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

윤종구 개인展   2004_0915 ▶ 2004_0925

윤종구_도시풍경_사진에 오브제_80×11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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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915_수요일_05:00pm

덕원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3층 Tel. 02_723_7771

나는 갤러리가 물질의 실체로 가득한 장소며 동양사상의 기저에 볼 때 끊임없이 활동운화(活動運化)하는 기 혹은 음양 개념의 실존공간이라는 데에 주목한다. 미시세계에서의 이 실체의 활동성은 일찍이 조선 중기 사상가 화담 서경덕(1489~1546)의 原理氣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만물이 모두 기로 이루어져 있고 텅빈 것처럼 보이는 공간도 빈틈없이 기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기는 속성상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쥐어도 잡히지 않고 붙들려고 해도 붙들 수 없지만 온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일상적인 부채질과 바람의 단순한 관계 속에서 이 '기' 개념의 실존성을 설명하고 있다. 본 설치 작품에서 프로젝터 앞에 단순하게 매달려진 작은 반사판(모빌)의 움직임 역시 이러한 미시세계의 궁극적 실체의 활동성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전시장 내부에 감지되지 않는 미세한 공기의 역동성, 예를 들어 프로젝터에서 발생하는 열기나 관람자의 움직임과 더불어 발생하는 극미한 세기의 공기흐름은 모빌을 빠르거나 느린 속도로 회전시킨다. 이 모빌은 Calder에 앞서 1919년경에 제작된 Man Ray의 "Shade" 만큼이나 극히 단순한 원리를 반영하고 원초적이다. Man Ray는 나선형으로 잘려진 종이 조각을 천정에 매닮으로서 모빌이 돌 때 예측되지 않은 방향으로 모빌이 팽창되거나 수축되어지는 움직임의 반복을 통해서 미세하고 불규칙적인 에너지의 활동성을 실험하였다. 이 설치 작품에서 프로젝터를 통해 투사된 신체이미지는 모빌에 반사되어 끊임없이 벽면이나 바닥을 순환하며 유영한다. 이 세계(빈방)에서 관찰 주체로서 관람자의 주관은 해체되고 천정, 벽, 바닥이라는 일상의 구분은 없다. 몸(물질)과 정신의 이분법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빈방'은 빈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운동하는 에너지들로 가득한 장소인 것이다. ● 카메라 렌즈의 구조와 조작과정을 통해 나는 사물을 확대하거나 축소해서 바라보고 사물의 모호한 경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때 사물은 우리의 정상적인 시각에서 경험되는 특수성, 개별성보다는 대단히 불확정적인 상태에 놓여있다. 여기에(모호함의 세계) 너와나, 나와 타자와의 관계는 허물어져 버린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이다. 나와 세계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하나이면서 둘이다. ■ 윤종구

윤종구_숲_사진에 오브제_80×110cm_2004

희미함과 풍경 ● 윤종구는 「들녘」(1992) 그림을 시작으로 풍경에 대한 관심을 그려내며,새로운 풍경으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이 시기 그는 주로 목가적인 취향에서 시골 들녘을 따듯한 갈색과 짙은 밤색조로 소박한 정서를 그려내었지만, 그가 응시하는 풍경은 단순하게 대상을 베껴내는 풍경은 아니었다. ● L. Fallay d'Este는 풍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풍경은 원래 정신의 내부 운동으로서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응시이며 관조'이다. 이렇게 풍경을 생각하는 시각은 자연을 보고 그리는 모사적인 관심으로 윤종구에게 제시하기보다는, 외부에 대한 주체로서의 반응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각은 주체와 대상간의 차이와 사이라는 관점에서 시작된다. 즉, 작품에서 보는 이로서 주체의 지나친 강조나 대상에 대한 집착이 아닌 "두 개의 중심 사이의 생각"에서 파생되는 자유이며, 이 자유를 그는 그려내고 있다.

윤종구_사물읽기_사진에 아크릴 채색_80×110cm_2004

그의 초기 작품들이 목가적 풍경과 따듯한 정이 녹아 있는 자연이었다면, 호주 체류기를 거쳐 지금은 대상에 대해 반응하는 주체의 의식이다. 그가 그리는 풍경이나 정물은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의 다양한 방법을 보여준다. 흐릿한 이미지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일종의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또한 이러한 이미지는 사진기를 통해 대상을 볼 때, 나타난 모호함이나 경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것을 쳐다보는 것과 초점 잡고 응시하는 것 사이에 나타난 차이를 제시하는 것이고, 희미하게 보는 것이 대상을 보는 또 다른 관점이란 것이며, 주체의 적극적인 대상 인식은 아니라도 대상을 수줍게 보는 한 양태이거나 아니면 오히려 대상을 더욱 주관적이거나 능동적으로 보는 다른 양태이다. 이러한 시각은 대상에 초점을 잡는 것이 아니라 대상 너머에 초점을 두거나 '주체와 대상 사이 중간의 빈 공간'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서 우리가 실제공간이나 평상시, 인식하지 못했던 주인 없는 공간, 사이의 빈 공간을 쳐다보는 것이다. 작가의 지적대로 '보통 때는 잘 안 보이는 공간'을 그려내는 것이다.

윤종구_연속성04_슬라이드 프로젝션_2004

이러한 시각들은 작품 「사물읽기-감, 토마토」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과일을 점선으로 형태를 잡아낸다. 그는 '실선은 결정적인 것이나, 점선은 내게 있어서 가변적인 것 그리고 불확증적인 것을 뜻한다'고 지적하며, 앞서 보았던 대상과 주체의 인식간의 문제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방법을 취한다. 또한 이렇게 보는 문제를 작가는 '뿌옇게 보는 풍경'에서부터 해결하려 한다. 보는 것이 사실인지, 그가 경험하는 것이 어떤 것이지 지속적으로 질문하는 마치 데카르트적인 회의처럼 그는 작품 세계를 구성해 나간다. 그의 시각의 문제는 어쩌면 심리학적인 시각과 병렬적인 관점이라고 (parapsychologic)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정신이나, 그가 상상하(거나 아니면 환각을 갖)는 시각을 투사하는 것이다. 라틴어로 '시각'을 뜻하는 '비줌'(visum) 이라는 단어는 '현시', '나타남'을 뜻하면서도 동시에 '꿈을 꾸는 것', '생각하다'를 지시하기도 한다. 작가에게서는 데카르트적인 회의가 담아내는 시각과 이와 반대되는 '정신을 투사'하는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와 작품을 실현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이 두 관심이 상존하고 있음을 찾을 수 있으며, 그의 사진 작품에서 나타난 중간의 둥근 색 점과 같이 비가시적인 것을 보려는 태도는 더욱 "대상 없는 지각"이라는 관점을 보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앙드레 말로는 세계를 베껴 쓰는 이가 예술가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와 경쟁하는 자라고 지적한다.

윤종구_연속성04_슬라이드 프로젝션_2004_still
윤종구_연속성04_슬라이드 프로젝션_2004_still

그의 작품 「연속성 04」라는 작품에서도 위와 같은 특성들이 나타난다. 이 '연속성' 작품은 전시장 중앙에 프로젝터을 설치하고, 그 앞에 이미지를 반사할 수 있는 작은 아크릴 판을 걸어 놓은 것이다. 방안에 공기의 흐름에 따라, 이 작은 투명 아크릴 판은 흔들리고 제자리 돌기를 한다. 프로젝션과 이 밖에 걸린 작은 아크릴 판을 통하여 영상은 빈공간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다. 필름의 모델이 뿌옇게 제시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초점을 잡으려고 하게 한다. 이 작품은 '흐릿함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비트겐쉬타인은 '언어에 있어서의 회화적인 이론'이라는 측면에서 언어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사물들이 그 상호간 유사성을 갖고 있는 사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점에서 비트겐쉬타인의 입장은 언어 개념에 있어서, 분명치 않은 희미한 개념을 적용한다. 그리고 언어는 언어 놀이의 다양성을 갖는 것이며, '놀이'라는 개념은 바로 희미하다는 관념의 패러다임이라고 설명한다. 바로 이 언어의 놀이처럼, 윤종구는 보는 놀이, 희미한 형상 놀이를 통해서 새로운 시각과 관념을 제시하는 것이다. ■ 강태성

Vol.20040917b | 윤종구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