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 대한 단상

장동현 조각展   2005_0301 ▶︎ 2005_0310

장동현_깊이에 관한 단상 04-1_종이_94×63×12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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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301_화요일_05:00pm

갤러리인데코 서울 강남구 신사동 615-4번지 Tel. 02_511_0032 www.galleryindeco.com

깊이에 관한 단상 ● 모든 존재가 부피를 지녔다면 이 부피의 엷기와 두껍기는 그 용적과 무게로 결판이 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코끼리와 톰슨 가젤의 부피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코끼리의 용적이나 무게, 두께들을 톰슨 가젤의 것은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가 있다. 그 크기나 용적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다. 탱크와 권총 사이에 벌어질 이런 내용의 질문도 같은 결과를 부른다. 이들에 대한 값을 '존재차원'으로 볼 때 그 평가기준은 정확하게 나온다. 인간을 예로 들더라도 일단 존재차원을 두고 말한다면 객관적 평가치는 나온다. 저울에 달아 본 무게 차이나 크기의 차이도 뚜렷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의미차원'으로 질문의 답을 요구하면 그것은 객관가치가 아니라 주관가치로 변한다. 예술은 존재하는 것들의 내보임을 통해 의미를 묻는 행위이다. 널려 있는 것들의 의미와 가치, 이것이 작가가 묻는 질문들 속에 들어 있다.

장동현_깊이에 관한 단상 05-1_종이_120×140×25cm_2005
장동현_깊이에 관한 단상 05-6_종이_35×20×15cm_2005

인간이 그렇게 사람으로 살아있음의 가치, 그 있음의 깊이, 부피와 무게를 묻는다면 과연 어떻게 진정한 값을 매길 수 있을까? 한 인간의 존재 값이란 과연 얼마나 될까? 그의 값을 매기는 기준은 무엇일 수 있을까? 외양? 아니면 내면? 그 둘은 과연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있는 어떤 것일까? 장동현 작품의 두께와 깊이에 대한 명상은 인간 삶에 대한 가치를 묻는 치열한 작가의식으로 내게는 다가왔다. 한 인간 존재가 그 존재의 두께를 보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깊이에 대한 단상]은 두툼한 종이판들을 켜켜이 쌓아 높은 두께로 모아져 있고, 그 두터움 옆에 한 사람 형상은 누인 채 패어 깊은 어둠과 깊이를 만들며 보이고 있다. 존재의 심연, 살아있음의 끝 모를 연못을 이 작품은 연출한다. 그 사람형상을 파느라 생겨난 조작들은 켜켜이 옆에 쌓인 또 하나의 깊이, 살아 올라야 할 높이로 작가는 축조하여 있음 꼴의 두 안과 밖 쪽을 상징으로 처리하고 있다. 어둠과 밝음이 두 '깊이-곧-높이'로 대응하면서 이 조각 작품은 독자의 시선을 끈다. 심연의 밑에서 올려다 볼 경우 그것은 높이로 측정될 수 있고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 볼 때 그것은 깊이로 측정된다. 존재는 언제나 깊이와 높이를 몸에 지니고 있고 그것은 정신의 '깊-높이'로 확장된다. 정신의 깊-높이, 그것은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체험의 두께? 존재에 가해진 절망과 아픔을 참아낸 시간의 너비로 그것들은 측정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가정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정현기 (이 내용은 1회 개인전 평론에서 발췌되었습니다.)

장동현_깊이에 관한 단상 05-10_종이_20×15×5cm_2005
장동현_깊이에 관한 단상 05-11_종이_20×15×5cm_2005
장동현_깊이에 관한 단상 05-12_종이_95×100×13cm_2005
장동현_깊이에 관한 단상 05-3_종이_80×110×20cm_2005

하나의 점을 찾아 온 정신을 한곳에 머물 수 있는 것은 그곳에 도달했을 때 얻어지는 알맹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깊이, 외연外延(껍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르고 도려내고 또는 뜯어내고 파내는 작업은 하나의 수행이다. 그러한 행위의 반복은 다른 어떠한 행위로 대체할 수 없는 집중력을 가지고 내적 깊이를 만들어간다. 껍데기와 잘 분리된 알맹이는 차곡차곡 쌓아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은 근사한 성城이 된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찾고 있던 본질이 아님을 깨닫고 내 놓는 순간 가슴속은 후련해진다. 고통을 감수하고 잘려진 알맹이를 버리고 껍데기를 주워 담아 쌓는 것 또한 수행이다. ● 도심 한복판의 빌딩숲속을 삭막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지만 공해로 찌든 삭막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보다 그 안에 구축되어지고 조직화 되어 있는 구조물들은 미적 쾌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스스로 구축주의자라 굳이 일컫지 않더라도 지금의 여러 건축가나 타틀린이 그러했듯이 건축물 뿐 아니라 쌓여있는 건축자재나 심지어 산에 빼곡히 들어앉은 나무들을 보면 미의 질서와 자연스러움, 그리고 그것이 생성되어 질 때까지의 수많은 고통과 자기 수양이 스며들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 장동현

Vol.20050303c | 장동현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