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네트_MARIONETTE

방명주 사진展   2004_0907 ▶ 2004_0915

방명주_판테온 Pantheon_디지털 프린트_각 45×15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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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907_화요일_05:00pm

금산갤러리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Tel. 02_735_6317

『마리오네트_MARIONETTE』展은 '조작_操作'과 '적응_適應'에 관한 이야기이다. ● 살면서 스스로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특정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다양한 삶의 형태들이 만들어진다. 결코 우연처럼 보이지 않지만 실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들, 필연이라기에는 너무 어처구니없이 허망한 일들 사이에서 의심과 반성이 아닌 안주하게 되는 일상을 조심스럽게 읽어내려 하였다. ● 그리고 나의 일상을 조작해내는 거대한 힘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조작은 동일한 규칙을 서로가 공유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개별과 개별을 매개하여 공유된 힘은 조작 당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다소 강압 또는 폭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조작하는 이의 눈에는 질서 있고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 때로는 조작 당하는 것에 익숙해져 조작 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마리오네트'가 더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적응이다. ● 『트릭_TRICK』展에 이은 나의 두 번째 개인전인 『마리오네트_MARIONETTE』展은 크게 4부류로 나누어진다. ● 우선 가장 강력하게 위치되는 것이 「판테온_Pantheon」연작이다. 「판테온_Pantheon」에서는 과학, 환경, 정치, 종교, 자본, 소비 등의 거대한 담론이 들어와 있다. 물론 렌즈에 잡힌 피사체는 일상에 널브러진 것들이다. 하지만 그 형태들을 빌어 다소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오늘날의 신전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 속에는 시커멓게 죽어버린 담론과 야만의 냄새마저 느껴지는 너무나 아름다운 질서가 존재한다. 「판테온_Pantheon」은 '마리오네트'를 조작하는 가장 강력한 힘을 생산해내는 장소이다. ● 두 번째로 콘돔으로 작업한 「큐폴라_cupola」가 있다. 안전한 보호막인 것 같으면서도 그 막에 의해 숨겨질 수 있는 희생과 아픔에 관한 생각이다. 여성과 남성을 가르며 존재하는 끈적거리는 막은 부풀려지면서 안과 밖, 여성과 남성의 위치를 치환시키고 있다. 즉자적이지만 성역할_性役割 '마리오네트'를 보여주고 싶었다. ● 세 번째로 『마리오네트_MARIONETTE』展에서 「세이렌_Seiren」은 커다란 소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홀리기 또는 경고하기 위한 장치로서 「세이렌_Seiren」은 여러 관념들에 의해 이미 구획 지워져 쉽게 넘나들 수 없는 영역들의 극한을 경고한다. 그러나 몸이 없는 빈 소라껍질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공허한 바다소리만 담고 있을 뿐이다. 그 또한 또 하나의 '마리오네트'인 까닭이다. ● 마지막으로 「판타스마_phantasma」연작은 가장 일상적인 소재들로 꾸며졌다. 아마도 이는 여성으로서 지니게 된 딸, 아내, 며느리 등의 무시하지 못할 역할들 속에서 그나마 손에 잡히는 소재들을 가지고 소박하게나마 작업해야겠다는 욕심 많은 게으른 삶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물이라도 그 사물이 품고 있는 것을 새삼 다르게 보이게 하는 힘은 '마리오네트'의 끈을 끊어버리고 싶어하는 사고에서 나올 것이다. 이것이 '판타스마'의 힘이다. ■ 방명주

방명주_판테온을 위한...for Pantheon_디지털 프린트_각 15.5×20.5cm_2004
방명주_판테온을 위한...for Pantheon_디지털 프린트_각 15.5×20.5cm_2004

방명주의 두려움 ● 방명주는 사진을 찍으면서도 무척이나 복잡한 지식과 상징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지식과 상징이 작가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라 작가의 등에 들러붙어 짓누르는 마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가 지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런 사실은 그녀가 자신의 사진을 설명하는 많은 말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방명주는 외관상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이는 사람인데 자신의 사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망령에 시달린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래서 글로나마 그녀를 자유롭게 할 요량으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방명주_'큐폴라 cupola' 연작_디지털 프린트_21×29.7cm×40_2003
방명주_'큐폴라 cupola' 연작_디지털 프린트_21×29.7cm×40_2003

요즘 하도 담론과잉의 시대이다 보니 사진에 콘돔이 나오면 의례 페미니즘! 성정체성! 하는 반응이 자동으로 따라 나오게 마련이다. 물론 그런 식으로 사진을 해석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유행이기는 하나,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것이 예술에다 클리셰(cliche: 뻔한 문구. 전에 어느 학생이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란 말을 썼다가 나한테 작살나게 혼난 적 있다. 클리셰는 예술의 적이다)를 덧씌워서 진부하고 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인데, 방명주의 사진에마저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일단 콘돔 사진은 괄호를 치고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탐폰을 물에 넣어 찍은 사진도 있는데 이것도 지식과잉으로 보이므로 패스. 평가할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책을 읽을 때 특정 문구에 집착하여 전체를 못 보면 책 산 사람만 손해이므로 일단 끝까지 읽어보자는 것이다.

방명주_'판타스마 phantasma' 연작_디지털 프린트_각 76×56cm_2004
방명주_'판타스마 phantasma' 연작_디지털 프린트_각 76×56cm_2004

그 다음은 콩깍지에다 알약을 넣어서 찍은 것이 있는데 이것도 상당히 페미니즘적으로 보인다. 그 다음은 미역인데, 이것도 여성이 주로 다루는 것이므로 페미니즘적? 그러고 보니 이런 식의 카테고리화는 몇 년전 있었던 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展에서 나왔던 전시 기획적 수사를 떠올린다. 그때 상당히 많은 작품이 섬유를 재료로 사용한 것이 많았는데 섬유란 것이 부드럽고, 또 여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섬유를 많이 만지니까 여성적 물질이라 하여 페미니즘 미술의 주재료가 섬유인 것처럼 보인 적이 있다. 그러나 냉정히 보면 이것은 섬유라는 특정 오브제에 대한 페티쉬즘적 집착이라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으므로 경계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즉, 이러이러한 재료를 쓰면 무슨무슨주의, 하는 식의 편협한 사고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명주의 사진에 나오는 재료들의 특성에 대해서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유보하자는 것이다.

방명주_'판타스마 phantasma' 연작_디지털 프린트_각 76×56cm_2004
방명주_'판타스마 phantasma' 연작_디지털 프린트_각 76×56cm_2004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은 빛이다. 콘돔이건 콩깍지건 탐폰이건 다 동일한 빛에서 촬영되었는데, 마치 알레고리처럼 작품의 표면을 뚫고서 뭔가 말을 할 듯이 입을 벙긋거리는 것은 이 빛이다. 왜냐면 빛은 그냥 사진의 빛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브제의 저 쪽에서 이 쪽으로, 역광으로 주어져 있으며, 어떤 오브제이던지 뽀시시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으나 그 뽀시시가 웨딩 사진의 뽀시시와는 당연히 다른 것이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수사를 덧붙이려 하는 것을 보면 방명주는 자신의 사진을 뚫고 겉으로 나오려는 빛을 못 보고 있거나, 아니면 보고도 못 본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빛은 저주이자 축복이기 때문이다. 예부터 빛은 진리와 계시의 상징이었지만 (en'light'enment(계몽)라는 단어 속의 빛의 위치를 보라) 세균과 범죄자와 악마에게 빛은 저주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방명주의 사진 속의 빛에 대해서 그렇게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넌센스이다.

방명주_'판타스마 phantasma' 연작_디지털 프린트_각 76×56cm_2004
방명주_'판타스마 phantasma' 연작_디지털 프린트_각 76×56cm_2004

그러나 방명주는 표면으로 드러나는 주제와 소재와 지식과 센스 너머로, 사실은 빛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보아서는 안 될 남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다가 들킨 사람처럼, 방명주는 빛을 보다가 들켰는지도 모른다. 콩깍지를 뚫고 나오는 것도 설명이나 이론이나 상징이 아닌 빛이며, 미역줄기를 뚫고 나오는 것도 여성성의 담론이 아니라 빛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단편들의 집합체들을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이어 놓은 것 같던 그녀의 이전의 시리즈들(2003년에 했던 트릭이라는 시리즈)과는 달리, 마리오네트라는 제목이 붙은 금년의 시리즈는 빛으로 인해 통일성을 부여받고 있다는 점이다. 놀랍다고 해 놓고 나니까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기는 하지만, 빛의 존재가 방명주에게 뭔가 사진을 묶어주는 구심점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방명주가 사용하는 빛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일반적으로 스튜디오에서 제품 촬영할 때 쓰는 빛이고, 사물을 뽀시시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특성 때문에 사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을 빛이다.

방명주_세이렌 Seiren_디지털 프린트_76×56cm_2003

당연한 얘기지만, 방명주의 사진에서 빛은 사물을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 그 다름의 위치와 밀도에 대해서 속 시원히 얘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방명주의 사진은 항상 수수께끼 같이 설명하려는 의지를 벗어나고 만다. 다만, 빛에 의해 포획된 사물의 윤곽들만이 화면에 나타날 뿐이다. 정물사진이라는 범주가 있긴 하지만, 방명주의 사진을 그 범주에 넣고 싶지 않은 이유는 한국에서 하는 정물사진이라는 것이 따분하고 지루하기가 참혹한 지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명주의 사진은 차라리 사물사진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사물을 잘 보여주기 위해 빛을 적절히 이용한 사진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사물을 빛 속에 놓아두어 우리로 하여금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드는 사진. 그 위에 어떤 상징적 의미가 있건, 암시적 지향성이 있건 간에 여기서는 일단 괄호를 쳐두기로 하자. 사물을 뭐라고 해석하기 이전에,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본 적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그냥 빛 속에 드러나 있는 사물들의 궤적을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하고 난처하지 아니한가 말이다. 지는 저녁놀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 빠져 셔터를 누르는 아마추어 사진가의 행복에 대해 굳이 이유를 달거나 합리화를 할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빛과 사물이 만났다는 그것만으로 우리는 행복한 사진 찍기를 실천하는 방명주의 참모습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 이영준

Vol.20040907c | 방명주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