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빛스밈

박영학 수묵화展   2005_0323 ▶︎ 2005_0329

박영학_검빛 풍경으로 스미다_장지에 방해말, 먹, 목탄_22×22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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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323_수요일_06:00pm

예술디자인갤러리 토포하우스(구 삼정아트스페이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02_722_9883

1. 스치다철근은 자란다. 나무뿌리처럼 쑤욱쑥 / 새들이 나는 하늘에도 땅 위에도 - 이시영_'마포를 지나며'중에서 ● 일상생활을 위해, 즐거움을 위해 탈 것에 앉아 길을 나선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을 나는, 무감히, 스쳐간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 속 시공의 변화속도는 달리는 차들의 속도보다 빠르다. 무한질주하는 시공의 격자창에 그려진 무수한 세상풍경에 눈길을 줄만큼 나의 삶은, 우리네 삶은 여유롭지 않다. 먹고 살기위해 기를 써대야 한다. 변화와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내 몫의 현실을 열심히 살아갈 뿐인데… 어느새 난 세상의 장면들을 스쳐가고 있다.

박영학_검빛 풍경으로 스미다_장지에 방해말, 먹, 목탄_각 22×16cm, 120조각_2005
박영학_검빛 풍경으로 스미다_장지에 방해말, 먹, 목탄_각 22×16cm, 6조각_2005

2. 왈칵, 기색을 느끼다굶주린 마을에 봄이 오면 / 사금파리 빛나는 언덕에도 새 쑥이 돋고 / (중략) / 오랜만에 물길을 만난 개울은 소리쳐 흘러 / 온 마을 사람들을 퍼뜩 정신 들게 한다. - 이시영, '앞들 뒷들'중에서 ● 일상사를 마치고 일터로 돌아간다. 해야 할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줄지어 달리는 차들을 무료하게 보던 내 눈길이, 순간, 흔들린다. 검게 덩어리진 숲이다. 그래, 숲이 저기 있었지…. 이윽고 새 생명의 씨앗을 품고 넉넉함으로 봄을 기다리는 논과 밭, 나무와 숲, 들과 산, 집과 마을이 하나하나 내 눈 속으로 들어온다. ● 늘 그곳에 있기에 문득 잊고 있던 내게 착하게 다가선다, 자연이. 분주한 일상을 살아내기 바빴던 내게 조용히 다가선다, 세상과 사람이.

박영학_검빛 풍경으로 스미다_장지에 방해말, 먹, 목탄_120×120cm_2005
박영학_검빛 풍경으로 스미다_장지에 방해말, 먹, 목탄_163×130cm_2005

3. 검빛 풍경으로 스미다어디에 가도 우리 등뒤로 큰 산이 숨쉬고 / 어디에 가 살아도 우리 마음 속으로 넉넉한 강이 흐르듯 / 밤 들판을 지나 새벽 들까지 / 새벽 들을 지나 콩밭의 이슬이 마를 때까지 / 빈 들에 엎드려 살다 / 이제는 푸르른 들과 함께 누운 / 가난하지만 착한 이웃들을 불러모아 / 모닥불을 일구자 - 이시영, '山노래'중에서 ● 검빛은 모든 빛이 함께 스미어 만들어진 빛깔이다. 나무의 그을음과 재인, 먹과 목탄이 자신의 검빛으로 스미며 또 다른 검빛을 발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내가 서로의 기색을 느끼는 순간, 시간의 흐름은 압축되며 유연한 바람결이 된다. 검빛 시공 안에서 검빛 풍경은 서로의 존재를 바라보고, 인식하고, 스미어, 각자이면서도 하나가 된다. 스쳐가며 존재를 잃었던 사물들이 검빛 풍경 안에서 제 나름의 색과 향기와 형체를 담담히 드러낸다. 검빛 풍경 속으로 적요히 나도 스민다. ● 꽃은 반만 피었을 때 보고, 술은 조금만 취하도록 마시는 가운데, 아름다운 깊은 맛이 있다는 채근담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내 그림 속 화면의 부족함과 비어있음 속에서 나의 마음과 보는 이의 마음이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을까…. 부족하나 완전하고, 비어있으나 가득 채워진 그 무엇을 느끼며 우리는 검빛 풍경이 될 수 있을까…. 사람들 사이에 떠있는 섬, 그 섬에 가고 싶은 내 마음의 길을 따라 당신도 걸어 들어와 함께 풍경으로 스미게 될까….

박영학_검빛 풍경으로 스미다_장지에 방해말, 먹, 목탄_22×16cm_2005
박영학_검빛 풍경으로 스미다_장지에 방해말, 먹, 목탄_163×130cm_2005

4. 꿈꾸다따로따로 모여서서 거대한 침묵을 이루는 / 겨울 산이 더욱 좋다 / 나도 이제 내 몫의 침묵을 안고 돌아서야지 / 저 살아 있는 마을의 떨리는 불빛들 속으로 - 이시영, '겨울숲에서'중에서 ● 그림은 그것을 그린 사람의 얼굴을 닮는다. 난 내가 그린 그림이 무외시(無畏施)의 얼굴이 되길 꿈꾼다. 부처의 얼굴이며, 인간 각자의 진정한 자아의 얼굴이라 했던가. 세상 사람들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고 평온한 행복을 안겨주는 얼굴. 평생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면서 늙어가다, 어느 날인가에 무심히 종심(從心)을 얻어 무외시의 얼굴을 한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꿈꾼다. ● 「… 가는 길」연작을 그리던 지난 시절의 내게 자연은 도착해야할 목적지였던 것 같다. 자연과 현실공간의 불협화음을 풀어내려던 시도들은 치열함에도 불구하고 서툴렀다. 이번 전시를 위해 「검빛 풍경으로 스미다」연작을 그리는 동안 나는 조금씩 자연과 현실의 분열을 넘어서고 있음을 느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들은 괴로운 행복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저 산을 산처럼, 사람을 사람처럼 그릴 수 있기를 사무치게 꿈꾼다. ● 이시영 시인이 젊은 시절 첫 시집 발표 후 10년 만에, 38살이던 1986년 발표한 시집 「바람속으로」를 이번 전시회에 부쳐 인용했다. 근 20년 전의 시집이지만 현재 나의 그림인생의 절망과 꿈을 투영하기에 적절한, 시간의 풍화작용으로부터 벗어난 시들이기에. ● 그림을 업으로 삼아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세상·사람·자연과 만나고, 대화하고, 사랑하는 방법은 내가 그린 그림을 통해서이다. 사람들과 내가 그린 그림이 스치듯 만나는 순간, 시공이 부드러운 바람으로 흐르며, 서로에게 검빛 풍경으로 스며들기를. 그림과 사람이 가붓이 깊어지며 적요한 풍경이 되기를 꿈꾼다. 내가 세상과 그림 속 만물(萬物)과 그러했듯이. ●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는 순간 무외시의 얼굴을 만난 듯, 삶의 고단함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평온해질 수 있기를. 내 그림으로 인해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기를 꿈꾸며… 나는 오늘도 담담히 묵묵히 그림을 그린다. ■ 박영학

Vol.20050326b | 박영학 수묵화展