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OTROPISM_同質異形

이계원 회화展   2004_0915 ▶ 2004_0926

이계원_Allotropism_캔버스, 나무에 아크릴 채색_200×265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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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915_수요일_05:00pm

선 아트센터ㆍ선화랑 서울 종로구 인사동 184번지 Tel. 02_734_5839

'절대적 차이'에서 '상대적 차이'로 ● 이계원의 작품을 처음 보는 사람은 마치 통과 의례처럼 약간의 망설임을 갖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작업이 미술사적 족보상 가장 난해한 부류의 것, 즉 미니멀리즘과 같은 사변적 작품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작가 입장에서 자신의 작업이 미니멀리즘이라는 범주로 휩쓸리는 것에 약간의 저항감을 가지고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가시적으로 주어진 작품의 형식에 근거한 관객의 판단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동질이형'(allotropism)이라는 명제 또한 관객의 입장에서는 잠시나마 오성적 긴장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렇게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는 부류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우리 환경에서 유독 이렇게 명료한 환원적 성향의 작품들만을 선호하는 매니아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미술사적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소통적 측면에서 접근할 때 작품의 의도와는 달리 약간의 낯가림 같은 것을 갖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 그런데 일단 그러한 망설임의 문턱을 넘어서면 그 다음부터는 적지 않은 보는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단순해 보이는 구조 속에서 작품을 응시하는 가운데 이모저모의 유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더러는 착시 효과에 의해, 더러는 단순히 일루전에 의해 여러 가지 조합의 경우들을 볼 수 있다. 물론 우연적이고 또한 사소해 보이는 재미라는 것은 애당초 작가가 목적한 것이 아니거나 혹은 부수적인 양념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입장에서 오랫동안 추구해 온 명제와 논리의 전개 과정 및 결과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터에 그것이 기껏 말초적인 흥미 정도에서 그친다면 실망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미학적 근간이라는 숲을 간과하고 기껏 지엽적인 혹은 기술적인 국면에만 관객의 수용이 머무는 것은 애당초 설정되어 있지 않다. ● 게다가 '재미'라는 것도 필자의 사견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오늘날 인류의 넋을 빼앗을 만큼 박진감 넘치는 게임의 콘텐츠들이 널려 있는데, 재미라고 한다면 그에 필적할 수준의 것을 지시하기 쉽다. 그래서 재미라는 말을 쓰는 것도 조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종래의 환원적 조형에서 느낄 수 있었던 무미건조한 폐쇄적 국면들과는 적어도 차이가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 예로 평면의 캔버스에서 돌출한 기하적인 요소들의 경우 물리적인 변화가 캔버스에 일어난 것 같은 착시를 주곤 한다. 물론 그 착시현상을 액면 그대로 지각할 사람은 흔치 않겠지만, 주도면밀한 구성과 완벽에 가까운 형태의 가공, 채색 등은 그것 자체로도 적지 않은 가치를 보장한다. 그야말로 양념치고는 경이로운 것이다. 마치 매직 큐빅을 보는 것 같은 작품의 구조는 한동안의 응시와 지각이 끝나면 그 다음은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를 띠면서 작가의 전략에 서서히 빨려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계원_Allotropism_캔버스, 나무에 아크릴 채색_72.7×171cm_2004
이계원_Allotropism_캔버스, 나무에 아크릴 채색_161×400cm_2004
이계원_Allotropism_캔버스, 나무에 아크릴 채색_180×110cm_2004

그 흥미로운 지각의 과정들이 끝나고 나서 관객에게 환기되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자신의 미학적 기획으로 동질이형(同質異形) 즉 '다름 이면의 같음'이라는 세계관을 탑재하고 있다. 근작의 기하적인 화면과 요소들은 초기작들이 상이한 요소들을 한 화면 안에 강제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소위 패스티쉬라는 전환기적 양식을 통해 시대정신의 상황을 묘사하고, 또한 새로운 통합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었던 터이다. 작가가 개인적인 감정의 서술보다는 커뮤니티를 향한 보다 큰 명제들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개진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물론 그 점이 지금까지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작가의 미의식 저변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핵심인 것은 분명하다. ● 지금의 작업은 이렇듯 격렬한 감정의 분출을 펼친 작업에서 180도 전향을 한 것이다. 97년 渡美하여 다인종 사회에서 받은 인상은 작가에게 보다 정리된 사회학적 시야를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다름'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바뀌어 갔다. 자크 데리다가 difference에서의 e를 a로 바꾸어 차연(差延)으로 소통하고, 그를 통해 다름이라는 개념의 상대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작가는 초기의 '절대적 차이'에서 '상대적 차이'라는 구분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수많은 언어와 방언들의 카오스를 극복할 필요까지 자각하면서 가장 명료한 기호적 환원을 절실하게 모색하게 된다. 잡음이 배제된 직접적인 소통, 즉 디지털화된 소통의 체계를 도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작가의 '동질이형'이라는 야심적인 미학적 기획이 탄생하게 되었다. ● 이 큐브들의 조합을 통해 작가는 인류와 세계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언어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해도 통역과 해석이 필요하고, 또한 그러한 번안을 거쳤다 한들 그 의도와 원전이 온전히 전해진다는 보장이 없다. 이러한 인류라는 커뮤니티를 일찍부터 체험한 작가의 입장에서는 저명한 수학철학자 러셀이 했던 것처럼 모든 명제를 수학적 기호로 환원하고자 했던 것처럼, 작가도 명료한 환원을 고심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작품구조의 명료성은 격자(grid) 구조를 선택하게 된다. 굿맨(P. Goodman)이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드는 정지, 침묵, 비서술 등의 특징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군더더기 설명이나 통역, 해석이 필요 없는 단순 명료한 논증적 텍스트야말로 미술임을 작가는 확신하고 있는 터이다. 이를 통해 가까운 이웃, 나아가 사회와 역사, 초월자 등에까지 대화의 창을 열고자 하는 것이다.

이계원_Allotropism_캔버스, 나무에 아크릴 채색_44.5×83.5cm_2004
이계원_Allotropism_캔버스, 나무에 아크릴 채색_48.5×102.5cm_2004
이계원_Allotropism_캔버스, 나무에 아크릴 채색_40×53cm_2004

이러한 작가의 미학적 기획은 본의 아니게 백남준의 '다다익선'과도 유사한 맥락을 지닌다. 작가의 작품은 두 개 이상의 단위체가 연결된다. 서로 상반된 도형, 색, 위치이지만 궁극적으로 동질의 것임을 시사하는 컨텍스트는 단위체들의 양적인 증가를 촉진하게 된다. 물론 양적인 증가라는 것이 동어반복에 집착하는 미니멀 작가들의 반복적 텍스트와는 분명히 다르다. 저들의 것이 같음을 위해 있는 것이라면 작가의 것은 다름을 지시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다름의 유형들이 많을수록, 다름의 요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메시지의 강도는 시너지를 얻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많은 유닛들이 결합되는 것이 미덕이며, 가변성이라는 조건을 아주 자연스럽게 용인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백남준의 다다익선은 매체시대의 패러다임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작가 초기 작품의 화면에서 보는 것 같은 카오스를 연상케 한다. 오히려 작가의 근작은 아날로그 브라운관에서 신경을 거슬리는 일체의 소음과 이상신호들을 제거한 형식으로 각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러한 디지털적 소통을 위해 작가는 중세적 장인으로 회귀하고 있다. 그는 작업에 앞서 철저한 설계자가 된다. 건축물을 설계하는 저 중세 화가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용의주도하게 기획된 구상들은 도시계획과도 맞먹는 다양한 조건들을 정리해나감으로써 가능하다. 수학적으로 오차가 없는 분할을 이루어야 하며, 아울러 그리기가 아닌 만들기에까지 작가의 용의주도함은 가히 장인적이라 할 수 있다. 더러는 나무나 캔버스의 물성들이 살아 있었으면 하는 사사로운 욕구까지도 억제해가며 균질의 평면성을 밀어붙인다. 혹시라도 그 물성들에 내재할 일루전의 요소들마저도 잡음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우려해서일까… 이러한 과정을 거친 그의 작업은 정교하고 엄밀하기가 신고전주의 예술가들의 것과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일군 작품은 수공적인 혹은 기술적인 차원을 넘어 보다 큰 지평에서의 메시지로 독해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계원_Allotropism_캔버스, 나무에 아크릴 채색_126×162cm_2004
이계원_Allotropism_캔버스, 나무에 아크릴 채색_59.7×76.2cm_2004

이렇듯 절제되고 치밀하기 그지없는 작가의 작업은 단순함과 명료함으로 작가의 품을 떠나서 독자에게 전달될 때 과연 어떻게 독해되어야 할까. 아니 어떻게 독해될 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최소한의 형식들이 전하는 언급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작가는 더 이상 독자 혹은 관객의 자율성 밖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가의 기대대로 그것이 사회학적 발언으로까지 해석될 수 있을 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점에 대해서까지 작가가 주도면밀한 해석의 독재를 강권하고 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작품의 전체를 보다 많은 자율적 공간으로 방임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명료한 구조만큼이나 작가의 공간은 금욕의 관조가 숨쉬고 있다. 관객은 자유롭게 개입하여 자기의 경험과 감수력, 상상력을 투영시켜 자기만의 화두를 자가 발전할 여지를 준다. ● 작가가 일찍부터 자각하고 있었던 내용이지만, 사실 창조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작가가 어떤 외부의 모델을 자기 방식으로 소화하고 작가 자신과 일체가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가만의 것이 주어지는 것이다. 작가가 '다름'이라는 화두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는 결국 작품의 전모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지금도 그 화두 속에서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자신의 작업에 몰입해 있을 것이다. 그 몰입과 내공의 경지가 아니면 이토록 강렬한 에너지의 작업을 성취할 수 없는 일이다. 작가의 同質異形 기획과 그 밖의 버전들이야말로 몰입과 내공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보통 작품에서 오는 감동은 그 작품이 전하는 내용보다 그 작품이 가지는 특유의 기운이다. 침묵 속에 하나의 기운으로 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전통적 미의식에서 볼 때 상당한 경지이다. 가장 서구적인 양식의 작품 속에서 뜻하지 않은 동양적 가치관을 발견했다 한다면 필자만의 과찬일까. 또한 작가의 작품 앞에서 경건치 못하게도 어떤 재미를 느꼈다면 그것도 필자의 경박함 때문일까... ■ 이재언

Vol.20040915c | 이계원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