바로 표현과 전달이 얼마나 불확실하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 그녀는 '납작하게 엎드리고', '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이라는 "일체의 정태적인 것의 유동성" 이라는 불안의 개념을 일련의 작업을 통해 진정하게 체험하고있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외적 형상을 통한 인간 내면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있는 불안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동시에 이질동상(Isomorph)의 형상과 현상의 유기적인 연계성을 두고 일어나는 느낌의 운동, 즉 인간의 영혼의 운동을 이야기하고자한다. 인간의 영혼의 운동이란 반드시 인간의 자아의 운동이다. 영혼은 자아에 의해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아니 영혼의 본질적 실체는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일련의 작업은 결과보다는 프로세스가, 완성보다는 비완성이, 필연보다는 우연이, 명확한 메시지보다는 모호한 메시지가 중요하다.

권소정_The Flat Man-Big eye_보드 및 라텍스에 오일파스텔, 아크릴채색_153×222×42cm_2004
권소정_The 'b'_보드에 오일파스텔, 목탄, 아크릴채색_32.2×22cm_2004

작가는 그녀 스스로의 모든 움직임들에 대해 불만족 한다. 그녀의 불만족은 자신의 작업과 삶의 진행과정에서 기인한 어떤 오해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매우 영민한 이해에 기인한다. 문제는 만족하다고 이야기 해야한다는 이러한 필요 자체에서 생겨나는 불만족이다. 그것은 또한 예술작품으로서의 작업과정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연이나 연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될 수 없는 감성의 해체와 감상의 확장된 결핍 이후의 생겨날 그녀의 감정상의 문제를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형상화된 본질에 있어 불만족한 인간을 가정한다 : 보편적 인간으로서 그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으며 아무런 필요도 지니지 않으며, 개인으로서 그가 죽더라도 그는 시작이나 끝을 가지지 않으며 그의 정적인 전체의 생성 속에 있는 것이다. 그가 도달하는 이러한 자기도취에 멈추지 않을 수 있는 이 궁극적 인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극한-경험이다 : 그것은 욕망 없는 인간의 욕망이며 「모든 것에」 만족한, 그래서 공화증에 시달리는 현대인간의 불만족이다. 극한경험은 모든 것이 그 밖으로 모두를 배제할 때 모든 것 밖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경험이며 모든 것이 도달된 다음 도달될 수 있는 것, 혹은 모든 것이 알려진 다음 알려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경험이다 : 도달할 수 없는 것 그 자체, 알려질 수 없는 그 자체인 것이다.

권소정_Untitled_혼합재료_2004
권소정_Flat-boredom_혼합재료_160×55×45cm_2004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예술이란 것을 그 대상의 미에 의해 규정하는 습관-아마 그것은 습관에 지나지 않지만-에 젖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간간이 흘러나오는 "끔찍한 것" 들을 보면서 우리의 삶이 집행유예의 번민을 안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되고 그것이 지시하는 방향을 통해 들여다본 세계야말로 또 다른 예술이 지닌 당위성을 체험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의 작업에서 살펴볼 수 있는 원생적인 *현빈(玄牝)의 세계는 결코 인간의 삶을 무한히 고요한 상태 속에서 재탄생시키려 갈망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것은 미의 절정에 등을 돌리고 미의 안티테제에 의해 특정 지워진 형태에까지 영역을 넓힘으로써 내면성을 외적 구성에서 우연히 나타나는 일체의 것과 합치하고 있다. 추하거나 끔찍한 것은 내면과 외면의 근본적인 충돌이다. 사물가운데 정신이 나타나는 것은 사물들 내의 소란이며, 반대로 정신들 내의 사물의 존재는 정신 내의 소란인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작업을 통해 우리와 소통되어지고있는 상징들이 쉽지 않은 표지와 기호들로 이루어져있기에 이미 결핍되어져 암묵했던 그녀의 지각적 경험을 어떻게 살펴 나가느냐 일 것이다. ●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주는-그런 그녀의 지각적 경험을 살피기에 참고 할 만한 몇 가지 단서들은 그녀의 일련의 작업들 속에는 "외면의 죽음은 내면의 삶을 본다" 라는 지각적 경험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만들어낸 형상들은 그녀 자신과의 불일치, 자신의 비소유, 불투명 등으로 부른 내적 차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할 수 있으며, 만약 그녀가 지각적 경험을 정확히 옮기길 원한다면 그녀는 「누구」가 그녀 속에서 지각하는 것이지 그녀가 지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정신분열적 자기소외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되묻고자하는 암시적인 그녀자신의 대변이자 모호한 사유의 바탕 위에 납작하게 엎드리고 있는 우리 모두의 권태로움이기에. ■ 최병성

Vol.20040519a | 권소정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