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부분들이 표류하는 장소, 숲-그림

김보중 회화展   2004_0908 ▶ 2004_0924

김보중_밤풍경(夜景)과 창문틀_입체물, 평면과 입체의 혼합설치물_210×14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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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908_수요일_06:00pm

덕원갤러리_Dukwon Cube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5층 Tel. 02_723_7771

숲-그림으로 연이어 개인전을 가져 온 김보중이 다시 개인전을 마련하였다. 반복되는 숲-그림은 마치 할아버지-아버지-아들-손자의 계보와도 같아 보인다. 한 편으로는 아들의 모습에서 할아버지의 눈매와 아버지의 성격을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다른 한 편으로 아들은 할아버지가 아니고, 아버지가 아니며, 아들인 것을 인정하는 일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이다. 미끄러지며 드러나는 차이를 따라가다 보면 김보중은 더 이상 김보중만이 아니다. 이전 전시에서 상징적 표현에 밀려나 은폐되어 나타나던 김보중적 욕망, 김보중적 결핍은 이번 전시를 통해 표면으로 부상하여 타자들의 개입을 허용하고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 김보중의 이전 작업에서는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않음, 즉 기표로 자신을 드러낼 때 경험하는 분열이 화면 내의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어서, 조화나 안정과는 거리가 먼 강렬한 충돌과 거친 요동을 예감케 하였다. 이에 비해 이번 전시작업에서는 현실에서 항상 은폐되어 나타나는, 그리하여 결여로 느껴지는 어떤 근원성(이것을 자아라 할까?)에 대한 집착은 옅어지거나 사라져 이전 작업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뚜렷한 변화로 느껴진다. 변화는 어떠한 모습으로, 무엇 때문에 일어난 것일까?

김보중_밤풍경(夜景)과 의자_입체물, 평면과 입체의 혼합설치물_280×210cm_2004

김보중의 그림에는 늘 뚜렷한 차이가 출현한다. 심장/숲, 天山가는 길의 풍경/뇌, 손/숲, 사진으로 찍힌 숲의 그림자/붓으로 그린 숲... 한쪽이 원본이면 다른 쪽은 복사본, 한쪽이 자신의 바깥이면 다른 쪽은 자신의 안. 이 각각이 다른 것인가? 그런 것이기보다 양자의 차이는 양자 '사이'에 존재한다. 이런 차이의 출현은 작가의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만약 동일한 두 나무를 작가가 그렸다고 해도 반드시 어디에선가 차이가 나지 않는가). 이 차이라는 존재가 양자를 분화시키고 현실화한다. 작가 김보중이 세심히 들여다 본 현실에는 차이를 출현시키는 것이 결코 동일한 하나의 무엇일 수 없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숱한 차이나 다름은 다만 양자 사이에 있으므로, 양자의 각각은 어느 한 편에 의해 부정이나 결여로 기울어지지 않는다. 이 긍정적인 차이를 작가는 공간이 겹쳐지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김보중의 그림들은 현실을 신랄하게 질책하지도 않고, 함께 가야 할 길을 보여주지도 않으나 우리로 하여금 '이다' 또는 '아니다'의 선택이 아니라, '이다/아니다(其然不然)'의 동시적 공존의 현실을 깨닫게 한다. 물론 공존하는 현실은 단단하고 고정되어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흘낏 또는 순간적으로 내비춰질 뿐이다. ● 김보중의 그림을 통해 구체화되는 가능성은 서로 연결끈이 없는 개체의 독립성과 분리성에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 입장에서 개체를 고립시켜 볼 수 없는 하나의 체계에 대한 가정과 이어져 있다. 김보중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 상태들의 발견보다 개체들 사이의 상관성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리라. 한 개체가 다른 개체에 걸쳐 있고, 전체의 내적 관계망을 구성하는 격자점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개체는 관계의 끈으로 통일될 수 있다는 생각인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 만나는 현실은 시간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공간적으로 여기와 저기를, 기우뚱거리며 출렁대며 음영 지닌 밝기로 아우른다. 밝기만 한 것은 부박하고, 그늘을 통해서야 그가 그린 현실이 우리의 현실로 스며드는 것은 왜 일까? 이 스며듦에 기대어서야 작품에 대한 최종적 해석 대신 끝없는 해석의 놀이도 가능해진다.

김보중_숲-聖者_변형평면에 사진, 유채_122×92cm_2003
김보중_안면도에서_캔버스에 사진, 유채_134×113cm_2003

이번 전시에서 김보중은 충실하게 붓과 물감을 사용하던 그의 회화공간 안에 사진을 삽입시켰다. 시각적 아이스테시스를 벗어난 촉각적인 붓질과 물감의 생생한 흔적은 사진을 오려붙인 매우 임의적인 단일 형상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붓으로 그려진 숲덤불과 숲길과 나무들은 대지로 내려가 스며들고, 사진인화지(모두 흔들리는 숲그림자를 찍은 것이다)를 붙인 얼굴과 뇌와 심장들은 기화되어 세계로 흩어진다. 작가는 재현적인 요소를 도입하면서도 사실 붓으로 그림이나 사진을 붙인 그림이나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불특정한 공간으로서의 숲, 불명확한 실체로서의 존재는 실재에 의존하거나 실재를 상정하지 않는다. 물론 실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주체에 귀속시킬 필요도 없다. 따라서 숲은 그 어떤 숲, 그 어떤 숲의 체험, 그 어떤 것 일반에 열려있고, 복제된 숲 그림자는 원본과 관계없이 증식과 축소, 변형을 수행할 수 있으며, 김보중은 김보중같은, 김보중아닌 이들로 현전할 수 있다. 붓자국과 물감 흔적을 통한 지각적 표면이 되었던, 사진인화지의 광택을 통한 가장적인 표면이 되었던 간에 김보중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표면 밑의 바닥, 표면 위의 하늘이다. 그림의 형상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려는 역설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김보중_천산(天山)가는길의 기억_캔버스에 사진, 유채_130.3×162.2cm_2003
김보중_흔적풍경_캔버스에 오일_162.2×130.3cm_2002

작업들 중에는 화면에서 떨어져 나온 의자는 실물이지만 복제로 감겨있고, '그려진' 밤풍경이 그 앞에 걸린 「야경과 의자」처럼 전시공간을 연극화함으로써 관람자를 작품의 시간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있다. 복제된 사진으로 골조를 싼 의자는 관람자가 그 의자에 앉아 야경을 그린 그림을 바라보는 상황을 유도함으로써 작품은 잠재적 움직임을 암시하게 된다. '아직'의 시간과 '이미'의 시간이 공존하는 공간인 셈이다. 작가는 그 겹쳐진 시간여행을 연출하고, 참여를 원하는 관람자들이 연기자가 된다. 실물대 의자는 관람자의 세계와 작품의 세계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동일한 차원에서 연속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화시키지만, 실제 물건으로 보이는 의자는 만들어진 작품으로 인습적 가정들을 전복시킨다. 시각적 재현을 벗어난 김보중의 그림들처럼 설치작업 또한 동일함 속에 내재하고 있는 숱한 비동일성의 가능성을 드러내준다. ● 조형적인 덕성을 담고 있는 김보중의 회화적 공간은 재현의 함정들을 통하여 차이의 발생을 긍정적으로 포용하면서 다수의 부분들이 표류, 또는 잠시 머무는 장소로서 드러낸다. 이 공간은 한없이 넓은 세계와 끝없이 지속하는 시간의 기반을 벗어나, 잘게 쪼개진 세계와 단절적인 시간들이 이리저리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김보중에게는 이 공간이 세계와의 끈이다. 이 끈을 놓지 않고 신뢰하면서 보고 듣고를 반복하는 그에게서 고집스럽고 폐쇄적인 작가의 창조적 역할 대신 복합적인의 작용과 다양한 기능을 수용하는 열린 모습을 만나게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 임정희

Vol.20040909a | 김보중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