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일상

윤종석 회화展   2005_0119 ▶ 2005_0207

윤종석_사랑은 몽실몽실_나무, 변형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230×19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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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119_수요일_06:00pm

갤러리 아트사이드 서울 종로구 관훈동 170번지 Tel. 02_725_1020 www.artside.net

모호하지 않은, 맑고 긍정적인 것들의 서사 ● 년 전에 처음 윤종석의 드로잉을 접했을 때가 기억난다. 감각적인 일필휘지의 터치도 그러려니와, 그 각각을 빼곡하게 채운 균질의 무수한 점들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작가는 시간적으로 서로 상치하는 두 질서의-사군자를 치는 듯한 빠른 붓질과 그 흔적을 미세한 점들로 덮어가는 느린 노동의- 공존을 실험하고 있었던 듯 하다. 민첩하고 더딘 상이한 시간질서의 이같은 시차적 상존으로 윤종석의 드로잉은 충분히 진정되어 있으면서도 섬세하고 예민한 어떤 것이 되어 있었다.

윤종석_찬란한 슬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97cm×4_2004

작은 점들의 무한한 이합집산, 그 집약과 분산이 성취해내는 밀도의 변주는 작가의 세계에서 여전히 본질적인 요인이다. 끝없는 반복, 노동과 인내의 결과인 그것들은 그 자체로 그렇게 되어 온 시간의 반증이다. 윤종석의 사유 저변은 여전히 시간이다. 굳이 최근의 작품에서 보이는 차이를 대라면, 색채의 명쾌한 조화가-또는 대비가- 약진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색채의 이 매력적인 활용은 주로 꽃의 형상인 주이미지와 배경 사이의 간결한 구성적 질서에 의해 더욱 자명한 것이 된다. 그 이미지들은 때로 그 자체로 쉐이프트 캔버스가 되기도 하며, 많은 경우 색은 신중하게 조절된 파스텔 톤의 스펙트럼 상에서 왕래한다. 이같은 요인들, 간결한 구성적 질서와 파스텔 톤의 이미지, 색채들의 부드러운 충돌,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요인들 위를 덮는 분말 같은 세미한 점들로 인해 윤종석의 회화는 이미 충분히 밝고 부드러운 긍정적인 것이 된다.

윤종석_찬란한 슬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97cm_2004
윤종석_찬란한 슬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62cm_2004

작가의 회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따듯하다. 진지하고 세심한 수공적 노동은 그 발화가 충분히 성실한 것임을 입증한다. 캔버스에 주사된 물감의 섬세한 단위인 점들은 거창한 이념을 표출하거나 격한 감정을 표현하기엔 너무 왜소하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쌓이면서 캔버스에 시간을 축적하고 두께를 형성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거대한 서사나 물질의 남성적인 과시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물감이 더해지고 두터워질수록, 역설적이게도 질감은 더욱 부드러워져 간다.

윤종석_훨훨(산책자)_나무, 변형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4×74.5cm_2004

윤종석의 작은 점들은 마치 영양제라도 주사하듯, 혹 정원에 잔디라도 심듯 캔버스에 물감을 주사한 결과다. '캔버스-정원'의 상관 항은 작가에게 단순한 비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작가에게 캔버스는 기억에 남아있는 고향의 정겨운 들녘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은 작가가 손수 깎아 캔버스에 붙인 작은 목각들로 분명해진다. 작가의 '캔버스-들녘' 저만치 어딘가엔 목각 기와집이나 목각 누렁이, 목각 초생달 같은, 지극히 소박한 고향의 것들이 등장한다.

윤종석_붉게 불들다_나무, 변형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2×26.5cm_2004

예컨대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거나 천박한 자본주의를 고발하는 것이었다면 훨씬 더 돋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윤종석이 그림은 자신의 복부에 총을 쏘거나 자신의 얼굴을 난자해가면서라도 입증해야 할 어떤 치열한 논증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꽃과 정원, 고향 같은 '김빠지는' 것들이 고작이다. 일테면 담론의 거품을 부글거리게 하는 '지적 과시용'으론 불리한 모티브들이다. 첨예한 개념들의 불꽃놀이를 전원에서 벌일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윤종석_하늘을 나는 돼지_종이에 연필, 크레파스_26.7×26.3cm_2003
윤종석_길위 화가의 외발자전거_종이에 연필, 크레파스_26.5×26.5cm_2003

각광받는 비평적 주제들이 아니라면,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 시대'엔 차라리 극적인 비현실이나 몽환의 오솔길을 제공하는 것이 더 환영받을 만 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윤종석의 세계는 작가와 관객 모두를 너무 멀리 데려다 놓곤 하는 상상력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복잡한 매개 없이도 누구라도 만날 수 있으며, 만나 오기도 했던 세계다. 거기엔 세계와 현실의 두툼한 색인이 매달려 있고, 그것에서 예외인 어떤 자극적인 포장도, 준엄한 규범도, 유토피아 담론도 없다. 자의적인 수수께기를 구성함으로써 모호함을 배가시키거나, 불가해한 해석을 곤혹스럽게 강요하는, 소위 '엘리트적 장치'도 보이지 않는다.

윤종석_부부싸움_종이에 연필, 크레파스_40.5×23.5cm_2003
윤종석_아름다운 비행_종이에 크레파스, 유채_28×77.6cm_2004

그래서 그의 세계를 긴장의 결핍으로 규정하기 전에, 한 가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시대의 미술이 '과도한 모호함'과 '인식론적 방법론'에 지나치게 경사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현대의 많은 작가들은 기존의 질서를 확고하게 의심하는 반면, 자신의 질서를 대야 할 대목에선 관례적으로 말끝을 흐린다. '어떻게 의심할 것인가'에 밀린 나머지, '무엇을 말할 것인가'는 아예 문제 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러는 사이에 예컨대 '역동적인 모호함'이나 '정체성 이전(以前)의 상태' '지적 상대주의' 같은 모호한 용어들이 범람해 왔다. 명확한 서술구조는 미술의 금기가 되었고, 모호하지 않은 발언은 대중의 천한 취향쯤으로 격하되었다. 난해한 메타포를 대거 동원하거나 당위조차 없이 서술구조를 비비 꼬아댐으로써, 아예 소통의 의지 자체를 유린하고 미술의 불신임을 양산하는 유해한 생산물들이 얼마나 널려있는가?

윤종석_사육되다_종이에 연필, 크레파스_28×22cm_2003 윤종석_허전한 마음_종이에 연필, 콘테_29.5×21cm_2004

구성적인 질서와 색의 조화, 수많은 점들이 만들어내는 외면하기 어려운 서사들, 거만하지 않은 작은 목각들, 이 모두가 함께 조율해내는 어떤 안정감과 평화.... 윤종석의 회화를 만나는데 직업적인 코드 따윈 필요치 않다. 기묘한 장치들, 엽기적인 모티브들, 예컨대 고환을 달고 날아가는 새나 나팔관이 달려있는 구두 밑창 따위의 모호하고 자극적인 알레고리 없이도, 작가의 회화는 충분히 시선을 유혹하고 인식을 자극한다. 작은 물감의 단위들로 된 부드러운 밀도와 그것을 성취한 진지한 수공성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사적이고 이념적인 해석을 잉태할 수 있다. 구성적 간결함 위로 얹혀지는 꽃과 기와집과 보름달과 누렁이의 대비도 얼마든지 복잡성의 서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윤종석의 회화는 눈을 즐겁게 하면서 동시에 인식의 활력도 지원한다. 시선과 인식의 조용한 균형, 그것이 윤종석의 회화가 성공적으로 입증해 가고 있는 미덕 중 하나다. ■ 심상용

Vol.20050122a | 윤종석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