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아무렇지 않은...

이동환 채색展   2004_0728 ▶︎ 2004_0803

이동환_문득,, 깨어있는 밤_장지에 수간채색_176×200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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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728_수요일_06:00pm

갤러리 창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Tel. 02_736_2500

벽을 마주 하고 앉아 책을 보는 동안, 혹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동안, 등뒤에 있는 형광등, 문, 선반, 방석, 벽, 창살은 과연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까. 눈이 앞과 뒤를 동시에 볼 수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낼 재간이 없다. 어쩌면 내가 몸을 담고 있는 공간이란, 평소에는 그야말로 흘러 다니는 것이었다가 내 머리 속에서 그려내는 그림대로 어느 순간 정지해주는 건 아닐까. 어떤 상황을 떠올렸을 때, 어느 순간 머리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이미지처럼 떠돌아다니던 것들이 순간의 정지 상태를 잠깐 유지하는 것. 삶은 어쩌면 그렇게 우리가 미처 경험하지도, 증명하지도 못하는 불연속과 파편으로 가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동환_아무렇지 않게_장지에 수간채색_40×40cm×2_2004
이동환_쓰러져라_장지에 수간채색_189×130cm_2004

하지만 그 모든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간혹 뭔가 확연해지는 순간은 있다. 훗날 첫사랑이 되어 줄 이와 처음 마주했던 때의 감동 같은 것 말이다. 옳고 그름, 혹은 좋고 나쁨의 구분을 떠나 그저 단호하고도 명확하다 인정해버리고 마는 상황, 그런 게 오는 날이 있다. 더러 착각이기도 하고, 또 마침내는 그것이 아니었다고 부정하게 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누가 뭐래도 그러했다고, 그러므로 이미 흩어졌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명쾌한 그 무엇이었던 때가 있다. ● 일란성 쌍생아와 같은 이 두 가지 상황을 두고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과연 그것이 선택의 문제이기는 한 것일까. 별다른 고민 없이도 시간은 흐르고,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내 의지대로 고정되어 있을 뿐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이 멈추어 있지 않건, 흩어져 있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문제는 완고하게 그것이라 믿었던 것이 어느 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때가 가끔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주변의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심지어 나 자신도 의심스러운 상황, 그래서 무작정 자리를 박차 떠나고 싶기도 하고,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순간들 말이다.

이동환_돌아서라_장지에 수간채색_189×130cm_2004
이동환_달아나라_장지에 수간채색_189×130cm_2004

이동환의 그림은 일단 그 선택을 유보했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이라고 단호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림 속에는 마치 그 흘러 다니는 모든 것이 흘러 다니는 채로 잠시 머문 것 같은 흔적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무렇지 않은...'이라는 제목의 전시에 등장하는 여러 점의 작품 속에 나타난 공간은 자세히 보면 같은 공간이다. 텅 비어 있는 공간으로 내려가는 계단, 그 옆으로 나 있는 작은 문을 하나씩 연결하면, 바닥과 벽의 색감과 질감은 각각 다르지만 분명히 하나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 아무 것도 없으며, 또 그 어떤 사건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공간 속에 다만 형체도 성별도 모호한, 그래서 딱히 사람이라고 말하기엔 좀 애꿎은 감이 있는 그런 형태가 다녀간 흔적만이 남아 있다. 그 공간 속에서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과연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고, 그림은 마치 그 모순 속으로 아주 깊숙이 우리를 끌고 가는 것 같다. 그가 장지를 화면으로 선택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겹겹의 얇은 나뭇결이 만들어낸 장지 위로 물감이 스며들고, 스며든 그 색이 다시 표면으로 우러나오는 얼마간의 시간동안 시간과 공간은 다시 한 번 그 얼굴을 바꾸는 것이다.

이동환_겁먹은 개_장지에 수간채색_103×73cm×3_2004

그러나 확고한 것 하나 없이 그의 그림은 어느새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스르륵 지나가는 화면 속의 형태는 곧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듯하지만 실은 동일한 그림 안의 공간이 보는 각도에 따라, 또 그 장면과 조우하는 순간에 따라 완전히 새롭게 보인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어느새 보는 사람의 머리 속엔 구름처럼 뭉게뭉게 여러 상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말해줄 수 없지만, 그래서 보는 사람마다 아마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테지만, 이쯤 되면 이동환이 그린 그림이 왜 '아무렇지 않은' 것일 수밖에 없는지, 그가 그리고 싶어 했던 것이 왜 '아무렇지 않은' 것인지는 충분히 이해가 될 법하다. 그동안의 작품 속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지나 조금씩 후미지고 구석진 속으로 시선을 돌렸던 그가 몇 해만에 다시 던지고 있는 그 화두가, 그 무덤덤함이 살고 싶다는 의지를 부른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그 화면이 오히려 마음을 뜨겁게 만든다. ■ 황록주

Vol.20040728a | 이동환 채색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