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는 갈대

윤여환 수묵展   2004_1028 ▶ 2004_1103

윤여환_사유하는 갈대_화선지에 수묵_60.6×72.7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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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028_목요일_06:00pm

롯데갤러리 대전점 대전시 서구 괴정동 423-1번지 롯데백화점 8층 Tel. 042_601_2827

사유하는 갈대_Contemplative Reed ● 파스칼은 그의 유고집 팡세에서 한줄기 갈대를 통해 사유를 설명했다. 나는 염소의 사유를 갈대의 사유와 함께 조합된 이미지로 도출해 내고자 한다. 그것이 이번 전시의 화두인 사유하는 갈대이다. 그러나 내가 그린 갈대는 파스칼의 갈대가 아니라 동양적 명상에서 추출된 사유하는 갈대이다. ● 인간이 동물의 질서에서 엄연히 구별하는 근본 특색은 생각하는 능력에 있다. 그러나 나는 염소(羔羊)에게서 사유를 발견하고 그것을 애써 그림으로 천착하려 하였다. 마치 노천명이 사슴을 통해 사유를 표현한 것처럼, 본능적 충동으로 살아가는 염소에게 이성을 부여한 것이다. ● 나는 줄곧 수많은 선의 중첩과 축적, 그 철저한 그리기 행위를 통해,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 내기 위한 [사색의 염소]를 그려왔다. 다시 그 염소의 사유를 문자적 코드로 인식한 [사유문자]가 나왔는데, 그 사유문자는 일련의 [묵시찬가]와 함께 언어와 소리를 표현한, 일종의 서양의 칼리그라피처럼 자동필기되는 문자적 코드이다. ● 만(滿)과 공(空)의 반복이 이어지면서 다시 그 문자적 조형을 버리고 염소 그 자체의 제스처인, [사유하는 몸짓]으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부처가 태자시절에 인생무상을 느껴 고뇌하는 명상자세에서 기원하였다는 반가사유(半跏思惟)의 불상이나, '생각하는 사람'의 로댕은 손의 제스처를 통해 사유를 이끌어 내고 있다. 나는 그러한 사유의 제스처를 염소의 몸짓으로 풀어내고자 하였다. ● 이제 [사유하는 갈대]라는 키워드로 빈 백색공간 위에 생체적 질서와 웅혼한 기상을 담은 부유하는 사유세계를 표출하고 싶다. 신을 발견한 파스칼은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 신의 침묵에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그 공간의 일부를 캡처한 사각의 빈 공간의 틀 안에서 자유로운 유영을 하고 있다. 그 생명의 기로 가득 채운 사유기행록을, 불가해한 오묘함의 무한 공간에 띄워 하이퍼링크를 걸어 두고 싶다. ● 화면 전체에 확산되는 흰 띠의 기운 서린 운로망(雲路網)은 현실의 차안(此岸) 공간에서 안개 터널을 지나 꿈꾸는 피안의 구름 공간으로 전이되는 상상의 이미지 맵이 된다. ● 고단한 삶의 여정, 존재론적 고통과 번민의 과정 속에서 삶의 원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색의 마른 풀을 뜯는 염소와 정적의 새, 바람에 서걱이는 갈대의 이미지를 통해 응축적으로 형상화해 본다. 그 슬픔과 분노를 외면한 듯한 침묵의 자세는 마치 구도자적 표정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서려 있는 세상에 대한 열정과 고뇌와 회한이기도 하고, 자아성찰에 대한 의지의 발현체이기도 하다. ■ 윤여환

윤여환_사유하는 갈대_장지에 수묵_60.6×72.7cm_2004
윤여환_사유하는 갈대_장지에 수묵_60.6×72.7cm_2004

윤여환의 회화 사유의 메타포 - 염소, 갈대, 새 ● 윤여환의 그림은 새나 짐승을 소재로 한 그림들을 그 범주로 하는 영모화(翎毛畵)에 속한다. 짐승들 중에서도 염소를 소재로 한 그의 그림은 염소의 터럭 한 올 한 올을 낱낱이 그려내는 정치한 묘사에 바탕을 둔 실재감과, 이에 따른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이 특징이다. 더불어 염소그림 외에도 일종의 자동기술법에 의한 문자조형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 「묵시찬가」 연작이 있다.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고대문자와도 같은 순수 기호 혹은 부호에 바탕을 둔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일종의 주관적인 영적 체험을 조형화 함으로써 사물의 감각적인 표면을 넘어선다. 하지만 이마저도 염소그림과는 별개의 그림으로 보기가 어려운데, 그것은 연이은 「사유문자」 연작에서 보듯 이러한 문자조형이 염소그림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문자조형이 염소의 정체성을 보충하기 위해서 도입된 느낌마저 든다. ● 이처럼 윤여환의 그림에 나타난 염소는 마치 손에 잡힐 듯한 실재감과 생동감에도 불구하고 그것 자체만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대신, 「사유문자」에서 「사유하는 몸짓」으로 그리고 재차 근작에서의 「사유하는 갈대」로 연이어진 주제에서 보듯이 염소는 사유를 대리하는 상징의 한 형태로 주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유의 속성을 밝히는 것이 작가의 전작(全作)을 관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원래 비감각적인 사유에다가 어떻게 감각적인 형태를 부여할 것인가, 사유를 어떻게 형상화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으며, 염소는 다름 아닌 그 사유를 표상하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다. ● 그러므로 작가의 염소 그림은 단순한 동물화 이상의, 우의화와 의인화의 한 형식으로 그려진 것이다. 즉 그 염소는 인간의 삶의 모습을 대리하고, 인간의 삶의 속성을 대리한다. 이렇듯 작가의 그림은 현대 한국화에서 그 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동물화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한편, 동물에 빗대어 인간의 삶의 모습을 풍자한 전통 민화의 전례마저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을 소재로 한 전통 민화가 그 속에 풍자를 간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염소그림 역시 대상에 대한 단순한 감각적 모사를 넘어, 현실 참여적인 일면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윤여환_사유하는 갈대_장지에 수묵_162.2×130.3cm_2004
윤여환_사유하는 갈대_장지에 수묵_162.2×130.3cm_2004

그렇다면 왜 염소인가. 작가의 그림에서 염소가 사유를 상징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배경으로는 아마도 염소의 뿔과 눈이 갖는 특이한 인상에 착안한 것 같다. 여기서 뿔은 말할 것도 없이 관(冠)을, 순수한 사유를, 고고한 정신을 암시한다. 그리고 설핏 보기에 그 초점을 잃은 듯한,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염소의 가로로 뉘어진 눈동자는 흔히 둥근 눈동자를 한 여타의 동물들의 눈과, 그리고 특히 세로로 서 있어서 날카롭게 보이는 고양이의 눈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여기서 그 초점을 잃은 듯한 염소의 눈동자는 사실은 먼 곳, 현실 저편의 아득한 곳, 인간의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곳, 인간의 인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곳, 자기 내면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지는 사유의 자기 반성적인 속성을, 회귀적이고 회향적인 본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 전작에서부터 근작에 이르는 일련의 그림들 속에서 염소는 이처럼 사유의 한 표상으로서 나타난다. 즉 염소는 세속적인 욕망을 암시하는 현란하고 화려한 색채의 바다 속을 거닐기도 하고, 마치 안개와도 같은 무의식의 바다 속을 거닐기도 한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도 같은 역사의 편린들과 더불어 역사성을 획득하고, 인간 군상과 더불어 현실성을 획득한다. 그 신체가 자연 풍경의 일부를 이루는가 하면, 여러 마리가 등장하는 그림 속에선 염소가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재구성되기도 한다. 예컨대 머리만 있고 그 몸이 생략된다거나 혹은 이와는 반대로 몸만 있고 그 머리가 생략되는 식이다. 이런 임의적인 구성은 우선 회화적인 화면 구성을 위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이와 함께 의미론적으로는 사유의 다중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특히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된 염소의 머리는 염소로 대리되는 작가 자신의 자의식을 암시하며, 따라서 작가의 염소그림을 자화상의 한 형식으로서 읽게 한다. 결국 윤여환의 그림에 나타난 염소는 감각적인 현상 저편의 비감각적이고 초감각적인 존재, 궁극적인 존재, 존재의 원형에로 이끄는 사유의 계기(메신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윤여환_사유하는 갈대_장지에 수묵_170×80cm×2_2004
윤여환_사유하는 갈대_장지에 수묵_170×80cm×2_2004

윤여환의 근작의 주제는 「사유하는 갈대」이다. 염소의 배경화면으로 그려 넣은 갈대가 사유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갈대는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에 비유한 파스칼의 전언으로부터 그 의미를 획득한 것으로서, 염소와 마찬가지로 사유하는 인간을 상징한다. 파스칼의 그 전언은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에 비유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개념과 함께, 역시 인간 존재의 본질을 사유하는 능력에서 찾은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인식(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햄릿의 절규(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와도 통한다. 따라서 갈대 역시 염소와 마찬가지로 자의식의 한 표출인 것이며, 존재론적 인식에 그 맥이 닿아 있는 것이다. ● 여기서 갈대 자체는 인간의 이중성을 함축한다. 즉, 인간은 갈대처럼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한다는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갈대는 강한 바람에도 꺾이지 않으며, 그 휘는 성질로 인해 인간의 이성이 갖는 유연성을 암시해 준다. 그런가하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이성은 부엉이로 상징되는 미네르바(Minerva)로 형용되는데, 이는 아마도 부엉이가 캄캄한 밤의 어둠 속에서도 깨어 있는 정신을 암시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이성, 정신, 사유는 원래 어둠에 속해 있던 것을 바깥으로 밝게 드러내는 능력을 의미하며, 그렇게 드러난 사실을 진리 혹은 진실이라 한다(참고로 이성의 어원인 로고스 Logos와 누스 Nous는 그 속에 빛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 작가의 그림에서 사유를 표상하기 위해 도입된 소재로는 염소와 갈대 이외에도, 그림 속에서 대개 염소의 뿔 위에 앉아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새를 들 수 있다. 이로써 염소로부터 갈대로 그리고 재차 새로 연이어진 변주를 통해 사유의 상징적 의미를 강화하는 일종의 중층화법이 느껴진다. 실제로 작가의 그림 속에는 마치 자연도감을 연상시킬 만큼이나 다양한 종의 새들이 등장한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그 새들이 하나같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추상적인 관념과 사유를 대리하기 위해서 도입된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를테면 새가 염소의 뿔 위에 앉는다는 일이 흔히 있을 것 같은 상황도 아니거니와, 뿔 위에 앉아 있기에는 좀 큰 새들도 있다. 말하자면 작가는 관념을 적용시켜 실제로는 큰 새를 염소의 뿔 위에 앉힐 만큼의 작은 크기로 축소해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윤여환_사유하는 갈대_장지에 수묵_170×80cm×2_2004
윤여환_사유하는 갈대_장지에 수묵_170×80cm×2_2004

이처럼 새는 사유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 새가 함축하고 있는 사유의 내용은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에는 붙잡히지 않는 영원한 자유가 될 것이다. 공간에 구속받지 않고 하늘을 나는 새, 아무런 생각도 의식도 없이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노니는 새의 유영에서 자유를 향한 인간의 욕망을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새에게는 하늘이 집이고, 인간에게 그 하늘은 이상세계다. 이처럼 모든 세속적인 목적지향성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세계, 인간의 욕망과 의식으로 오염되지 않은 순진무구한 세계,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고 의미가 되는 세계로부터 순수 사유는 기원한다. 그러므로 새는 모든 인위의 벽을 허무는 존재, 현실과 비현실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과 같은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 자유정신과 유연한 사유를 표상 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 그런가하면 근작에서의 화면은 여백공간에서 안개공간으로 그리고 재차 구름으로 전이돼 가는 과정이 발견된다. 여기서 여백과 안개와 구름은 서로 별개의 공간으로 분리돼 있기보다는 하나의 흐름, 무분별한 차원 속에서 연속돼 있다. 즉, 화면은 여백과 안개 그리고 구름의 지층이 서로 유기적인 흐름을 이루도록 처리돼 있는 것이다. 이는 배경 화면과 염소가 실제로 위치해 있는 공간을 분리시키는 시각적 효과를 낳고 있다. 마치 산 정상이나 산 속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는 염소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아득하고 유현한 공간감,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은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공간감이나 거리감은 실제의 공간이나 거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유의 속성을 암시하기 위해 도입된 심의적이고 심리적인 한 장치로 보인다.

윤여환_사유하는 갈대_장지에 수묵_72.7×90.9cm_2004

이처럼 윤여환의 그림은 외관상 극사실주의의 기법과 방법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실은 그 이면에 대상에 대한 단순한 감각적 모사를 넘어서는 여러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나아가 작가 자신이 이러한 사실적인 외관을 사유의 본질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장치로서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는 흑백으로 그려진 모노톤의 화면과도 무관하지 않다. 즉 모노톤의 화면은 실제를 어느 정도 추상화하는 면이 있으며, 이는 그대로 감각적 대상을 모사하기보다는 사유의 상징성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태도와도 통하는 것이다. ■ 고충환

Vol.20041028b | 윤여환 수묵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