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성(物性)을 넘어선 빛을 통한 내밀한 속삭임

최상현 회화展   2005_0324 ▶︎ 2005_0403

최상현_White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32×132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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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324_목요일_06:00pm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Tel. 02_720_5114 www.kumhomuseum.com

최상현은 대학 재학시절부터 내면의 분출을 드러내는 강렬한 추상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대구지역을 중심으 로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당시의 작업은 붉고 검은 색채로 기호적 형상을 그려낸 추상작품들로, 뛰어난 색 채감각과 감수성을 드러내고 있다. 회화가 가지는 원초적 즐거움과 생동감 있는 표현, 그리고 지금까지 그 의 작업의 근간이 되는 재료에 대한 성실하면서도 열정적인 시도들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초기 작업에서 벗어나 그가 화면을 단순화하고 감성적 표출을 정련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경부터다. 검정 위주의 색채 로 규칙적인 붓놀림과 간헐적인 흘리기 등의 표현이 새롭게 진행된다. 점차 자신 내면의 이야기, 종교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하여 작품제목도 성서적 의미의 '광야'라고 하는 등 조형적 시도와 내적 의미를 결합 해 나간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은 혹독한 수련과정을 자신의 작업과정, 즉 독자적인 재료 나 기법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에 빗대어 상징한 것이다.

최상현_Black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32×132cm_2005
최상현_Green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05×185cm_2005

이번 금호미술관 전시에서 작가 최상현이 선보이는 작품들은 지난 4년 여 전부터 지속해 온 것으로, 광야 시리즈의 발전된 형태라 볼 수 있다. 드로잉 작업에서의 몸동작이 느껴지는 필선이나 뿌리기가 은빛 펄이 포함된 단일색조의 격자무늬 화면으로 바뀌었다. 모더니즘이 발전되면서 말레비치나 몬드리안의 작품에서, 이후 미니멀리즘에서 많은 작가들이 시도했던 격자무늬인지라 그의 추상은 우선 모더니즘적 시도로 와 닿 는다. 그의 격자는 화면 내에서 조형적 자율성을 시도하는데, 단일한 색조로 구성되어 있어서 화면내에서 의 변화란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을 두텁고 균일하게 바른 뒤 이것이 마르기 전에 날카로운 선으로 직선 무늬를 그려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한편 아크릴 물감 표면에 촘촘히 직선을 그려나간 그의 노 동이 직접적으로 와 닿고, 화면에 패인 홈을 통해 물감의 물질성이 더욱 두께 있게 느껴져서 손에 잡힐 듯 하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작업을 보면 동일한 직선을 그어서 파인 홈들이 이들 직선의 방향과 물감의 두 께에 따라 빛을 달리 반사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즉 물질에 가해지는 긴장감 있는 선의 반복을 통해 단일한 색채화면이 완성되고 여기에 '빛'이 투사되면, 물성(物性)과 노동으로 일구어낸 캔버스가 점차 '빛' 의 변주를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이 '빛'을 강조하기 위해서 작가는 지금까지 표현해 온 다양한 조형요소 들을 감추고 단순한 격자의 반복과 모노크롬의 색채로 일관하는 것 아닐까. 결국 그가 추구하는 조형적 요 소는 근원적인 어떤 빛을 찾아가는 의도와 맞닿아있는 것 같다.

최상현_Blue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각 90×30cm_2005

과거 회화사에서 '빛'의 문제는 화면 안에서의 명암의 추구 외에도 여러 각도로 진행되었다. 종교화의 경우 동서양 모두 성인의 광배에 금박을 처리하였는데, 이는 금박으로 칠해진 화면의 반사를 통해 성스러운 빛 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빛은 르네상스 회화에서는 물감으로 그려졌으며 이후 인상주의에 와서 빛은 보다 과학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오늘날에는 화면 내에서의 빛에 대한 탐구 보다는 전시장 의 조명을 통한 작품의 변화, 직접적인 변화를 꾀하는 다양한 설치 개념의 외적인 요소로서의 '빛'에 의존 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최상현 작업의 '빛' 역시 이러한 현대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좀 더 적극적인 빛의 반사 효과를 내기 위하여 과거 중세 이콘화에서의 금박처럼 펄이 섞인 흰색, 검정색, 파란색을 선택하여 반짝이는 빛을 추구한다. 직선으로 홈을 판 것은 이의 반사에 따른 미세한 변화를 의도 한 것으로 물감의 반짝임과 각 격자 간의 다른 반사로 인해 야기되는 색채의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사각 형, 혹은 육면체의 반복이 모이고 쌓여서 단단한 벽을 이루고 이 균일한 화면이 빛을 만나서야 비로소 자 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상현_Black & Blue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30×120cm_2005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책상에 놓인 촘촘한 글씨체로 직접 써내려간 성서의 필사본과 그의 중보기도 수첩에 실려 있는 다른 이들을 위한 기도문들을 접할 수 있었다. 지속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해나가는 현대미술의 성향과 종교적 내용이 갖는 무거움을 생각한다면, 신앙에 관련한 내용을 소재로 삼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작가 자신이 이야기 하듯이 그의 삶과 작업에 있어서 종교의 문제는 지고의 가치이기에 최상현의 생활 속 성서의 필사(筆寫)와 기도는 고스란히 그의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듯하다. 즉 그에게 있어 밑바탕 칠이 마르기 전에 반듯한 선을 그어나가는 작업은 마치 성서내용이나 기도문을 반복적으로 써내려가는 행위와 마찬가지며 10여 년간 지속된 재료기법적인 탐구는 그가 '광야'라는 제목에서 밝혔듯이 작가로 성장하기 위한 수련과정으로 읽혀지는 것이다.

최상현_Cross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50×50cm_2004
최상현_Cross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50×50cm_2004

이번 전시에서 우리는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최상현의 화면 속 격자들이 빛을 발하며 조금씩 다른 색채와 감성을 드러내는 것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손에 잡히지 않는 '빛'을 통한 잔잔한 여운을 통해 그의 미니멀한 추상작업들이 회화의 물성(物性)을 넘어서서 어떻게 내밀한 영혼의 속삭임을 전해 줄는지 기대해본다. ■ 김유숙

Vol.20050324c | 최상현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