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과 살다

백연수 조각展   2004_0914 ▶ 2004_0925

백연수_동물과 살다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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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914_화요일_06:00pm

유아트스페이스 서울 강남구 청담동 101-6번지 Tel. 02_544_8585

백연수, 동물과 살다. 그 이미지를 숨쉬다 ● 식물: 대부분 땅속에 몸의 일부를 붙박아서 이동하지 않으며, 뿌리·줄기·잎을 갖추어 수분을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면서 광합성(光合成) 등으로 영양을 섭취하는 생물체를 통틀어 이르는 말⇔동물. ● 백연수의 작업실에는 통나무의 덩이들이 자유로이 뒹굴고 있다. 혹은 그 조각들이 자유로이 어질러 있다. 거친 나무, 굵은 나무, 엉뚱한 냄새를 피우는 나무, 반들반들 다듬어진 나무, 동글하게 반짝이는 나무, 붉은빛이 향기 나는 나무... 이들은 이미 베어졌으므로 죽음의 조각들이다. 불가항력적인 단절감.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죽음이 지니는 생생한 생명감이기도 하다. 죽음의 흔적의 생생한 현존. 존재의 소멸은 곧 죽음의 발현이다.(곧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상태의 마침내 '시작'이다) 통나무의 죽음은 우리에게 어떤 시작을 알리는가. 어떤 변화를 예고하는가.

백연수_동물과 살다_2004
백연수_동물과 살다_2004

식물이란 붙박아서 이동하지 않으며 대신 빛으로 합성한 영양분을 스스로 섭취하는 존재이다. 신기하게도! 빛을 가지고 놀며 사는 존재. 식물에 대한 아주 짧은 단상을 통해 우리는 통나무를 보는 법을 배운다. 죽은 나무의 삶과 그 흔적을 재생하는 기쁨을 발견한다. 이제, 백연수의 나무로 만든 조각들, 동물의 이미지의 세계로 넘어갈 준비가 된 것 같다. ● 동물 특성의 하나는 환경에서 자극을 느끼고, 반응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자극에 대해 일정한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을 주성(走性)이라 한다. ● 동물이란 의미 그대로 움직이는 생물체이다. 동물이 느끼고 반응하며 행동하는 방식을 사람들은 대체로 관찰하는 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우리가 동물을 단지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같이' 느끼고 반응하며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서 생각한다면(혹은 생각하기를 원한다면),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무척이나 복잡해져 버린다. 애무와 유혹의 계속적인 반복과 미끄러짐. 백연수의 작품들은 그러한 인간의 꿈과 노력의 재현이다.

백연수_동물과 살다_2004
백연수_동물과 살다_2004

백연수의 작품은 통나무로 만든 동물이미지의 군집을 주로 다룬다. 어떻게 백연수의 나무로 만든 物을 우리가 동물의 이미지로서 느끼는 것이 가능한가? 그 物들은, 동물 고유의 느낌을 노출할 수 있는 눈, 코, 입을 가지지도 않았고, 반응을 표시할 수 있는 신경줄 비슷한 것이라고는 없으며 오로지 서-있-다. 가죽과 털과 같이 동물 고유의 단백질 표층도 지니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식물로도 동물로도 볼 수 없다. 그냥 物이라고 부르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 物은 식물과 동물의 중첩지점을 비로소 살아가는 모호한 생물체이다. ● 보다 심오하게도, 백연수의 物은 나무의 존재의 끝이자 죽음 발현의 시작이었던 통나무 덩이가 깎이고 파여져 이루어진 것이다. 혹은 삼의 껍질로 만든 줄로 뒤엉켜, 뒤덮여 있다. 죽음의 흔적과 재생의 힘의 긴장 속에서 얻어진 생명체이다. 백연수의 物은 식물의 죽음의 흔적을 극복하여 재생의 운동감으로 환희 한다.

백연수_동물과 살다_2004
백연수_동물과 살다_2004

왜 이 物들은 이토록 다채로운가. 마치 외부를 향한 주성을 스스로 달래려는 듯 이 物들은 스스로를 알록달록한 색으로 덮은 듯하다. 죽음의 기억과 삶의 육동, 정지된 침묵과 오감의 활달함, 이렇듯 혼성적이고 다면적인 요소들을 싸안으려는 듯이, 이 물들의 등과 어깨는 예쁘고 밝은, 그렇기 때문에 슬픈 연정을 느끼게 하는, 염료들로 덮어져 있다? ●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을 3무리로 나누어 가장 하등한 식물은 영양작용과 번식작용을 가지고, 이보다 고등한 동물은 이것에 더하여 감각작용과 욕구작용을 가지며, 더 나아가서 인간은 동물의 작용 외에 이성을 가진다고 하였다.

백연수_동물과 살다_2004

백연수의 物들은 다소 어긋난 몸과 몸의 이음새를 지녔다. 순진하게 쌓아올린 듯한 육신의 모습은 다정다감하지만 동시에 씩씩해 보인다. 우리의 물리적, 정신적 짐을 함께 살아주는 존재로서 아름답다 - 손에 들었던 짐을 무심코 놓을 수 있고, 심심하면 끌고 함께 다닐 수 있으며, 문득 떠오른 생각을 되씹기 위해 우리 몸을 실어 앉을 수 있는 대상이요, 공간이다. ● 그들 위에서, 주위에서, 안에서, 우리가 오래 전에 잊고 있었던 원형적인 생의 기억을, 그 육체를 애무함으로써, 다시금 느낀다. 백연수의 物들에서 가슴깊이 안온함과 발랄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이 지구별에서 되풀이되어 온 종족발생의 역사를 내 기억의 흐름으로 주관화하여 되살아내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원형적인 동물의 이미지를 다시 직면함으로써, 나는 나의 종의 기원에 위치할 수 있다. 식물의 자기 발생적인 잠재력과 동물의 외부 지향적인 욕망의 혼합적인 분출, 그것의 혼융에 다름 아니다 - 나란 존재는. ■ 김예란

Vol.20040917a | 백연수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