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정원에서 거닐다

진미나 회화展   2004_0602 ▶ 2004_0608

진미나_바람소리Ⅰ_캔버스에 혼합재료_37×45cm_2004

초대일시_2004_0602_수요일_06: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B1 Tel. 02_736_1020

공간 속을 표류하는 입방체의 집과 나무, 이 세상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풍경, 이곳은 진미나의 마음 안의 정원이며 거닐고 싶은 사유의 공간이다. ● 진미나의 나무에 대한 집착은 초기부터 시작되어 십여년을 넘어 계속되어 오고 있다. 나무를 바라보고, 또 관찰하고 그리고 숨결을 느낀다. 그에게 있어 나무는 소유되어 있거나, 소유하고픈 식물이 아니라 존재를 위한, 존재를 느끼기 위한 존재이다. 그는 자동차 안이나 길거리의 가로수, 혹은 아파트 주변 등에서 햇빛과 바람으로 반짝이며 부서지듯 속삭이는 나무에서 회화의 생명력을 간취한다. 그가 깊이 시선을 빼앗기는 나무의 이미지를 카메라로 탈취하기도 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화폭 안의 나무는 전혀 실재가 아니다. 수종(樹種)을 알 수도 없고, 집들도 그 안에서 우리가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나무와 집이 어울려 있는 캔버스의 공간도 이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실제의 풍경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 나무들을 주변에서 늘 보는 것으로, 우리가 이 집 안에서 매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것은 관념과 인식의 사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자동차, 집, 나무 등을 실제의 것과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관습적으로 인식되는 도상으로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진미나의 회화는 전혀 아동화와 상관이 없다. 이곳은 어린아이들의 놀이 공간이 아니라 어른만이 들어갈 수 있는 관념의 공간이다. 세련된 필선과 여백의 묘미를 살리는 나무와 집들의 구성은 탁월한 조형적 숙련이 아니고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캔버스는 생의 거친 소용돌이가 절제와 침묵으로 정화되며 사유의 시간들이 축적된 공간이다. 진미나의 회화는 청명한 대기에 놓여져 있는 자연의 풍경이 아니다. 이곳에는 시원스런 강줄기나 계곡도 없고 흐들거리는 버드나무도, 지저귀며 날아가는 새도 없다. 그런데도 마치 자연의 깊은 곳에 들어앉은 듯하며, 바람이 잔잔히 안개를 걷어 가면 금방이라도 강과 들과 산이 나타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안개는 결코 걷혀지지 않을 것이며 강도 사람도 날아가는 새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원한다면 이곳에서 강나루, 배, 새, 사람, 꽃 등이 나타날 것이고 아니면 영원히 신기루 속에 파묻힐 것이다. 저 멀리 어슴푸레하게 안개 사이를 뚫고 떠오르는 듯이 캔버스의 공간에 간간이 놓여져 있는 집들과 나무는 현실이 아니라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그리움의 공간이며 추억의 시간이다.

진미나_바람소리Ⅱ_캔버스에 혼합재료_37×45cm_2004
진미나_여기 그리고 저기_캔버스에 혼합재료_72×90cm_2004
진미나_나의 정원에서_캔버스에 혼합재료_46×60cm_2003

진미나의 회화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그의 언어적 표현만큼이나 침묵으로 절제되어 있다. 단색조의 색채, 가느다란 필선으로만 그어진 기하학적 입방체의 집들, 옅은 붓자국만으로 표현된 나무들은 서양화라기 보다 산수화에 더 가까운 느낌을 준다. 단색조의 공간이 들려주는 명상과 사유의 조용한 숨소리는 옛 선조들이 추구한 관념 산수화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기하학적인 입방체의 집들과 기호화된 나무의 재구성은 리얼리티의 본질을 추구한 입체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산수화처럼 그리려고 해서 그린 것이 아니고 그리다 보니까 산수화 같은 분위기를 주나보다고 그가 말하고 있듯이 입체주의 역시 작가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진미나는 산수화에게서 보여지는 구도, 색감, 감정이입, 그리고 여백의 미학이 자신의 회화에게서 느껴진다면 기분 좋다고 말할 뿐이며 특별히 영향을 받았다거나 옛 선조 화가 중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진미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필자는 그의 작품과 첫 대면했을 때 김정희(1786-1857)의 「세한도(歲寒圖)」(1844)를 떠올렸고, 곧이어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의 「레스타크의 집」(La Maison L'estaque, 1908)이 생각났다. 김정희 회화에서 지조(志操)의 송백 사이에 있는 간결하고 단아한 초가(草家), 그리고 절제된 다변과 과묵한 열정을 내포한 듯한 여백은 후대의 수많은 화가들의 규범이 되어 왔다. 옛부터 동양인들은 인간을 우주의 점이라고 생각하며 산수화를 발달시켰고, 서양인들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며 인간 중심의 사고와 인체의 미를 탐색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진미나는 전통적인 동양사상 속에 위치되어 있고 그의 회화는 당연히 산수화에 더 가깝다. 그러나 진미나는 동양화론에서 강조하는 선의 기운생동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가련할 만큼 연약한 선묘를 나약한 인간의 모습, 화가 자신의 모습이라고 밝히고 있다. 자연에 비해 인간은 나약하며 인간이 만든 모든 사물들도 자연 앞에서 무력해진다. 절제와 함축, 여백을 통한 관념과 사유라는 관점에서 진미나의 회화를 산수화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기하학적 입방체로 기호화된 집들과 질서 있게 재구성된 조형감각은 분명 서양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눈으로 보는 시각에서 마음의 시각으로 넘어간 진미나의 회화는 입체주의자들이 리얼리티의 본질을 화면에 담으려고 한 의도와 유사하다. 진미나의 초기 작품을 보면 이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구상적인 풍경을 추상적 조형으로 재구성하면서 자연의 본질적인 리얼리티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점점 입체적인 구성은 평면화 되고 음영, 명암, 원근도 사라진다. 색채도 극단적으로 감축되어 고요한 적막 속으로 파묻힌다. 서양에서 동양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진 것일까.

진미나_나의 세상_캔버스에 혼합재료_46×54cm_2004
진미나_나의 정원에서_캔버스에 혼합재료_50×60cm_2003

진미나의 회화는 입체주의를 염두에 둔 것도 아니며 관념적인 산수화를 모방한 것도 아니다. 가느다란 선묘로만 구성된 집들은 리얼리티의 본질의 추구도 아니며 청렴한 선비가 사는 초가도 아니다. 진미나의 회화는 그의 회화일 뿐이다. 그는 현실을 기호화시키면서 실재의 시간과 공간을 응축시키고 있다. 즉 진미나는 정지된 시간과 공간에 영원히 머무르는 신비의 세계를 탐색하고자 한다. 그러나 초현실의 세계도 아니며 사차원의 세계도 아니다. 더구나 무릉도원도 아니며 낙원도 아니다. 단지 가슴속에서 그리워하고 있는 머물고 싶은 시간 속의 장소이다. ● 진미나는 마음 안의 풍경 안에 빛과 바람을 만들고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혼자 산책하면서 자아에 대한 깊은 사유에 빠진다. ■ 김현화

Vol.20040531b | 진미나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