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관조하고 노래하는 서정시인

김재학 회화展   2004_0701 ▶︎ 2004_0720

김재학_호박_캔버스에 유채_53×72.7cm_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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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701_수요일_05:00pm

선 아트센터ㆍ선화랑 서울 종로구 인사동 184번지 Tel. 02_734_5839

주지하듯이 김재학은 대상의 재현에 충실한 전형적인 구상미술 작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상당히 폭넓은 애호가 층을 확보하고 있다. 전통적 구상미술 애호가들은 물론이고 현대미술 애호가들에게도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의미이다. 두루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이야깃거리나 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구상미술 작가의 작업이 현대미술 애호가들에게도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미술제도는 크게 보아 이념적으로 양분되어 있는 것말고도 또 다른 질서들의 어색한 동거가 역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 현대미술과 전통적 아카데미즘 미술 양자는 예술계에서 서로 공존하고 있지만, 이질적인 조건들이 너무 많다. 서로 다른 공간과 미의식, 질서, 시장 등을 갖추고서 따로 움직이는 모양새가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전혀 다른 예술계를 각각 따로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 화단은 분리되어 있다. 이 지면에서 그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 따져보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다만 보기 드물게 김재학이 그 양분된 화단 현실 속에서도 폭넓은 애호가 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본인에게나 또 구상미술계에도 무언가 의미가 있는 일이기에 이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 구상미술에는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구상미술이야말로 재현에 충실하고, 그로써 대중들의 정서에 밀착해 있는 양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상미술이 대중적 애호가 층을 널리 확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오늘날은 그렇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대중적이라 자부하는 미술이지만 대중은 멀리 있다는 것이다. 피카소나 백남준 그들의 예술세계가 대중들에게 잘 전달되고 있지는 않아도, 그들은 대중들의 의심할 수 없는 우상이다. 대중적 정서에 부합하고 있으며, 또한 적지 않은 기여를 해온 구상미술이 정작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바로 구상미술이 대중 매체의 생리에 잘 적응하고 있지 못한데 가장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대중음악에는 대중적 스타가 있기 마련이고, 또한 그 스타 뒤에는 미디어가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대중매체 가까이 있지 못한 구상미술에는 이렇다 할 만한 스타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중적 스타가 반드시 위대한 예술가란 법은 없지만, 대중적 스타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대중들의 생활공간과 시간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는 예술사회학적 빈곤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김재학_봄_캔버스에 유채_112.1×193cm_2004
김재학_봄_캔버스에 유채_45×90cm_2004

그런데 김재학의 경우는 그 나름대로의 대중성을 가지고 있다. 이 작가를 소개할 때 작가 이름은 잘 모르다가도 이 작가의 작품 이미지가 실린 인쇄물, 즉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모 그룹의 캘린더, 가계부 등을 장식하고 있는 작품 이야기를 하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해가 지나면 버리기 마련인 그 가계부와 같은 인쇄물들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밖에도 우표, 연하엽서 등에 실린 작품 이미지까지 감안하면 그는 어느 사이 대중적 스타의 위상에 근접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작가가 대중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예술적 성취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적 성취 이전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작가가 대중적인 매체를 탈 수 있었던 것도, 또한 현대미술 애호가들에게도 어필 수 있었던 것도 또한 어떤 이유가 있을 터이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 작가의 그림들이 보통의 구상미술 작가들과 크게 다른 내용은 없었다. 다른 작가들처럼 풍경, 인물, 정물 등을 느낌과 욕구에 따라 그린 데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성향적으로 코로풍과 마네풍에 가까운 견고한 재현회화를 일구어 왔던 보통의 작가였다. 그러다 지난 90년대 말부터 조그만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화풍의 변화이다. 대상은 주로 식물 이미지로서 일러스트레이션에 가까운 가벼운 터치의 화풍을 선보이게 된 것이다. 산뜻하고 담백 경쾌하며, 감각적인 붓터치가 살아 있는 화면은 식물 이미지의 생기를 더해주게 된다. 우리의 산과 들에서 접할 수 있는 들꽃들을 대상으로 한 그림들은 소재 자체의 신선감을 발산할 수 있었다. 숨겨진 자연이라는 구체적인 이슈를 가지고 접근한 작가의 의도는 시의 적절하게 대중적 미의식과 정서에 아주 효과적으로 어필하게 된다. 이러한 소재의 그림들은 대체로 소품의 크기들이지만 작품들의 밀도와 짜임새가 절묘하여 소품이라는 편견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 게다가 작가의 노련한 필치는 사진적 이미지의 한계를 극복한 그리기를 통해 사진 이상의 시각적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보통은 심산유곡에서 발견한 대상을 대부분 사진으로 담아 그것을 화폭에 옮기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작가의 소화 능력이 뒷받침될 때 사진 의존에서 오는 어색함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의 필치는 감각적인 리듬에 따라 움직이면서 자연적 대상 자체를 충실히 묘사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전달하게 된다. 특히 여백을 처리함에 있어 그것이 적절한 관조와 사유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대상의 사소함과 왜소함을 또한 극복하게 된다. 자연 앞에서의 관조를 충분하게 체험한 작가 입장에서 관조의 순환을 자연스럽게 부여하는 것이다. 수채화의 경우는 여백에 별도의 처리를 하지 않은 것 역시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산뜻하면서도 담백하고 감칠맛이 나는 작가의 재현적 화면은 인쇄매체를 통해 다양하게 편집되어 보는 기쁨과 재미를 더하게 된다.

김재학_장미_캔버스에 유채_40×80cm_2004
김재학_장미_캔버스에 유채_40×80cm_2004

작가는 최근 특정의 소재에 집중했던 데서 벗어나 다양한 소재로 전환하게 된다. 정물, 풍경 등의 장르만이 아니라 그 소재도 다양하게 그려지고 있다. 작품의 크기도 초대형의 그림에서부터 작은 크기의 그림들이 곁들여져 공간의 연출을 보다 변화 있게 하고 있음이 엿보인다. 붓의 분방하고 감각적인 속도감이 더욱 많이 느껴지고 있다. 작가의 그림은 항상 잘 조율된 짜임새 속에서 분방한 붓의 유희가 돋보인다. 그것은 작가의 붓이 리듬을 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일탈하지 않도록 하는 적절한 제어장치가 그의 전신에 잘 분포되어 있는 듯하다. 사실 묘사력을 기본으로 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의 혼을 불어넣지 않을 작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관객에게 다 드러낸다는 것은 일류가 아니다. 노련하고 적절하게 조율하고 안배하는 가운데 자연스러움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관건이다. 감각적이면서도 대상의 재현성을 필요 이상으로 훼손하지 않고, 구체적이면서도 작가 자신의 개성적이고 감각적인 요소들을 적절히 반영해 내는 점이 작가의 장점이다. ● 작가의 근작 화면은 모네 등의 인상주의자들의 회화적 규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만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의지가 많이 엿보인다. 근작들에서는 대상을 보다 시적으로 해석하고자 의지가 돋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작가가 이 점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지는 않으나, 아주 조심스럽게 화면에서 전개시키고 있음이 드러난다. 사실 작가의 화면은 그렇게 복잡하게 구성된 적이 거의 없다. 또한 강렬한 원색을 즐겨 쓰거나 일필휘지의 호방한 필치를 과시하지도 않는다. 소박하고 가지런해 보이는 화면의 구성 속에서 한 편의 서정시를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봄」에서 그러한 점이 잘 엿보인다.

김재학_소나무_캔버스에 유채_89.4×130.3cm_2003
김재학_소나무_캔버스에 유채_89.4×130.3cm_2003

풀밭에 질그릇이 놓여 있고, 그 위에 새 한 마리가 정말로 살아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 화면에서 보듯, 작가는 자연을 통해 얻은 감흥을 노래하고 있다. 사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보여준 화면의 내용들은 대상의 우연한 발견이나 포착을 가장한 작가의 연출일 가능성이 짙다. 우연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작가의 의도적인 배치와 배열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질그릇 위에서 맑은 공기와 따스한 햇살을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새의 모습은 확실히 작가의 내면을 전하는 의인적 대상으로 보인다. 작가가 이러한 극적인 플롯을 설정하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새를 여타의 대상 이미지에 연결시켜 색다른 분위기를 환기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간혹 구사하는 조합이 약간은 상투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우리 전통 화조화 같은 장르에서 보여주는 조합의 묘미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초현실적 데페이즈망(depaysment)까지는 아니어도 색다른 조합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작가가 설정한 바로 그 조합이기에 또한 그 이상의 것도 없어 보이는 그런 부류의 만족이 있는 것이다. ● 일각에서는 작가의 작품을 극사실주의적인 양식으로 보는 시각들도 있다. 물론 사실적인 재현 방법만 놓고 보면 그렇게 분류된다고 하여 잘못된 것은 없어 보인다. 다만 예의 극사실주의가 대상을 보다 기계적 엄밀성과 차디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 비해, 작가는 대상에 대해 시선으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따뜻하게 품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차이를 느끼게 한다. 또한 전자가 문명 그 자체의 편린을 바라보고 있다면, 작가는 그 반대편의 자연을 바라보고, 아니 바라보기보다는 가슴에 품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하겠다. 작가가 묘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그림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고집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연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리되 꿈꾸는 것과 노래하는 것을 가미한 그리기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김재학_파도_캔버스에 유채_65×130cm_2004

앞서 언급했지만 작가가 미디어와 서로 만나게 된 것은 작가로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작가의 작품이 또한 그러한 미디어가 필요로 하는 내용들과 잘 일치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서로가 잘 조화를 이루어 좋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통적 의미의 미술은 이제 새로운 방식의 응용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점차 증대되는 자연에 대한 향수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도 미디어는 작가와 같은 작품세계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분야가 있지만 회화에서 접근되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참신성이 충분히 검토된 후에 일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사소해 보이나 거기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구상미술계 전체가 이 사실을 깊이 있게 모색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 우리 동시대의 미술 전체가 새로운 대안의 모색으로 참고해야 할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제 구상미술만이 아니라 모든 동시대의 미술 전체는 새로운 장으로 진입해야 하는 과제를 함께 안고 있다. 작가 개인에만 국한되는 성취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미술이 거둔 가능성과 성취로 인정하고 다각적인 모색을 해야 할 때임을 굳게 확신한다. ■ 이재언

Vol.20040702b | 김재학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