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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210_금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_2004_1210_금요일_04:00pm
문화일보 갤러리 서울 중구 충정로 1가 68번지 Tel. 02_3701_5755 gallery.munhwa.co.kr
저 푸른 초원 위에 ● 변화하는 세월을 거스르지 않고 유유하게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만큼 행복한 삶이 어디 있을까. 자기중심을 놓지 않으면서도 변해가는 세월의 흐름에 맞게 세상에 대고 조분조분 이야기를 건네는 박영균이 꼭 그렇다. 90년대 중후반 이후에 세상에 나온 386세대의 정체성을 간명한 내러티브로 옮겨놓은 그림 「86학번 김대리」가 그러했고, 갑갑한 현실 속에서 나약하게 웅크리고 앉아 세상과 담을 쌓은 거실 한구석 「살찐 소파」가 그러했다. 이제 거실 속의 김대리가 두리번두리번 아파트 거실 바깥세상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박영균의 이번 전시는 소파 연작을 일단락 짓는 페인팅을 비롯해서 신축 아파트와 상가 분양광고를 차용한 디지털 프린트들과 실존을 투척하는 퍼포먼스 사진 작업들, 그리고 일상의 나른함과 일상담론의 진부함을 벗어던지려는 단채널 비디오 작품들을 선보이는 전환의 분위기로 가득하다.
텅 빈 거실의 살찐 소파를 그리다 ● 그가 시도하고 있는 변모는 너무도 태연하다. 사진이나 단채널 비디오 작업을 선보이면서도 지난 몇 년간 천착해온 소파 연작을 마무리하는 커다란 거실 그림을 야무지게 챙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자신이 그려온 거실과 소파 연작이 작가의 실존을 투영한 작가의식의 발로였으며, 이제 그 단계를 넘어서 모종의 활개를 준비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내비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박영균의 변신은 살찐 소파에 대한 감상을 모티프로 거실 공간에 머물러있던 작가의 시선이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거실 안 살찐 소파에 관한 단상을 되뇌어 온 그에게 있어 바깥은 그만큼 각별한 의미가 있다. 거실에 머무르는 동안 성취와 좌절의 시대를 거쳐 온 박영균이 키워낸 86학번 김대리라는 아이콘은 자신의 회화공간을 누비고 다니는 일종의 아바타였다. 그토록 열망했던 젊은 날의 높은 꿈을 한 순간 접고 소파에 기대어 앉아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로 세상을 바라봐야만 했던 작가 주체는 텅 빈 거실의 갇힌 공간 속에서 하염없이 혼돈의 정체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거실과 소파를 그려왔다. ● 그의 이러한 고뇌는 최근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 삶의 풍경에서 황지우의 시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를 낭송한 배우 박광정의 음성을 배경으로 전시장에 설치했던 패널 그림 「탕 거울 속에 입으로만 II」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무기력하게 일상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적응해야만 하는 삶을 지식인 특유의 시니컬한 시선으로 풀어낸 시적 내러티브가 강렬하면서도 차분한 원색의 울림과 꼼지락거리는 붓질의 맛으로 사각 프레임 안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것이 바로 박영균의 거실 그림이다. 2003년의 「살찐 소파」와 「살찐 소파의 일기」 또한 같은 맥락의 거실 그림들이다. 유행이 한참 지난 카페트와 앉은뱅이 컴퓨터 책상과 소파가 있는 거실 풍경이나, 살짝 드러난 빨간 바닥과 초록색 소파나 벽이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묘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견자를 바라보며 앉아있는 자화상 인물을 통해서 박영균식 거실 그림의 전형적인 요소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일견 세상에 관한 냉소이기도 하며 동시에 넉넉한 관조의 시선이기도 하다.
올해에 그린 신작들 가운데 「파랑 기둥이 보이는 방」은 분홍색 침대를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해놓은 그림으로써 거실 그림의 변화와 박영균식 색채미학의 변주를 예고하고 있다. 붉은 색 계열의 단색 톤으로 이루어진 텅 빈 거실의 소파 그림 위에 흰색 선을 어지럽게 흩뿌려 놓은 「살찐 소파」는 박영균의 거실 그림이 시적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을뿐더러 회화 관심을 대변하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이 그림은 단색 톤 안에서도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색의 맛을 드러냄으로써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색에 대한 민감한 정서를 추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드리핑 기법으로 흰색 선을 남김으로서 회화적 서정에 관한 그의 관심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이 그림은 거실 그림이 변주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형상회화가 동일한 소재를 지속적으로 다룰 때 나타나기 쉬운 매너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 길이가 6미터에 이르는 대작 「파란 기둥이 서 있는 방」은 그의 회화적 방법들과 내러티브를 총동원하여 수년간 그려온 거실그림을 총결산하는 역작이다. 소파, 장식장, 정수기, 텔레비전, 컴퓨터, 책장 등이 있는 거실 풍경을 그려 넣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밋밋한 거실 공간의 실내풍경화를 비범한 그림으로 만들어내는 박영균의 그림 맛이 돋보인다. 노란 원색의 바닥, 붉은 색 계열의 가구와 벽, 팩스나 프린터 주변의 꼼지락 붓질 등 그의 거실 그림의 온갖 요소들이 망라되어 있다. 여기에 포인트를 주는 것이 화면의 왼쪽의 시선을 주도하고 있는 파란색 벽이다. 이 벽은 시각적 장치일 뿐만 아니라 소파 앞에 서서 머뭇거리는 (자화상) 인물을 배치하기 위한 서술적 장치이기도 하다. 격정적인 사건의 연속 가운데서 비일상과 일탈의 꿈을 꾸어왔던 청년 화가 박영균에게 있어 90년대 중반 이후 보잘것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공간과 시간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와 삶의 모습을 잡아내는 일은 작가적 실존을 담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몸부림이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지난 10여 년 간 청년 박영균을 화가 박영균으로 길러낸 지독한 독백의 시간들을 담아낸 야심작인 셈이다.
그동안 간간이 주제기획전이나 단체전에 참여하면서 일상의 굴레를 넘어 비일상의 모멘트를 잡아내는 일을 시도해 왔던 그로서는 이번 개인전이 일상 작업의 종지부를 찍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근작들 가운데에는 기획전과 단체전에 이미 선보인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다. 2002년 월드컵 직후 쌈지스페이스에서 열린 기획전 로컬컵에 출품했던 「노랑 건물이 보이는 풍경」(2002년)은 시청 앞 광장의 한 쪽 옥상에 서서 붉은 물결로 가득한 광란의 현장을 내려다보는 장면을 포착한 그림이다. 2002년 작인 「중심」과 「때론 나도 우아하고 싶다, 벌레를 보면 소리도 지르고, 더운 날 치마도 입고, 하지만 밥하는 것과 설거지는 빼고」는 잔디밭 위에서 중심을 잡는 모습, 머리에 꽃을 꽂은 모습의 넥타이를 맨 남성들을 통해서 일상의 팍팍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기획 개념에 맞춰 그린 작업들은 거실 그림들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는데, 색채나 붓질의 맛과 거실 모티프를 벗어난 또 다른 그림 그리기에 기대를 갖게 하는 대목들이다.
가위질로 현현하는 소비사회의 이데아 ● 화가 박영균은 이번 전시에서 사진과 동영상 등을 동원함으로써 매체 확장의 측면에서도 상당히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모험에 찬 시도는 화가 정체성이 부여하는 표현의 한계를 탓하려는 부정의 시각도 없지는 않겠지만, 표현을 위해 매체를 선택하고 매체장악력을 키워간다는 점에 포커스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 평면회화를 하는 작가에게 있을 법한 동영상이나 사진 작업에 대한 나름의 스트레스에 대해 없는 셈 치고 그림만 그린다는 소신으로 일관할 수도 있지만, 박영균의 예술가적 에너지는 새로운 매체에 대해 과감하게 정공법을 택하는 쪽으로 기운 것이다. 오늘날 전방위로 가해지는 시각이미지 정보의 과잉 현상은 평면회화의 진정성을 압도하는 매체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기계조작이나 디지털이미지 가공 과정을 거쳐서 생산되는 정보가 그림 그리는 사람들에게 가하는 압박은 상상외로 심난한데, 박영균은 그것을 매우 낮은 단계의 기술력으로 돌파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역설적이다. 그의 도전은 오늘날 시각예술계에서 다루는 미디어아트가 하이테크 기반의 고급한 게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로우테크로 무장한 박영균의 사진과 동영상은 자칫 미디어 자체에 매몰되기 쉬운 매체미술의 갑갑함을 훌훌 털어버리고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산하고 있다. ● 발에 체이는 거리의 이미지에서 우리 사회의 이데아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박영균 같은 예술가의 눈썰미를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몇 번의 가위질로 그럴싸한 예술로 바꿔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흔한 이미지를 주워서 적당히 가위질을 한 다음 크게 벙튀기 해서 전시장 벽에 거는 행위를 통해서 이 시대를 읽어내는 예술가적 통찰력의 소유자 박영균은 키치적 개념미술을 겸비한 리얼리스트로로 거듭난다. 아파트 분양 광고 전단지의 한 부분을 따서 스캐너로 긁은 다음 크게 뽑아 전시장에 붙이는 일. 이것이 박영균이 보여주는 디지털 프린트 작업의 전부다. 그린다거나 물성을 변용하는 등의 조형작업을 최소화 한 확대복사만이 작가 박영균이 광고 전단지를 보여주는 예술적 행위의 전부다. 광고 행위에 의해 촉발되는 천민자본주의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한 액션이다.
여기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관심의 초점은 예술적 개념 그 자체이다. 박영균은 경쟁적인 개발건축 붐에 따른 자본주의 사회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분양광고 전단지를 예술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의 장치가 있다면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전단지의 텍스트들을 뺐다는 것이다. 텍스트가 빠진 상가와 아파트 분양 광고는 철저하게 익명성의 지배를 받는 현대 도시의 자화상으로 변모한다. 공간을 소비하는 현대사회의 익명성을 이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미지도 드물 것이다. 이들 건축물 광고 이미지는 설계 도면을 토대로 3D 작업을 거쳐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건축물의 이미지를 평면 위에 구현해내는 작업이다. 따라서 실재를 넘어서는 현란함을 과시하려는 용도에 따라 잡다하게 그럴싸한 이미지들을 가져다 쓴다. 결국 이 작업을 마무리하는 공정은 2D 작업의 정교함에 달려있다. 군중이 붐비는 공간임을 보여주기 위해 수백 수천 명의 사람 이미지가 여기저기 배치된다. 정원의 소나무 한그루와 절묘하게 우측 상단을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벚꽃 이미지는 공간감을 주기 위해 근경을 장식하는 단골 매뉴 가운데 하나이다. 건물 안과 밖은 최대한 복닥거리는 군중들로 가득 채우고, 건물 외형은 최대한 럭셔리하게 소비사회의 탐욕을 담아내고, 간판은 실재보다 더 리얼하게 기성을 따라잡고, 전면 반사 유리에는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이 두둥실 떠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 전단지 편집 작업은 곳곳에서 감지되는 현실자본주의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보여준다. 그것은 박영균의 가위질로 현현하는 지상낙원의 풍경들이며 소비사회의 이데아 그 자체이다. 「물, 옷, 차, 돈 그리고 사랑」은 모 그룹이 생산하는 음료수와 의류와 자동차와 금융산업과 더불어 사랑까지 상품화 하려는 광고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현대 도시의 삶을 포착한 이 이미지는 거대자본의 섬뜩함을 재발견 할 수 있는 한 컷의 다큐멘터리이다. 「다리 위의 그녀」는 건물 앞 정원을 포착한 풍경화이다. 아파트 분양광고의 한 장면을 딴 「좋냐」는 창문을 아이콘을 넣어 둠으로써 소시민의 꿈인 내 집 마련의 푸른 꿈을 환기시킨다. 「너는 어디에 있니」는 상가 건물의 외장을 걷어낸 단면도이다. 각 층마다 꽉 찬 사람들 하나하나의 모습은 마치 개미집을 열어보여주는 환경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같다. 5미터짜리 대작 프린트 「러거킹이 보이는 풍경」은 거대한 상가 건물의 앞마당에 가득한 사람들과 거물 외벽에 붙어있는 간판들을 부각한 편집이 기가 막히게 딱떨어지는 박영균의 작품이다. 광고판에는 넌킨도너츠, 게니건즈, 러거킹, 라스킨라빈스, 에스에스텔레콤, 티티에프 등 기성의 제품이나 회사의 이름을 교묘하게 변용한 텍스트들이 들어있다. 광고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편집 시스템이 보여주는 짝퉁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우리는 박영균을 통해서 통렬하게 읽어낼 수 있다. 회화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는 박영균의 작품 제목 다는 솜씨는 여지없이 이렇듯 흥미진진한 소스들을 잡아낸다. 작업의 개념을 한 두 마디로 집약해서 실마리를 제공하는 박영균의 언어감각이 발군의 묘미를 발휘한 것이다. 광고전단지 뿐만 아니라 문제지에서도 작업을 끄집어낸다. 사물을 화면에 배치하는 구도에도 정답이 있다고 가르치는 미술시험문제를 뻥튀기 한 「문제」가 그것이다. 구도의 3요소에 맞는 그림을 고르라고 하는 문제에서 발견한 문제의식을 전시장으로 끌고 들어오기까지 화가 박영균은 참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한동안 가위질과 뻥튀기질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그 무엇을 길러 올릴 것 같다.
11월 1일, 저 푸른 초원 위에 ● 전단지 편집 및 확대 인쇄 작업의 개념적 성향과 같은 맥락에서 사진과 동영상 작업은 상당부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주류를 바꾸자」(2004)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만든 포스터이다. 술병을 나열해 놓고 찍은 사진 위에 주류를 바꾸자라고 쓴 것을 이번에 다시 만들었다. 간단한 오브제 사진과 텍스트로 할말을 다 한 것이다. 「살인의 추억」(2003)은 반전 주제의 기획전에 출품했던 사진 작품이다. 총탄 자국이 무수하게 찍힌 북한괴뢰군 타겟 앞을 쓱 스쳐지나가는 작가 자신을 담은 사진이다. 노출을 길게 두어 타겟 앞을 지나가는 인물은 흐릿하게 유령처럼 흔적을 남기고 있다. 어느 언론에 실린 그의 사진 작업을 보고, 그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나로서도 깜짝 놀랐을 정도로 본격적인 전시장 출품용으로 만든 첫 번째 사진 작품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올 여름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제로 한 기획전에 출품했던 사진 「자유 평등 박애가 보이는 법원 앞에서」 또한 같은 맥락의 퍼포먼스 사진이다. 법원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퍼킹 아이콘을 만드는 그의 손가락은 법원 정문 앞에서 신학철의 모내기 사전에 항의하는 피켓을 목에 걸고 일인시위를 벌였던 박영균의 합법적인 시위에 비해 불온하기 그지없다. 일인시위자 박영균은 퍼킹 법원 퍼포먼스를 통해 상상력을 억압하는 시스템에 대해 불온한 실존을 투척한다. ● 단채널 비디오 작업 또한 박영균이 지난 3년간 간간이 도전해온 새로운 분야이다. 그가 최초로 만든 동영상 작업은 신해철이 만든 붉은악마 응원곡에 87년 유월항쟁의 영상과 2002년 월드컵의 붉은 물결을 교차 편집한 「대한민국」이다. 비디오 아트의 비자도 모르던 사람이 만든 이 작품은 뉴미디어아트에 관한 물신화 한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었다. 비디오 아트에서조차 (전통적인 회화와 조소작품의 전유물인 듯 한) 예술적 아우라를 기대한 나머지 박영균과 같은 비전문가가 만든 동영상이 폭넓은 예술적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에 만든 「손」은 여러 표정의 손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담았는데, 다소 관념적인 수사를 동원한 손장난 같은 것이라는 혹평과 깔끔하게 절제된 언어를 구사했다는 평이 엇갈렸다. ● 작업실 창에 캠코더를 고정시켜놓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바깥 풍경을 찍어서 빠르게 돌린 신작 「11월 1일」은 박영균에게 있어서 이모저모로 의미 있는 작업이다. 창밖의 풍경에는 평범한 길가의 전봇대 옆에 주택 몇 채가 잡힌다. 파란 지붕 뒤로 은행나무가 늦가을 하루를 보내는 동안 태양은 어스름 새벽부터 늦은 밤 가로등 불빛으로 바뀔 때까지 바깥 풍경의 역동적인 변화를 유도한다. 이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전봇대 밑에 놓인 소파다. 박영균이 지난 수년동안 자신의 실존을 투영하면서 공허함과 씁쓸한 분노를 표현해왔던 바로 그 소파이다. 이제 그가 소파를 버렸다. 작업실 앞 전봇대 밑에 아무렇게나 처박아 두었다. 화화 작업 자체에서 주제의식의 변모를 꾀했을 뿐만 아니라 실재 행동으로도 텅 빈 거실 속의 살찐 소파를 내다 버린 것이다. 하루 종일 1분 간격으로 1초 동안 촬영한 창밖 풍경이 빠르게 돌아가는 동안, 매 시간마다 반복되는 에프엠 디제이들의 인사말이 흐른다. 11월의 첫째 날, 11월 1일 월요일이라는 점을 여지없이 강조하는 디제이들의 오프닝 멘트가 반복되는 동안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전봇대 밑을 서성거리던 동네 할아버지도 집으로 돌아가고, 가로등 불빛 아래 늦가을의 서정을 더해가는 11월의 첫째 날, 한 주를 새로 여는 월요일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평범한 하루하루를 에프엠 라디오와 함께 작업실에서 보내는 예술가 박영균은 거실에 갇힌 자폐의 내면을 벗어나기 위해 11월 1일 월요일 하루를 그렇게 기록해 둔 것이다. ● 남진의 유행가 님과 함께를 배경으로 빠른 템포로 카메라 앵글을 360도 회전하면서 아파트 분양을 위한 모델하우스 실내를 비추는 동영상 작업 「저 푸른 초원 위에」는 분양 광고 전단지 편집 작업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지어진 그림 같은 집의 내부를 보여줌으로써, 내 집 마련의 꿈과 가족 안에서의 행복을 쫒는 소시민의 삶,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소시민의 그 애잔한 삶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 이미지들은 실재 공간에서 동영상 촬영을 한 것이 아니고, 조금씩 이동하며 부분 촬영한 평면 사진 이미지를 조합해서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어내는 기법을 썼다. 거기서 거기인 아파트 실내 공간. 안락한 쿠션이 놓인 소파 뒤로 적당히 추상적인 평면회화 작업이 걸려있고, 커다란 거실 창밖 바깥 풍경은 푸른 하늘을 투영한다. 미니멀한 조명기구와 적절하게 어울리는 꽃꽂이는 기본이고, 냉장고의 크기와 널찍한 평면 모니터가 평온한 가정생활을 담보한다. 수많은 모델의 모델링 하우스 실내 풍경을 매듭 없이 이어 붙여 빙글빙글 도는 세상. 아파트 인테리어에 박제된 현대인의 삶도 그렇게 돌고 돈다. 작가 자신이 지난 10여년 살아온 세월 또한 이러한 소시민의 일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음은 그의 거실 그림에서 누차 작가 자신에 의해 은밀하게 폭로되어 왔던 바, 이제 거실 소파의 자폐를 이 시대의 보편적인 문제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 시작하는 사람의 모습은 이래서 아름답다. 습관적으로 붓을 들고, 마술에 걸린 듯 붓질을 하며, 직업적으로 그림을 토해내는 화가의 삶이 어느덧 일상의 덫에 갇혀버릴 때, 그 덫을 풀고 스스로 상처를 핥아내며 또 다른 꿈을 꾸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 치열한 예술가의 삶에 경의를 표하며 그 영혼의 맑고 깊음에 존경을 보낸다. 박영균이 겪고 있는 변모의 시간은 아마도 이러한 자생과 치유의 시간을 통해서 젊은 날의 높은 꿈을 되짚어보는 과정들일 것이다. 이제 그는 창밖으로 눈을 돌려 세상을 담아낼 채비를 마쳤다. 실존적 고독보다 더 깊숙하게 정치적 고립을 감당해야 하는 작가로서의 홀로서기를 모색하며 웅크리고 앉아서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새처럼 그렇게 텅 빈 거실의 살찐 소파를 그려왔던 박영균에게 있어서, 거실을 나서는 김대리는 일상담론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는 고뇌와 결단이 낳은 결실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삶의 이데아를 새롭게 읽어내기 위해 그가 만들어낸 그림과 프린트, 움직이는 그림들을 꼼꼼히 둘러볼 일이다. ■ 김준기
Vol.20041209b | 박영균展 / PARKYOUNGGYUN / 朴永均 / video.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