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파수꾼 ①_NEGATIVE POWER

책임기획_신혜영   2004_0703 ▶︎ 2004_0801

이샛별_중얼거림5_잡지에 아크릴채색_23×22cm_2001

참여작가 방정아_안교범_이샛별_이탈_진성훈_최종빈_한효석

관람료_1,000원

갤러리 상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9번지 Tel. 02_730_0030

세.속.의..경.험. ● 지금은 정신(Spirit)에 비해 물질이 우위를 점한 시대이다.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보다 보이는 것이 힘을 발휘하는 때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종할 때도 배후에는 보이는 것을 위한 실리(實理)를 감추고 있기 마련이다. ● 미술은 종교와 계급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후 또 다른 지배질서, 즉 자본과 사회시스템에 대한 대항을 시작하였다. 서구모더니즘 기획의 핵심을 그것으로 본다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시도가 제도와 자본에 흡수되거나 영합하는 것을 되풀이한다 하여도 저항을 멈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물질만능의 시대정신이 전지구화 되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미술은 현실을 깨우는 역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 전시 『7인의 파수꾼Ⅰ_Negative Power』는 예술가의 영감을 빌어 현실의 부조리를 직면하려는 기획이다. ● 현시대의 모순은 자명하여 비판의 목소리는 높고 분석의 내용도 예리하다. 하지만 돌처럼 움직이지 않는 현실에 반복되는 저항은 마치 일상화된 모순에 일상화된 비판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힘을 상실하여 절망 끝에 냉소가 되기 쉽다. ● 또한, 미술 작품은 현실이 아니다. 실제를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제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전시장 밖을 뛰쳐나가도, 돈과 맞바꿀 수 없는 혐오스러운 작품을 제작하여도 마침내 미술관과 경매장안에 자리를 잡아야만 작가와 작품이 남게 된다. 그만큼 작품에는 현실적인 힘이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순의 극복에 대한 어떠한 청신호도 없는 상태에서 기어이 그 환부를 드러내고야 말겠다는 작업에는 이유가 있다. 작가적 양심이나 반골로 타고난 본능이 그 이유가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전시를 통해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다른 것에 있다. 물리적으로는 현실의 터럭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작품이지만 작품을 생성하는 작가의 내면적 힘. 그 보이지 않는 힘이 결국은 미래의 현실을 창조해 내리라는 믿음이다. ● 『7인의 파수꾼Ⅰ Negative Power』의 작품은 비판을 기저에 둔 차가운 웃음이 아니다. 오히려 애정을 바탕으로 한 뜨거운 울음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의 자기 민족을 대신하여 애통해하는 뜨거운 울음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힘을 갖는다. Negative Power 이지만 참된 긍정을 위한 참된 부정인 것이다.

방정아_오천원짜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116.7cm_2001
방정아_그녀에게 삶은 왜 고통이었을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116.7cm_2003
방정아_터질 것 같은 나_혼합매체_170×80×70cm_2004

방정아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 다르게 사랑하는 법 /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 그러면서도 모든 사물의 배후를 //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 한 아이처럼 웃을 것 (최승자, 「올여름의 인생공부」) ● 위의 글은 방정아의 1996년 개인전 작품과 함께 실린 한 구절의 시이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글의 서두를 최승자의 시로 한 데는 이유가 있다. 방정아의 작품은 이야기그림처럼 어떤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약간 어정쩡해 보이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여자이다. 인물과 상황은 너무 평범한 느낌을 주므로 우리는 작품의 의미를 수수께끼 대하듯 풀어나가야 한다. 각각 다른 이야기들 속에 감추어진 작가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최승자의 시 한 구절은 짧지만 큰 도움을 준다. ● 처음 인쇄물을 통해 접한 방정아의 작품은 「인생극장-넌 나의 영원한 적이야」라는 것이었는데 서로 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두 팔을 앞으로 내밀고 막 싸우려는 두 부부를 그린 것이었다. 그리고 촌스러운 벽지에 등을 기대고 이불을 무릎 위까지 덮은 채 사과를 까먹으면서 텔레비전 보기에 몰두하는 중년의 두 아줌마의 모습을 그린 「당신이 그리워질 때」라는 작품도 보았었다. 일일 연속극에 등장하는 코믹한 장면 같은 그림은 이내 웃음을 자아내었다. 세련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너무나 친숙해서 다정하게까지 느껴지는 작품들은 작은 감동을 자아내는 우리의 삶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직접 체험하거나 적어도 실재 목격한 것들을 다룬다. ● 어찌 보면 익살스럽고 정감 있는 작품을 어둡고 부정적인 '세속의 경험'으로 제시하기에는 의아스러운 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들이 소소한 따뜻함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속에는 편안하게 보고 넘길 수 없는 가시 같은 것이 존재한다. 작가는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만큼 나이를 먹었으며 본인을 직접 그린 것들도 많다. 한국의 80년대를 경험하였고, 그것은 사회 정치적인 측면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의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방정아의 작품에서 뚜렷한 이념성이나 정치적 입장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 이면의 것을 파헤치고자 하는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들이 일상에 밀착되어있고 어려운 사상이나 무거운 정치적 이슈가 아닐 뿐이다. ●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림에 재미있는 제목을 붙이는 것도 작가의 개성인데, 「그녀에게 삶은 왜 고통이었을까」, 「오 천 원 짜리들」, 「터질 것 같은 나」, 「이미 늙었다네」, 「제 살 뜯어먹는 놈」 등이다. ● 공중화장실에서 작가가 직접 목격한 어느 여자의 실신한 장면을 그린 것이 「그녀에게..」라는 작품이다. 안타까움이나 조롱의 감정을 품고 지나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작가는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 한 여자의 불행-단순 졸도가 아닌 약을 복용한 듯 했다고 한다-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행복과 불행이 이미 한 개인만의 소관을 벗어난 사회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 오천원짜리 도매금으로 팔고 있는 속옷을 만지작거리는 여자는 왜 그림의 소재가 되었을까? 그것은 「터질 것 같은 나」에서 사람의 존엄을 상실한 여자와 고단한 생활 속에 기력을 잃어버린 늙은 여자의 모습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그림의 주인공은 바보스럽기도 하고 속물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물감을 칠한 붓 자국은 세심함과는 거리가 멀고 색상도 우아함을 애써 피하려는 듯 날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림 속의 여자와 어설픈 듯이 붓질한 것이 맞아떨어진다. 하루하루 주어진 생활에 적응은 하고 있지만 꼭 맞지 않아 불편한 옷을 입은 듯 느껴지는 주인공은 한순간에 지워져버릴 수도 있는 존재처럼 나약하고 불안해 보인다. 이것은 여자로서 사는 삶이 지니는 부당함에 대한 기록일까? 작품은 그것을 넘어서서 안정과 합리를 추구하는 우리 공동체의 위기감을 나타내고 있다. 한번의 파도에 힘없이 쓸려나갈 모래성을 열심히 쌓아나가는 듯한 불안감은 지하철역사에 휑하니 앉아 누군가 날 보고 있지 않은가라는 의혹에 찬 「의심」속 여자의 모습을 닮아있다. ● 일상을 담은 작품은 삶에 더 밀착하고 허황되지 않으려는 작가의 보이지 않는 투쟁의 결과물이다. 다년간의 작업으로 인해 이제 하나의 어법으로 비쳐져 쉬어 보일 수 있을지라도 그 뒤에 감추어진 날카로운 긴장은 작품을 살아있게 만든다. 긴장감 있게 포착한 일상은 어떤 위기감을 내포하는데 위기의 주체는 여성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 사회를 살아나가는 현대인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사회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외치지만, 늘 드리워져 있는 위기의 정체는 겉으로 드러내는 근사한 표어들에 비해 남루하고 소외된 실상과의 간극에 있는 것이 아닐까. '제 살 뜯어먹는 놈'은 그 위기감에서 애써 눈감으려는, 눈감아야만 하루하루를 영위할 수 있는 현대인의 뇌관을 저릿하게 자극한다.

안교범_짓이기다-인체_헌옷에 유채_160×115cm_2002
안교범_짓이기다-인체_캔버스에 유채_130×90cm, 130×80cm_2002

안교범 ● 안교범의 작품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이 충만한 에너지의 표현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열정을 품은 사람들이지만, 최근에는 열정보다는 기지와 이론이 앞서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경험한다. 전시의 주제인 'Negative Power'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는 것 이전에 순수한 열정을 뿜어내는 작품을 본 것으로도 덩달아 기운이 솟는 것을 느낀다. ● 작품의 제목은 「짓이기다-Beat a person to a jelly」이다. 물감을 천 위에 폭탄 투하하듯이 난사한 작품을 보며 기운이 솟는다라고 하는 것이 낯설 수도 있겠다. 인체를 묘사한 것이지만 짓뭉개진 물감 덩어리이외에 무엇이 보이느냐는 사람들도 있을법하다. 나 또한 이 그림들이 인체를 묘사한 것이라는 사실이 크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인체로부터 출발을 했던, 고양이로부터 출발을 했던(작품 중에 '짓이기다-고양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아님 그 흔한 사과로부터 출발했던지 간에 중요한 점은 작가가 그 대상들을 짓이겨버렸다는 점이다. ● 안교범의 1회 개인전 책자에는 보일 듯 말 듯한 자그마한 글자로 짧은 글귀가 쓰여져 있다. "현실을 짓이기다. / 이상을 짓이기다. / 인간을 짓이기다. / 물감을 짓이기다." ● 뒤엉킨 물감과 천조각들은 다른 6명의 작가들에게서처럼 구체적인 이야기를 건네지는 않는다. 현란한 색상은 나름대로 조화로움을 가지고 있어서 거친 느낌을 제외하면 순수한 반추상화를 보는 것 같다.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교범의 작품에서는 그런 시각적인 즐거움보다는 감정의 동요를 훨씬 크게 느낄 수가 있다. 처음 흰 캔버스 위에 토해놓은 감정은 그것도 모자라 갈기갈기 찢어 놓은 헌 옷 위로 옮겨간다. ● 작가는 특별한 사회적 모순이나 부정(不正)을 의식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성실하게 자신의 감성이 가는 곳으로 몸을 움직여 온 듯 하다. 최근 안교범의 작품은 드로잉으로 인간의 탐욕스러운 욕망을 거침없이 묘사한 것들이다. 작품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발견하고 선택한 듯 하다. ● 그러나 이번 전시에는 최근의 작품이 아닌 2002년의 작품, 그러니까 작가가 자신의 시각을 선명하게 의식하기 전의 작품을 전시한다. 의도적으로 묘사한 그림보다는 작가의 몸짓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작품에서 그의 감정이 순수하게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작가가 진행하고 있는 작업도 작가에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 작가가 무언가를 짓이기고 도발적으로 파괴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의도를 따라가 보자. 현실과 이상과 인간을 짓이기기 위해서 그는 화가이므로 그 모든 것들을 물감으로 대신하였다. 이탈이나 이샛별이 부정(否定)하고자 하는 것을 안교범은 섬세하게 분석하지 않은 채 그야말로 부정(否定)하는 행위자체로 자신의 감성을 드러낸 것이다. 무엇엔가 반(反)하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 최근 어떤 단체나 흐름 앞에 Anti라는 단어를 붙여 비판하고 견제하는 현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널리 알려지고 공식화 된 무언가에 비판을 가할 수 있다는 것도 최근에 와서 일반화 된 현상이다. 작가의 신명나는 부정의 표현은 반듯하게 잘 정돈된 듯한 현대 사회를 뒤흔드는 시원한 한 판의 춤으로 읽혀진다. 이제 체 길들여지지 않은 감성의 면면을 이성적으로 만나보고자 하는 작가의 또 다른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며, 작가의 새로운 고민이 순수한 감성을 좀 더 노련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돌파구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이샛별_금지된 제스쳐1_잡지에 아크릴채색_30×44cm_2001
이샛별_화초_잡지에 아크릴채색_30×23cm_2001

이샛별"쉽게 타인의 영향을 받아온 양은 그것이 비록 자신에게 해로운 일이라도 시키는 대로 순종해 왔으며, 그들을 위해 결정을 내려줄 지도자를 따라 결과가 오직 파괴뿐일지라도 힘의 뒷받침을 받기만 하면 어떠한 난센스라도 믿어왔다."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 이샛별의 그림에도 사람이 등장한다. 성별을 구분하기는커녕 아이인지 어른인지 모를 바보 같은 모습이다. 20대 중반이 넘어서 순수미술을 시작한 작가는 디자이너로서 쉽게 접했던 잡지이미지 위에 자신의 그림을 그린다. 보통 노트 크기의 그림은 바탕에 이미 만들어진 사진이 찍혀져 있는 것이다. 뭔가 모자라 보이는 사람의 모양새는 이샛별의 홈페이지 첫 화면을 장식하고 있기도 하다. ● 작가 이탈이 사회를 움직이는 음험한 힘을 폭로하는 작품을 만들었다면, 이샛별은 배후의 힘에 의해 멍청하게 조종당하거나 알면서도 순종하는 익명의 인물을 그린다. 작가의 작품 중에 많이 알려진 작품들은 「위장-보호색」시리즈로서 화려하게 프린팅 된 꽃들 사이로 마치 좀비처럼 묘사된 사람이 그려진 그림이다. 제목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화려함 속에 가리고 있지만 이미 아름다움이나 건강함을 상실한 인간을 그린 것이다. 2001년에 그린 「화초」라는 작품은 바보 같은 남녀가 화초를 손에 들고 앉아있는 그림인데 제목과 함께 '호화롭고 안전하게 사는 겁니다'라는 글귀가 덧붙여져 있다. ● 비슷한 이미지의 인물을 그린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또 다른 몇몇 작품은 전혀 다른 내용이다. 위선으로 자신을 가린 추한 모습의 사람들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부적응자, 또는 소수자에 대한 은유로 비쳐진다. 「완전한 생산물」, 「금지된 제스춰」 등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 동물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가진 이상한 생명체에 '완전한 생산물'이라는 제목을 단 작가의 의도는 사회의 통념에 대한 반발로 읽혀진다. 사회의 조화와 건강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기시 되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흔히 도덕적인 잣대라는 것이 그 평가의 기준이다. 성실하게 제도교육을 받고 일류대학을 나와서 근사한 직장을 잡아 제때에 결혼하여 건강한 자식을 나아 훌륭한 교육을 시키며 노후에 세계여행을 다니며 즐기는 것... 건조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대열에 끼지 못하게 될까봐 내심 두려워하거나 서로를 보채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 볼일이다. 애초에 이 대열에서 낙오된 사람들은 사회 부적응자 또는 능력이 결핍된 사람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신체적인 결함이 그 이유인 경우에도 예외는 없다. 자신이 대열에서 일탈될까봐 전전긍긍하느라 주변을 둘러보거나 곰곰이 생각해 볼 여유가 없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아님, 진실을 느끼더라도 애써 더 이상 파헤치지 않고 못 본 척 덮어두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 ● 작가는 매우 어색하고 비정상적인 인물을 그림으로써 현대사회의 모순을 꼬집는 작품을 시작으로 이후에는 아예 주변의 것들에 파묻혀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위장」시리즈로 옮겨가게 되었다. 보호색으로 자신을 위장한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사회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그러나 보호라는 말 뒤에 숨은 나약함은 한 개인의 문제를 떠난 어떤 거대 구조의 모순을 떠올리게 한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모순의 얼개들은 다시 한사람 한사람이 당당히 위장을 벗고 진짜 자신을 내보이는 용기를 발휘할 때 조금씩 풀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위장'하지 않고도 살아나갈 수 있는 삶에 대한 꿈은 가면을 쓴 현재의 모습을 알아차리는 것을 시작으로 현실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이탈_십계명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3
이탈_오래된 구조_가정용 백열전구 100여개_가변설치_2003

이탈 ● 예술가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민감한 감수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전시를 준비하며 사회의 병폐에 대해 예민하게 아파하는 예술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감성을 감수성이라 해도 좋지만 나는 '영성'이라고 하고 싶다. 물론 특정 종교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과학적인 이론과 합리를 뛰어넘어서 영혼으로 진실을 갈망하는 것쯤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그런 정신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지만 특히 더 높은 순수를 지향 할 수 있으므로 예술가에게 그러한 '비판적 영성'을 요구하려 한다면 너무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것일까? ● 아무튼, 현실의 어두운 모습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작품으로 풀어내는 작가들을 찾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이탈이라는 작가였다. ● 작가가 만든 대부분의 작품은 매우 어둡고 흉물스럽다. 작가의 대표작인 「십계명」이 특히 그런 느낌을 자아낸다. 스폰지, 에폭시와 물감 등을 섞어서 만든 덩어리는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이다. 오히려 그것보다 더 거칠고 흉악해 보인다. 전시장 가득 메운 이 고깃덩어리는 작가가 바라본 지금 이 세상이다. 이 기괴함은 다른 작품들, 「야합」, 「Video Jumping」등의 작품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 「야합」은 천으로 씌워져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몰려다니며 뭔가를 작당하는 소름끼치는 순간을 묘사한다. 정체를 알 수 없으므로 섬뜩함이 강조된다. ● 「Video Jumping」은 새마을 운동 가락에 맞추어 줄넘기를 하는 나체의 남자인데 카메라 앵글을 잡은 위치의 절묘함이 이 인물을 코믹하게 만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뛰고 있는 인물은 「십계명」에서의 엄숙함조차도 없이 하나의 벌레나 미생물처럼 천박해 보인다. 왜 뛰는지, 무엇을 위해 뛰는지, 언제까지 뛰고 있을 것인지를 생각할만한 뇌나 심장은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 나는 이탈의 작품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작가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현실의 어둠이라는 사실에 처연함을 느끼고 있었다. 정치와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이들의 부도덕성과 이미 한 개인의 주체적인 생각을 용납하지 않는 TV, 영화, 상품광고 등의 미디어. 돈 많이 버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있는 것이 자명한 현실이지만 그 어두컴컴함에 목놓아 우는 듯이 보이는 작가의 작품은 나를 깊은 절망 속으로 내몰기만 하였다. ● 그 절망은 현실의 어둠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바로 작가의 순수하고 날카로운 작가적 역량마저 거친 정서 때문에 묻혀버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외부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작가 내적인 공간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그 와중에 매우 작은 작품인 「오래된 구조」를 보게 되었는데, 마찬가지로 현대문명의 실패한 부분을 꼬집고 있으나 이전 작품과는 다른 정서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 「오래된 구조」는 백여개의 60촉 투명전구들이 다발로 묶여있고 무차별하게 깨어져 벽에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바닥에는 부서진 유리조각이 고스란히 널려있고, 깨어진 전구다발 위에서 다른 조명이 비추고 있는 형태이다. 그나마 위쪽의 조명으로 인해 스스로 빛을 잃은 전구는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다. ● 지금까지 보아온 작가의 작품이 폭력적이고 거칠고 음흉한 현실을 반영했다면 이 작품은 그러한 현실이 생명력을 잃고 나약해진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깨진 전구의 형태는 그야말로 지적이고 합리적인 현대문명의 오만으로 비쳐졌다. 하지만 전구는 깨어졌고, 더 이상 빛을 발할 수 없다.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고독이 느껴진다. 이 고독은 곧 작가의 심경으로 읽혀졌다. 거칠고 비판적인 작품들을 통해 가려졌던 작가의 고독과 슬픔을 맞닥뜨리면서 오히려 작가 내면의 공간을 엿보게 된 것이다. 거센 비판과 큰소리의 외침보다 더 깊게 호소할 수 있는 것은 비록 작더라도 자신의 진심이 아닐까. 현실의 두꺼운 벽을 작품을 통한 저항으로 맞서온 작가가 그 두꺼운 벽만큼 강한 진실함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며 힘을 갖기를 바란다. 이에 반가운 마음으로 이탈의 앞으로의 작품을 지켜보고자 한다.

진성훈_무제_컬러인화에 혼합재료_100×100cm_2002
진성훈_무제_컬러인화에 혼합재료_150×100cm, 100×60cm_2002

진성훈 ● 한효석이 두피를 벗긴 육질의 얼굴을 묘사했다면, 진성훈은 얇게 벗긴 두피만을 표현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 이번에 전시되는 진성훈의 작품들은 지난 2002년 개인전에 전시되었던 작품중의 일부이다. 전시명칭이 「두께 없는 편린들」이었는데 눈동자가 보이지 않고 속이 텅 빈 껍질뿐인 사람을 그린 것들이었다. 진성훈은 자신이 원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 그 표현방법과 내용을 오랜 시간 탐구한다. 첫 번째 개인전 「떠나는 사람들」전시는 지점토로 만든 입체 위에 채색한 작품들이었다. 그 후 선보인 「두께 없는 편린들」의 인물 시리즈는 전혀 다른 표현방법으로 제작되었다. 컴퓨터 안에서 합성한 이미지를 출력해 판넬 위에 오려붙인 후 그 위에 다시 색칠하는 기법이다. 처음에는 합성한 이미지를 자료로 하여 캔버스 위에 직접 그림을 그렸으나 원하는 느낌을 얻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얇게 오린 종잇장의 느낌을 내는데 적합치 않았던 것 같다. 컴퓨터로 합성도 하고 가위로 잘라서 채색까지 하여 그린 사람은 그야말로 껍데기로만 존재하는 인물이 되었다. ● 이렇게 껍질만 제시된 존재들은 도무지 감정이라는 것을 주고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몸의 관절이 어색하게 조합된 여성의 전신상은 얼굴뿐 아니라 몸 전체가 얇고 가벼운 종잇장으로 되어 있다. 움직임은 자유롭지 않고 자칫 엉성한 몸은 부서질 것만 같다. ● 우리는 종종 '위선자'라는 말을 서로 주고받는다. 물론, 유쾌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을 무난히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솔직하게 내보이는 것 보다 정도껏 치장하고 속내를 전부 드러내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쩌면 누구나 상대방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진성훈의 작품은 존재감 없이 둥둥 떠다니는 인물을 캔버스 안에 붙잡아 놓은 것이다. ● 전시되지 않은 작품들 중에는 국내 유명정치인의 얼굴을 표현한 것도 있다. 일반 사람들의 솔직하지 못한 위선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증스러운 권력자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작품들이다. 이들의 얼굴은 온갖 매스컴을 통해 그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일반사람들에게 인식된다. 하지만 미디어에 의한 이미지는 거의 대부분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누구나 인정한다. 조작과 통제는 충분히 가능하며 그것은 특정인을 포함한 어떤 사건, 어떤 사실에까지 확장된다. 어쩌면 인류는 발달된 통신과 미디어 산업으로 인해 현실의 실제를 만나기보다는 그 껍데기를 만나게 된 것 일수도 있다. 진정한 마음과 뜻과 실체를 파악할 수 없이 겉만 번드르하게 포장된 표피들끼리의 만남.

최종빈_산책_마트지에 혼합재료_78×108cm_2004
최종빈_사격_마트지에 혼합재료_78×108cm_2004
최종빈_인간적 인간? 동물적 인간!_혼합재료_112×145.5cm_2004

최종빈 ● 인간으로 할 수 없는 파렴치한 일을 저지른 사람을 보고 보통 '짐승같은', '짐승보다 못한'이라는 표현을 쓴다. 사람에 비해 지능이 낮고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 이외에는 모르는 것이 짐승이기 때문이다. 최종빈의 「인간적 인간? 동물적 인간!」이라는 작품 제목은 물음표와 느낌표의 사용으로 현실에 대한 절망을 드러낸다. ● 동물이라는 개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원초적이고 순수한 존재로서의 동물적 속성은 메말라 생기를 잃어버린 현대사회가 되찾아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최종빈의 작업 전반에 나타나는 동물은 순수성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야수성과 폭력성을 지닌 존재이다. 동물로서 제시되는 것은 다양하다. 소나 돼지나 말 같은 종류로부터 곤충과 새, 물고기까지 등장한다. ● 공격적이거나 야수의 이미지를 가진 동물은 사람의 몸통과 접합되어 반인반수의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하고, 인간을 습격하는 두려운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전체로 보면 인간의 몸이지만 그 개별요소가 야생동물로 이루어진 그림도 있다. 작가의 작업실에는 박제된 호랑이나 벌레 모형, 인조 가죽 등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 추측하건데 작가가 동물의 이미지나 속성을 빌려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인간의 속성이다. 인간은 사실 동물의 야수성과 본능을 비난하거나 판단할 처지에 있지 않다. 가치판단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는 부분이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주어지고 지어진 대로 살아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동물적, 혹은 야수적 운운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규정짓고 이해하기 위해 빌려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인간적인 사회의 세태를 드러내기 위해 동물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할 수 있겠다. ● 작가는 동물, 곤충, 조류의 모습을 통해 자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의 삶을 포착한다. 이것은 떼지어 몰려다니며 파괴하고 어그러뜨리는 순간이다. 때로는 기계문명의 폭력적인 모습과 동물적 속성을 대비해 '짐승'보다 더 야만적인 현실을 폭로한다. 머릿속에 온갖 동물의 형상을 담고 있는 두상과 무수한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를 담고 있는 두상을 함께 제시한 「인간적 인간? 동물적 인간!」은 전쟁과 고문으로 얼룩진 현대 사회의 비극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 많은 작가들이 인간의 모순된 모습을 비유할 때 동물이나 훼손된 육체를 끌어온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의 모습과 말이나 행동이 훨씬 잔인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제는 오히려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부분을 비유할 때 동물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이 설득력 있을 수도 있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커다란 수치와 절망을 경험하게 하는 때에 참된 도리를 지키고 진실을 이루어나갈 수 있는 희망을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가.

한효석_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는데 드러나고만 어떤 것들에 대하여_각 230×150cm_2003

한효석 ● 누구나 한효석의 첫인상을 마주친 후 그의 작품을 본다면 놀람을 금치 못할 것이다. 호리호리하고 매끈한 인상을 지닌 작가가 만든 작품이 호러영화를 연상케 할만큼 충격적인 점에서이다. 작가의 인상을 운운하며 글문을 튼 이유는 작품이 가진 무거움, 또는 충격의 완벽함도 한 작가의 생각과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작품은 외계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이해하고 의견을 나누며 함께 느끼고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한효석의 작품이 7명의 작품 중 가장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작가는 왜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들여 이러한 이미지를 만들어 보여주는가? 작가의 지독한 성실성에 반만큼이라도 우린 그 질문에 대한 고민을 해 보아야 한다. ● 작품은 크게 평면과 입체작품 두 가지이다. 평면 작품은 사람 얼굴의 두피를 벗긴 듯한 모습으로 눈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붉은 살코기와 지방질의 육질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어른의 얼굴도 있고 아이의 얼굴도 있다. 사진으로 합성한 것과 직접 그린 것이 있는데 아무래도 직접 그린 작품의 생생함이 더 강하다. 보자마자 눈을 돌려 외면하고플 정도로 끔찍한 장면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누구의 두피를 벗기더라도 보여질 수 있는 실제 우리의 모습이다. 제목은 「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는데 드러나고만 어떤 것들에 대하여」이다. 인간의 근본적 본성이, 그 존엄성이 파괴되어 있다고 진단하는 작가는 살코기로 이루어진 모습을 빌어서 '사람은 원래 동물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아름다운 의복과 지성적인 말투, 사회적 지위로 치장하고 있지만 그 본성은 고귀한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자극적인 작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망각하고 본성 위에 덧씌워 진 것들을 핑계삼아 서로 속이고 편가르고 더 나아가 잔혹한 짓까지 서슴지 않는 인간에 대한 반어법이다. 육질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작품 속의 존재는 표면적으로는 섬칫해 보이지만 위선을 일삼는 현대인보다 훨씬 순수한 존재라는 것이다. ● 이번 전시에 처음 선 보일 입체작품은 작가가 의도하는 충격적인 자극을 불러일으키는데 정점을 이룰 만한 작품이다. '반인반수'의 생명체인데, 이제껏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나 인형으로 만든 작품들과는 그 사실적인 면에서 커다란 차이를 갖는다. 머리는 사람이고 몸통은 돼지이다. 돼지의 몸은 가슴부터 배 아랫부분까지 길게 절단되어 뱃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 작가는 이 작품을 사실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6년간을 연구해왔다. 실제 사람의 머리를 캐스팅하고 실제 돼지의 사체를 캐스팅해서 붙이는 작업인데, 눈썹과 수염을 심고, 표피를 채색하여 실제와 분간할 수 없도록 세밀하게 만들어내었다. ● 이 입체작품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돼지나 소, 닭을 희생시키는 행위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만행이 거의 같은 수준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천재지변이 이유가 아닌 다음에야 사람의 희생은 결국 같은 동류 인간에 의한 것이고 그것은 역사를 되풀이하여 진행되고 있다. 한 광인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기에는 수없이 반복되는 살인과 고문은 사회의 구조적인 병폐 또는 인간이 가진 야수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반인반수의 생명체는 결국 희생당하는 인간을 표현한 것이고 이것은 처참한 희생의 원인과 목적을 묻는 질문이다. ● TV를 끄면 전쟁에 대한 보도는 꺼진다. 신문을 보지 않으면 시체가 된 가족을 안고 오열하는 사람의 사진은 보지 않아도 된다. 아니, 이제는 식상해진 폭력 앞에 무디어진 우리에게 작가는 이러한 극단적인 작품으로 말걸기를 시도하는 것은 아닐까. ■ 신혜영

Vol.20040703a | 7인의 파수꾼 ①_NEGATIVE POWER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