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Mar

최영진 사진展   2004_0714 ▶︎ 2004_0720

최영진_La Mar_흑백인화_100×30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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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714_수요일_06: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2층 Tel. 02_736_1020

뻘의 추상과 미혹(迷惑)의 파노라마 ● 한 사진가에게 본다는 것, 구성한다는 것, 재현한다는 것, 전시한다는 것은 고도의 판단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보는 것에서 전시까지 부단한 자기 판단 속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가에게 "봄(seeing)"의 문제는 맨 먼저 시선과 인식의 문제로 온다. 그 봄에서 이미지의 형태를 분석하고 배열하는 것을 "구성(frame work)"이라고 말하고, 구성을 통해서 대상의 어떤 특징이나 차이와 드러냄을 "재현(representa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한 자리에서 보이는 상황을 "전시(display)"라고 말한다. 한 사진가에게는 이렇듯 바라봄에서 시작하여, 인식의 구성과 만나고, 구성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고, 결정하고, 강조하고, 의미화 할 것인가 하는 재현의 본질과 마주친다. 한 장의 사진에는 이렇듯 무수한 선택과, 강조와, 의미들이 숨어있다. 그래서 사진을 한 꺼풀만 벗기면 사진가가 그때그때 갈등했던 선택의 본질들, 예컨대 추가와 삭제, 확장과 축소, 높음과 낮음, 옅음과 깊음, 당김과 밀어냄, 밝음과 어둠 등, 프레임 속에는 쉬 드러나지 않은 판단과 선택의 고뇌가 숨어 있다. ● 최영진의 사진들은 그런 점에서 많은 이야기꺼리를 제공한다. 특히 지난번에 전시한『라 마르(La Mar)』와 같은 "갯벌"이 소재이기 때문에 이전의 사진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어떤 점들을 말하기 위해 최초의 봄에서 최후의 전시까지 달라져야 했는지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이러한 물음들은 따라서 한 사진가가 당면한 무수한 판단과 선택과 결정에 대한 하나의 사례로 말해 질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지난번 뻘(갯벌보다는 뻘이 대상의 명료함을 준다)과 이번 뻘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지난번에는 뻘의 형상과 디테일을 위해 클로즈업이 많았고, 즉물적(卽物的)이었으며, 하셀브라드 포맷이었다. 그가 뻘의 형태, 특히 뻘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외형(外形)에 매우 주목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번 뻘의 카메라 워크는 상당히 다르다. 전후, 좌우, 상하 프레임의 확장이 있었다. 대상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남으로써 전후 공간감이 생겼고, 하늘을 넣음으로써 상하 입체감이 생겼으며, 파노라마 포맷을 사용함으로써 좌우 시각이 열렸다.

최영진_La Mar_흑백인화_100×300cm_2004

이러한 변화 앞에서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이 이렇게 묻게 된다. 무엇이 즉물적 추상에서 물러나게 했고, 무엇이 하늘을 넣도록 했으며, 무엇이 파노라마 프레임으로 바꾸도록 했는가. 이런 물음의 끝자락에서 언제나 사진가의 본질적인 카메라 워크, 즉 최초의 봄에서 최후의 재현까지 그 의미와 맥락과 만난다. 그래서 이번 사진들에 다음과 같은 가설을 하나 이끌어 내본다. "이번에 뻘의 외관적 추상에서 한 발짝 물러난 이유는 뻘의 내재적 추상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뻘의 즉물성에서 물러났고 대신 뻘과 뻘을 둘러싼 환경을 프레임 속에서 강조했다. 또 지난번의 정사각형 하셀브라드 포맷이 아닌 파노라마 포맷으로 변경한 것도 뻘의 수평선과 관객의 몰입을 위한 의도였다. 이것들은 모두 처음부터 의도된 것으로 분명한 전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전략이란 다른 게 아니다. 최초의 봄에서 시작하여 구성, 재현을 거쳐 최후 전시에 이르는 일종의 작가 의지이기 때문에 이번 뻘은 지난 번 뻘과 달리 어떤 새로운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하고 판단하고 결정한 인식의 결과물이다."

최영진_La Mar_흑백인화_100×300cm_2004

이 가설을 받아들이면 최영진의 뻘은 뻘의 또 다른 면이 된다. 또 의지에 따른 전략적 카메라 워크가 된다. 그렇다면 이 전략적 카메라 워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론적 패러다임의 적용이 가능하다. 하나는 들뢰즈(G. Deleuze)가 추상을 말할 때 사용한 "돌발흔적"이라는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비릴리오(P. Virilio)가 이미지의 몰입과 확장을 위해 사용한 "파노라마 통각"이라는 개념이다. 이들의 이론은 매우 난해하지만 그러나 최영진의 뻘의 이미지를 설명하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 먼저 그가 뻘의 즉물적 기학적 추상에서 물러나 깊은 공간감과 주변 상황을 프레임에 넣었다는 것은 뻘의 추상성에 다가가되 추상의 또 다른 면을 보고자했음을 말한다. 이는 뻘의 외재적 추상이 아닌 내재적 추상으로서 뻘과 바다가 만들어내는 돌발 흔적으로서의 추상이다. 돌발 흔적이란 뻘과 바다가 공모한 "생명력"의 추상을 말한다. 돌발 추상을 통해서 뻘은 거대한 바다의 지도를 만든다. 뻘과 바다가 어떤 내재적 암호를 지닌 것처럼 거대한 추상적 지도를 완성한다. 갯벌 전체가 거대한 추상적 지도로서 돌발 흔적이다.

최영진_La Mar_흑백인화_100×300cm_2004

모든 생명에는 살기 위한 들숨과 날숨이 있다. 그래서 모든 생명에는 살기 위한 숨구멍과 핏줄이 있다. 최영진이 바라본 뻘은 단순한 뻘의 추상이 아니라 생명의 숨구멍, 생명의 수로(水路)로서 살아 있는 바다와 살아 있는 뻘이 공모(共謀)한 생명선이다. 뻘의 구조는 필연적으로 바다와 관계를 맺어 서로의 통행로를 허락한다. 뻘의 돌발 흔적은 이 속에서 만들어진다. 생명의 들숨과 날숨처럼, 물이 들어왔다 나가는 사이에서 만들어진 생명선으로서 자국이고, 흔적이다. 인간의 숨구멍과 핏줄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생명의 내재적 추상이다. 이 점에서 돌발 흔적은 어떤 공모의 자국이다. 선과 원, 완만한 곡선으로 나타난 형상들은 질서와 리듬이며, 또 격렬한 혼돈이 있었음을 말하는 역동성의 자국이기도 하다. 이제 이것들이 태양 아래서 또 다른 질서로서 추상적 대상이 되고 있다. 때문에 그가 이전과 다른 공간감과 원근감을 보여준 것은 이러한 의미망의 변화이다. 뻘의 즉물적 외형에서 벗어나 뻘을 둘러싼 환경과 그 환경 속에서 바다를 보고, 하늘을 보고 살아가는 생명력과 역동성의 흔적을 본다. 카메라 워크가 변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뻘과 바다가 생명을 위해 남겼던 돌발 흔적들, 뻘과 바다가 공모했던 들숨과 날숨의 추상성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최영진_La Mar_흑백인화_100×300cm_2004

이제 두 번째는 파노라마 통각(統覺)이다. 여기서 통각이란 통찰의 의미와 같다. 파노라마 프레임이 유행이지만 파노라마 프레임은 사진 탄생 이전부터 있었고, 인간이 꿈꾼 가장 이상적인 프레임이기도 했다. 인간은 신처럼 전지전능하게 360도를 굽어보기를 원했다. 이음새 없는 창, 경계 없는 창, 그리하여 이미지 공간에서 몰입과 환각을 맞보고 싶어했다. 인간이 생각한 파노라마 통각은 수평선의 확장에 있었다. 수평의 확장을 통해서 주체와 대상간의 물리적 거리감을 해체시키는 재현의 극대화이다. 이렇게 되면 몰입이 강화되고, 대상과 미적 거리가 해체되어 현실 같은 느낌을 준다. 최영진이 하셀브라드 포맷에서 파노라마 포맷으로 바꾼 것은 이러한 의도 때문이다. 클로즈업에서 물러났던 것, 내재적 추상과 만났던 것, 생명의 돌발 흔적들을 겨냥했던 것들은 파노라마 포맷에서 실현 가능하다. 특히 뻘과 수로, 뻘과 바다, 뻘과 하늘이 맞닿은 새로운 풍경지형도(landscape topograph)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뿐만 아니라 파노라마 포맷을 사용했을 때 관객이 몰입되고 마치 실제 뻘의 느낌과 갯벌의 환경적 상황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경계 부분이 없고 솔기가 없어 재현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파노라마 프레임이다. ● 한 사진가가 대상을 발견하고 자극에 이르고, 자극을 분석하여 판단에 이르고, 마침내 표현으로 이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흔히 사진가는 일반 사람들의 두 배의 각도, 즉 수평 360도, 수직 360도, 도합 720도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선택을 기다리는 무수한 초점거리가 있고, 또 어느 부분을 넣고 빼야 좋은지 프레임의 갈등 또한 대단하다. 이런 것들을 자유자재로 해낼 때 우리는 작가라고 말한다. 최영진의 사진은 그런 점에서 손색이 없다. 사실 "뻘"은 생각보다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소재이다. 설사 다가섰다 해도 생각보다 재현이 어려운 것이 또한 뻘이다. 여기에 눈으로 만지듯, 시각적 촉각성까지 염두에 두기 때문에 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뻘을 떠나지 않는다. 뻘이 창조해 낸 여러 가지 매력 때문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포콩(B. Faucon)의 말처럼 "가장 찍고 싶은 것은 가장 잘 찍을 수 없다" 라는 어떤 미혹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부드러운 트랙, 나선형 수로, 물결치는 뻘의 곡선 등, 변화무쌍한 기하학적 추상에 미혹 당하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뻘의 통행로에 갇힌 탈출 불가능한 포로이기 때문이다. ■ 진동선

Vol.20040714a | 최영진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