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감이 깃든, 그리고 기꺼이 장식적인...

이혜경 개인展   2005_0119 ▶︎ 2005_0125

이혜경_무제_닥종이에 천연염색, 콜라주_160×13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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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119_수요일_06:00pm

갤러리 라메르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 홍익빌딩 Tel. 02_730_5454

조용하며 안정감이 깃든, 그리고 기꺼이 장식적인... ● 이혜경의 세계에는 여성의 누드나 나무, 달 같은, 대상의 축약되거나 변형된 재현 이미지와 구체적인 형상 없는 추상이미지들이 혼재되어 있다. 다양한 포즈의 여성 누드와 달, 만개한 꽃과 나무는 특히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인데, 그것들 모두는 윤곽선으로만 처리되어 화면의 추상적인 움직임 속에 쉽게 삼투되곤 한다. 하나의 선으로 대상의 윤곽을 지시해내는 동시에 화면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조정하는 이중의 효과를 얻는 셈이다. 대개의 경우 이 '선-마티에르' 는 종이재질의 릴리프 구조로 만들어지는데, 작가에 의해 하나하나 손수 만들어진 수공성으로 인해 그림은 더욱 인간적인 규모를 지닌 따듯한 것이 된다.

이혜경_무제_닥종이에 천연염색_163×123cm_2004
이혜경_무제_닥종이에 천연염색_101×21cm×3_2004

이혜경의 세계를 한층 더 흥미롭게 하는 것은 일정한 두께를 지닌 착색된 조각들로 서로 정확하게 맞물리도록 해서 하나의 화사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채색 상감기법'이다. 작가는 이 방식으로 커다란 달의 형상을 빚기도 하고, 색조의 변화무쌍한 변주들을 창출해내기도 한다. 이밖에도 화면은 자주 매우 유동적이며 리듬감이 넘치는 수평의 흐름들로 가득한, 부드럽고 장식적이며 여성적인 것이 된다. 이 수평의 리듬 위로 때론 어떤 수직적인 질서가 교차되기도 하고, 때론 임의의 패턴이 되풀이해 얹혀지면서 화폭 전체에 가벼운 변화가 야기된다. ● 이혜경의 세계에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 깊은 곳으로부터 발현되는 정서가 배어있다. 그 정서는 우선 어떤 의미의 형성이나 서술에 대한 부담, 곧 소통에 대한 '남성적' 강박증으로부터 사뭇 자유로워 보이는 분위기로 드러난다. 주제랄 만한 것들이 전혀 부재 하는 것은 아니다. 달과 나무, 꽃과 여인의 반복으로부터 이혜경의 자연친화를 듣는 것은 가능하며,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의 세계에는 분명 인간과 자연의 합일에 관한 사려 깊은 사유와 발언이 내재해 있다. 어떤 의미로든 예리하게 날이 서 있거나 공격적인 것들이 아니며, 전달되는 방식 또한 일방적이거나 선동적이지 않은 것들, 이혜경의 세계에선 그와 같은 것들만이 허용되는 것이다.

이혜경_무제_닥종이에 천연염색, 콜라주_96×96cm_2004
이혜경_무제_닥종이에 천연염색_101×21cm×3_2004
이혜경_무제_닥종이에 천연염색_111×200cm_2004

이혜경의 회화가 전하는 것은 대개 소박하게 발화되는 어떤 염원의 형태를 띠고 있다. 마티에르만 해도 그렇다. 종이재질의 그 낮고 완만한 릴리프는 예컨대 차가운 평면에 격앙된 감정을 퍼붓는 장치였던 앙포르멜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이혜경의 것이 만들어내는 소박한 요철은 그림을 요동케 하는 대신, 더욱 부드럽고 차분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마음껏 대상을 재현하고 설화의 구성에 나섬으로써, 지난 한 세기 간의 회화사를 들끓게 했던 '평면'의 미학논쟁을 효과적으로 극복한다. 이렇듯, 이혜경의 마티에르는 무미건조한 평면을 극복하면서도 결코 감정의 격앙을 부추기지 않는 특유의 미덕을 지니고 있다. 색조의 작동 또한 다분히 여성적이다. 색은 아예 부재하거나 종이에 스며들고 착색되면서-즉 '절반의 질료화' 과정을 지나면서- 기꺼이 원색의 자극을 상실한다. ● 릴리프의 수공성과 부드러운 색조, 그리고 현실에 대한 치열한 발언이거나 깊은 사유의 반영인 것도 아닌 소란스럽지 않은 이미지들... 이혜경의 세계 어디에도 첨예한 형이상학적 사유를 경유해야만 접근이 가능한 담론은 없다. 심리적 평화와 장식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에 그토록 집착했던 지난 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이혜경의 세계는 확실히 너무 느슨해 보인다. 거기에는 지적인 긴장을 오히려 무장 해제시키는 어떤 치명적인 안정이 있다. 하지만, 왜 인지(認知)를 각성시키고, 긴장시키고, 굳게 만드는 것만이 미술이 뒤쫓아야 할 절대 선(善)이란 말인가? 그 같은 설(說)은 특히 지난 한 세기를 통해 증폭되고 관례화 되어 온 집착의 결과일 뿐이다. 지식의 증대를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극도의 긴장을 통해서 뿐 아니라, 긴장이 완화된 인지로부터도 획득될 수 있음을 환기하자는 것이다.

이혜경_무제_닥종이에 아크릴 채색_50×50cm_2004
이혜경_무제_닥종이에 콜라주, 아크릴 채색_162.5×130cm_2003
이혜경_무제_닥종이에 천연염색_101×21cm×4_2004

이러한 맥락에서 이혜경의 그림들을 다시 보자. 그것들은 굳이 과거의 논쟁들, 반성과 긴장감에 중독된 소위 엘리트 미술의 유산에 집착하지 않는다. 미술이 인식론이나 건드리는 까다로운 논문쯤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지독한 괴변인가? 그래서 이혜경은 마음껏 논쟁을 기피하고, 담론을 거세하며 장식적이고, 조용하고 안정감이 깃 든, 일테면 격식 없는 산문 같은 그림을 실천하는 것이다. ● 이혜경의 세계 어디에도 관념적 사유를 부채질하는 각성제가 투여된 흔적은 없다. 가차없이 인식체계를 타격 하는 낯선 충격도 없다. 그것은 또 새로운 조형 담론의 창출에나 목을 매는 따위의 맹목적인 실험의식과도 거리가 있다. 실제로 이혜경의 마티에르는 형상을 방해하지 않으며, 충분히 질료에 스며든 색은 이미 그 자체의 웅변을 상실했다. 이미지와 재질, 색과 질료 그 어느 것도 자신만을 입증하려 드는 자율성 담론의 각성효과에서 벗어나 있다. 확실히 고도의 반성을 촉구하기나 실험적인 예민함은 이혜경이 걸어 왔던 길이 아니며, 걸어가야 할 길 또한 아닐 것이다. 격발하기 보다는 진정시키고, 소란을 떨기보다는 조용한 가운데 작동하는 감성, 그것이 이혜경이 생성하고 있고, 또 생성해가야 할 소중한 지식의 유형일 것이다. ■ 심상용

Vol.20050117a | 이혜경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