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의 풍경

혜자 회화展   2004_0527 ▶ 2004_0605 / 일요일 휴관

혜자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한전프라자 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4_0527_목요일_05:30pm

한전프라자 갤러리 서울 서초구 서초동 1335번지 전력문화회관 1층 Tel. 02_2055_1192

삶과 죽음, 그 두개의 중심을 공전하는 선들 ● 2000년 덕원 미술관에서의 첫 개인전 이후, 4년 만에 열리는 이 전시회에서 화면은 이전의 갈색 계열에서 붉은 색, 녹색, 푸른 색 계열의 색조로 변해 있었다. 첫 개인전의 화면이 복잡하게 얽힌 나무 넝쿨이라는 소재가 주는 무겁고 칙칙한 분위기였던 것과는 비교된다. 그러나 오일로 그려진 선 중심의 붓질이나 밀도가 높으면서도 거대한 화면, 그리고 선의 연장으로 미지의 형상(形狀)을 만드는 것은 여전하다. 고목이나 얼키설키 꼬인 나무덤불이 가득 펼쳐진 첫 개인전의 그림이 과도한 존재 감이 특징이었다면, 이번 전시의 그림들은 이전에 비해 색조나 형태에 있어서 보다 날렵하다. 그것은 이전 그림이 나무라는 압도적인 재현 대상에 치중했다면, 이번에는 선이라는 추상적인 요소를 더욱 강조해서인 것 같다. ● 물론 그렇다고 혜자의 그림이 완전한 추상은 아니다. 여전히 아래로 축축 처지는 선들이 암시하는 중력이나 빈 배경과 대상의 구별로 말미암은 공간감 같은 재현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 혜자의 그림에서 추상화처럼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 순수한 선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실 선은 기본적인 자연 현상과 동일시됨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많은 화가들이 발견했듯이, 자연에는 어떠한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화면에 가득 그어진 선들은 현실도 추상도 아닌 어느 지점에 걸쳐 있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에서 선의 흐름과 패턴은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선 그 자체는 모호한 것이 없다. 대체로 그녀의 선들은 머뭇거림 없이 나아간다. 자신이 가야할 바를 정확히 안다는 듯 궤적을 남기는 선들은 거칠 것 없는 속도감을 유지한다.

혜자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4

통상적으로 선은 글쓰기와 소묘에서 보편적으로 경험되기 때문에 친근하게 느껴진다고 지적된다. 선은 어렸을 때부터 인간이 다루는 사물의 특성을 경험적인 방식대로 지시해준다. 우리는 사물의 외곽 선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봄으로서 사물을 보았던 것이다. 형태 심리학자인 아른하임도 인간의 제스처는 대상의 외곽 선을 따라 그 형상을 묘사하곤 하는데, 그것은 외곽 선에 의한 표현이 손에 의한 심리적이고 자연적인 가장 단순한 이미지 제작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기구가 쥐어진 어린아이의 손놀림처럼, 혜자가 구사하는 선은 자연에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는 거기에 없던 것을 눈에 보이게끔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른하임은 아동의 최초의 난필(scribbles)은 재현이 아니라 표시(presentation)라고 지적한다. 인체의 지렛대 구조는 원운동을 하게되어 있다. 팔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렇게 빙글빙글 회전하기 때문이다. ● 혜자의 그림에서 뒤얽힌 직선과 곡선들은 미분화된 형상을 내포한다. 여기에서 선은 나뭇가지나 덤불, 또는 실뭉치 같은 사물의 구체적 특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물성(thingness)의 일반적인 특질을 나타낸다. 이렇게 바탕과 구별되는 대상물의 물체 감을 표현하는 것은 회화매체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현상을 이룬다. 그것은 자연, 혹은 마음속에 있는 잠재적인 형상들이기도 하다. 선으로 이루어진 혜자의 회화는 재현과 표현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곰브리치는 [예술과 환영]에서 재현이 복제replica는 아니라고 지적한다. 예나 지금이나 미술의 형태들은 화가가 외부세계에서 보는 것을 복제한 것이 아니듯이,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복제한 것이 아니다. 어느 경우이건 미술의 형식은 획득된 매체, 즉 전통과 기술을 통해서 자라난 매체 내에서의 묘사이다. 모방은 주어진 언어 매체 안에서의 근사치인 것이다.

혜자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3
혜자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3

이러한 시각적 전통 속에서 우리는 맨눈이 아니라, 상징의 그물 망으로 사물을 걸러서 본다, 인간의 모든 의사전달은 상징, 즉 하나의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화가는 자연과 습관 사이에서 움직이면서, 자연에 상상력을 결합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계는 새롭게 보여지고, 작가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영역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환영을 부여한다. 격렬하게 운동하는 선들로 이루어진 그림의 형태는 소우주적 구조를 이루며, 이 구조를 통해 그녀는 자신만의 억양을 찾아낸다. 작가는 자연 혹은 심상의 재현이라는 기본적 과정에서 출발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대상 그대로의 복제물이 아니라, 구조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른하임은 재현representation은 결코 대상 그대로의 복제물을 낳지 않고, 주어진 매체로 그 대상과 구조적으로 대등한 등가물을 생산한다고 말한다. 대상 그대로의 복제가 불가능한 이유는, 복제란 대상을 이루고 있는 물질로 복제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각과 사고에 있어서 유사성이란 단편적인 동질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구조적 특징들의 일치관계에 의존한다. 작가는 자신이 느꼈던 어떤 무형체의 구조를 형상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 그림의 이미지는 1차적으로 살아있는 듯하며 죽은, 또는 죽은 듯하며 살아있는 나무 줄기를 연상시키지만, 인공적으로는 지하에 묻혀 있는 광케이블이나 신경다발 같은 이미지도 연상시킨다. 그것은 존재보다는 생성을 강조한다. 그것들은 그 뒤에 진정한 진리나 의미가 숨겨져 있는 확고한 대상이라기 보다는 상호 간에 엮여져 가며 만들어지는 과정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생성은 이미 존재하는 의미를 찾아내는 논리적인 진행이기보다는 의미의 구축화 과정에 해당된다. 그렇게 이루어진 거대한 화면은 웅장한 기념비라기 보다는 전쟁터와 같은 양상을 가진다. 이 점에서 그녀의 그림은 바르트의 구별처럼 '작품' 보다는 '텍스트'에 가깝다. 텍스트는 하나의 규정된 의미가 아니라, 단지 무한한 구조가 있으며 복수 언어적이다. 코드와도 같은 선들은 무한한 역동성으로 유희를 하면서 다양한 의미를 낳는다.

혜자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3
혜자_광목에 유채_190×259cm_2003

마치 어떤 감정에 못 이겨 울다가, 자신이 내지르는 곡소리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있듯이, 혜자의 작품은 어떤 감정의 상태, 가령 뒤얽혀있는 나뭇가지에서 느껴지는 황량함이나 착종된 마음에서 출발하곤 하지만,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최초의 출발점과 최종 목적이 사라지고 만다. 맹목적이지만 자못 필연적인 듯 몰아치는 선의 흐름은 어떤 대상이나 의미를 확정하지 않고, 그 자체로 남아있다. 이점은 그녀의 회화를 모더니즘과 관련을 지을 수 있도록 한다. 착종된 선들은 어떤 핵심이나 비밀, 불변의 원칙도 없는 것이며, 무한한 겉껍데기만 존재한다. 요컨대 혜자의 그림에 나오는, 우리의 시선을 실어 나르는 거대한 선의 흐름, 그 선 뭉텅이를 다 걷어내도 그 안에 무슨 핵심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 텅 비어있음은 단순히 무의미한 유희가 아니라, 예술의 창조성과 관련된다. ● 시작과 끝이 불분명해지고 끝없는 과정만이 남아있는 혜자의 그림은 작품이라는 것이 결국은 끝없는 새로운 시작임을 예시한다. 이 중단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작품은 또 다른 시간 속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상실되는 지점, 또는 시간의 부재가 주는 고독 속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예술의 언어는 '일시적이고 종속적이며, 통상적인 수단이 아니라, 본래 경험 속에서 완성되려 애쓰는 언어'(블랑쇼)가 된다. 그것은 모든 즉각적인 호기심이나 목적성이 제거된 것이지만, 이 표면운동으로 해서 전존재를 빨아들일 수 있는 자유로운 활동이다. 이로서 그림 그리기는 의식의 총체와 관련된다. ● 특히 선으로 이루어진 작품의 공간은 지속성의 힘을 강조한다. 이 지속성은 무엇인가를 향해 흘러가는 것이기보다는 작품 그 자체를 향한 움직임이며, 그 기원의 추구이고, 그래서 작품은 상상의 장소가 된다. 블랑쇼가 지적하듯이 이 언어는 이미 알고 있는 현실을 재생산하기를 요구하지 않지만, 자유롭고 중단되지 않는 전개 속에서 그 언어의 진실을 생산해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술은 이성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보다 더욱 더 엄격한 그러나 순수하고 가볍고 자유로운 관계의 필연성이다. 예술은 확실하고 단정적인 실체가 아니며, 형태들의 총체도 아니고 파악 가능한 양식도 아니다. 그것은 발견되지도 증명되지도 정당화되지도 않는 것, 우회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혜자_광목에 유채_131×160cm_2003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이미 거기에 있는 법이 없다. 그것은 언제나 다시 찾아내거나 다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현실세계와 평행 하는 또 하나의 세계로 통일됨으로서, 현실세계를 보완하고 조명한다. 마지막으로 혜자의 작품은 끝없이 사라지는 과정을 통해서, 예술을 포함한 모든 삶이 향해 가는 본질적이며 궁극적인 경험인 죽음과 연결된다. 선들은 소리 없는 아우성, 침묵의 소용돌이를 통해 죽음의 공간으로 끝없이 접근한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삶 속에서 끝없이 자신의 죽음과 만나며, 작가는 이 모호한 영역에서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심미화 된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매혹을 통해서 순수한 삶의 노래를 시작'(블랑쇼)하려는 예술의 긍정적인 힘과 관련된다. ■ 이선영

Vol.20040527a | 혜자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